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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기자가 간다] ‘희망이 없기에 희망을 산다’… 로또 구매 열풍 해부 

“팍팍한 현실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서민의 활력소” 

이상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로또 판매액 사상 처음 5조원 돌파… 구매자 87%가 중산층·저소득층
경제 어려울수록 일확천금 기대심리 커져, 스트레스 낮춰주는 효과도


▎청량리역 5번 출구에 위치한 로또 명당. 퇴근 시간 전인 오후 3시경에도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방문해 로또를 사 갔다. / 사진:이상우 인턴기자
"로또 당첨되면 임대 아파트에 입주해서 여생을 편히 살고 싶습니다.” 지난 2월 3일 ‘로또 명당’으로 유명한 서울 청량리역 5번 출구 인근 복권 판매점에서 만난 민형식(81)씨의 바람은 소박했다. 안암역 근처 고시원에 사는 독거노인 민씨는 은행 업무도 볼 겸 명당에서 복권을 사려고 안암동에서 청량리역까지 걸어왔다고 했다. 어젯밤 꿈자리가 좋았느냐고 묻자 “교제했던 여인이 옷을 곱게 차려입고 나를 맞이해주는 꿈을 최근에 꿨다”고 했다. 5000원어치 로또 한 장을 고이 접어 패딩 안주머니에 넣는 그의 얼굴은 새 학용품을 산 어린 학생처럼 신난 표정이었다. 그는 “나이 들어 돈이 쪼들리니 자식조차 연을 끊더라. 로또에 꼭 당첨돼 안정적인 생활을 다시 하고 싶다”고 했다. “내 희망을 이뤄줄 수 있는 건 로또뿐”이라고 말한 그는 “기회만 있으면 꾸준히 로또를 살 생각”이라고 말했다.

로또 명당은 해가 완전히 지고 직장인이 본격적으로 퇴근하는 오후 7시쯤 되자 인산인해를 이뤘다. 로또는 매주 토요일 밤 8시 30분에 당첨자를 발표한다. 시민들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날은 금요일 저녁이다. 금요일 저녁인 이날도 청량리역 로또 명당 앞은 시민들이 두 줄로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차림새는 제각각이지만, ‘로또 당첨’이란 한 가지 희망을 품은 표정에는 묘한 동질감이 비쳤다.

취업준비생 김혜련(27)씨도 그 대열에 서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공인회계사 시험(CPA)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녀는 저번 달부터 금요일마다 로또를 사기 시작했다. 김씨는 “1등 당첨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찾아올 수 있는 행운을 생각하면 너무나 흥분돼 매주 사게 된다”고 했다. 1등에 당첨되면 뭘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김씨는 “신세를 지고 있는 부모님께 당첨금을 드려 조금이라도 효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의 말처럼 로또를 사는 이들 중 1등에 당첨될 거란 확신을 갖고 로또를 사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저 ‘당첨된다면’이란 한가닥 희망을 품고 싶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로또는 이들에게 힘든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마법과 같은 셈이다.

경제 불황은 로또 열풍을 부추기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김대종(55)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고(高)금리, 고(高)물가로 서민들의 경제적 상황이 크게 악화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탈출하려는 ‘생존형 구매’가 많다”고 했다. 김 교수는 “저소득층은 의식주 등 삶을 이어가기 위한 자금 마련을, 중산층은 부동산 및 자녀 교육비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할 방편으로 복권을 사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성인 남녀 10명 중 6명은 복권을 샀다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로또 명당. 로또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심리는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매주 5000원 넘는 돈을 로또를 사는 데 지출한다는 직장인 이지훈(35)씨가 로또를 구매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금리가 올라 부동산 대출금 압박도 덩달아 세져 로또라도 당첨되면 부동산 대출금을 한 번에 갚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심리 때문이다.

로또 구매자가 늘면서 명당으로 입소문 난 판매점 뿐만 아니라 일반 복권 판매점도 매출이 늘었다. 경동시장에서 로또 판매점을 운영하는 김영환(30)씨는 “로또 판매량이 예년보다 20~30% 정도 증가했다”며 “특히 (경동)시장 상인들이 자주 로또를 사러 온다. 치솟는 물가에 장사가 예년만 못하다 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로또를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 복권위원회의 ‘2022년 복권 인식 조사’에 따르면, 복권 구매 이유 중 ‘일확천금을 얻을 기회’라고 답한 비율은 전년 48%대에서 49%로 증가했고, ‘삶의 흥미나 재미를 위해’라고 답한 비중은 74%에서 72%대로 감소했다. 유독 ‘생존형’ 로또 구매가 올해 들어 부각되는 이유는 경제불황과 더불어 심화한 양극화 때문이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하위 10%와 상위 10% 간 소득 격차가 예전엔 5배였는데 지난 5년을 지나며 8배까지 벌어지게 됐다”며 “벌어진 격차로 인한 박탈감을 로또만의 일확천금으로 극복하려는 서민들의 심리가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의 말처럼 저소득층 및 중산층의 로또 구매 비중은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지난해 4인 가구 기준 소득 분위 2분위(189만~316만원)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의 로또 구매 비중은 17.7%로 전년 대비 9%나 증가했다. 4인 가구 전체 소득 중 중간값인 중위소득에 해당하는 가구 소득 4분위(466만~673만원)는 전체 중 39%나 차지하며 로또를 구매하는 계층 중 가장 큰 비중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열풍이 불어닥친 덕분에 지난해 복권 판매액은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기재부 복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복권 판매액은 6조4292억원으로 역대 최초로 연간 판매액 기준 6조원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로또 복권이 5조4468억원으로 전체 복권 상품 중 85%를 차지했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1년 사이 복권 구매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전체 성인인구 중 56.5%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두 명 중 한 명은 복권을 사본 셈이다. 복권 구매가 일상의 흔한 소비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로또 열풍은 어려워진 현실의 씁쓸한 단면에 불과할까? 이은희(65)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로또가 가진 순기능이 있다고 강조했다. 복권 당첨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이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서민 입장에서는 값싸게 희망을 매주 갱신할 수 있는 로또가 매력적인 소비 대상”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경제 한파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금, 대내외적인 경제 상황이 서민들에게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로또만큼은 손쉽게 희열을 제공하는 수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주일간의 행복감만으로 값어치 충분”


▎7개의 숫자로 누군가의 인생이 바뀔 수 있는 로또. 사진은 제1015회 로또 추첨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 사진:MBC 화면 캡처
경동시장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는 상인 황정자(52)씨도 로또를 일상의 에너지로 생각한다고 했다. 황씨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 상인들은 매주 로또를 사며 힘든 경제 상황을 이겨내자고 서로 다독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당첨될 확률이 극히 낮은 건 알지만, 1등 상금을 받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 다른 고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며 “1등에 당첨된다면 절반은 생활비로 쓰고 절반은 기부해 사회 공헌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수도 로또가 주는 정신적인 만족감에 주목한다. 김 교수는 “경제학적 관점으로 보면 로또와 같은 복권을 사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지만, 비물질적 효능감이 극대화될 수 있다”며 “단돈 몇천원으로 일주일 동안 행복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값어치를 다한 것”이라고 말했다.

로또 판매금이 늘어나면 서민 생활 안정에 다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복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복권사업으로 정부가 거둬들인 돈은 6조원에 이른다. 이 중 절반은 당첨금 지급으로 쓰고, 나머지는 취약계층 지원, 서민 주거 안정 등 복지 사업에 사용됐다. 이 교수는 “로또를 통한 복지 재정 마련은 오늘날 우리가 행하기 쉬운 십시일반과 같다”고 말했다. 개개인이 구매한 로또 비용은 얼마 안 되지만, 전체로 보면 특정 계층을 지원할 수 있는 거대한 자금이 된다는 것이다.

로또가 사회 전반의 공익을 증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기자가 앞서 만났던 황정자씨는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로또에서) 계속해서 떨어지면 아깝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가 산 복권이 국가 복지 정책 재원으로 활용되는 만큼 간접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로또를 사고 있다”며 뿌듯해했다. 나아가 “나의 낙첨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 것 아니냐”며 “그것만으로도 이미 로또를 산 값어치는 다 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경제 상황 호전되면 로또 열풍도 식을 것”

비트코인이 성행했던 2017년의 한탕주의가 복권 열풍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은 없을까? 이 교수는 “비트코인 열풍과는 결이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비트코인의 문제는 투자자들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코인에 투자 후 손해를 봐 발생했다”며 “로또는 소액에 불과하고 대개 여유자금으로 구매하는 만큼 영끌족(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하는 사람들)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또 열풍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과 일본 등 자유시장 체제의 선진국에서도 복권의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1회 당첨금이 무려 1조원이 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미국 복권 구매를 대행하는 서비스가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다. 김 교수는 “미국도 최근 시장이 침체 양상을 보이면서 복권 당첨에 기대려는 심리가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 열풍이 장기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로또 열풍은 금리 인상기와 경제 불황이 맞물려 시장 전체의 투자와 고용이 부진한 것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금리가 시장 상황에 맞게 정상화돼야 투자와 소비가 촉진돼 경제의 선순환이 돌고 서민들은 로또보단 다시 근로소득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고 보면 로또 명당 앞에 늘어선 구매 행렬의 길이는 우리가 처한 경제 상황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희망’을 사는 행렬이 사라지는 날, 비로소 서민들의 삶 속에 희망이 깃들지 않을까.

- 이상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shinetosky@naver.com

202303호 (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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