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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부산엑스포 유치 A to Z (2)] 엑스포는 과학기술과 문화 교류의 핵심 

자유와 번영의 정신으로 점철된 세계박람회 역사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1851년 영국에서 시작된 박람회, 이후 프랑스·독일·러시아·일본 근대화에 영향
인상파에 영향 준 ‘자포니즘’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도 엑스포가 낳은 선물


▎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 출품된 영국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의 작품.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이라는 엑스포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 사진:디뮤지엄
세계박람회는 지금부터 172년 전인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됐다. 지금까지 세계박람회는 인간과 관련한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등록박람회(Registered Expositions)’와 제한된 주제만 다루는 ‘인정박람회(Recognized Expositions·전문박람회)’를 포함해 모두 54차례 열렸다. 규모가 큰 등록박람회와 비교적 작은 인정박람회를 포함해 한 번이라도 세계박람회를 열어본 국가는 17개국(1919년 해체돼 지금은 여러 나라로 분리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포함)에 불과하다.

국가별로 보면 미국(등록 7-인정 4), 프랑스(6-1), 이탈리아(2-5), 벨기에(등록 6), 일본(2-2), 스페인(3-1), 영국(등록 2), 호주(1-1) 등 8개국이 등록박람회와 인정박람회를 모두 개최했다. 캐나다와 독일·중국·아랍에미리트(UAE)·아이티,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등록박람회만 한 차례 열었다. 등록박람회 개최국은 14개국이다. 포르투갈·카자흐스탄은 인정박람회만 각각 한 차례씩 개최했다.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의 기원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에 지어진 수정궁. / 사진:PetrusBarbygere
한국은 1993년 대전박람회와 2012년 여수박람회를 포함해 두 차례에 걸쳐 인정박람회만 치렀다. 이미 여름과 겨울 올림픽과 패럴림픽, 그리고 일본과 공동으로 월드컵까지 개최한 한국으로선 등록박람회를 열어 글로벌 사회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

세계박람회 중에서 등록박람회가 ‘글로벌 사회에 대한 기여’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 역사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등록박람회는 과학기술과 문화, 그리고 인적 교류의 장으로서 글로벌 교류와 협력의 장이었다. 개최국이 확보한 과학기술과 문화 정보, 노하우를 다른 나라와 공유하는 것은 물론 여러 나라와 접촉하면서 서로 이해를 높이고 협력의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등록박람회는 개최국이 개도국을 위해 국가관을 지어주면서 공생을 위한 글로벌 협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초창기 세계박람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엑스포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최초의 세계박람회로 1851년 영국 런던 만국 대박람회(The Great Exhibition)가 꼽힌다. 영국이 자국 수도의 심장부에 글로벌 교류의 장을 연 것이 최초의 세계박람회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유럽 변방의 척박한 섬나라에서 산업혁명으로 제조업 국력을 키우고, 무역국가로 세계 곳곳에 진출해 ‘해가 지지 않는 세계제국’을 건설한 국가가 영국이기 때문이다.

이 행사는 런던 중심부 하이드파크의 수정궁(The Crystal Palace)에서 ‘모든 나라의 산업(Industry of all Nations)’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산업을 주제로 삼은 것은 영국을 세계 패권국가로 만든 원동력인 산업혁명을 앞세우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런던 한복판의 드넓은 녹지인 ‘하이드파크’에 강철과 판유리로 건설한 최대 길이 564m, 최대 높이 39m의 모듈식 건축물인 수정궁 자체가 산업혁명의 시대를 상징한다. 공모에서 당선된 조지프 팩스턴이 설계한 이 건물은 축구장 18개에 해당하는 넓이로, 부지에 원래 있던 거대한 나무들이 건물 안에 거뜬하게 들어갔다.

철로 된 기둥과 구조물이 건물을 지탱하고 벽과 천장은 1만8000개의 판유리로 덮어 건물 내부에 조명이 필요 없었다. 아이디어와 구조, 그리고 재료가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다. 과학기술이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는 측면과 함께 영국의 앞서가는 기술력과 국력, 그리고 혁신능력을 보여줄 목적으로 선택된 설계로 볼 수 있다. 1951년 만국 대박람회에는 영국과 식민지 44개 국가에서 참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해 5월 1일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돼 10월 15일까지 5개월 보름 동안 열렸다. 603만 9722명이 수정궁의 행사장을 찾았다.

수정궁에는 영국의 명사들도 대거 몰려들었다. 전기 연구와 생활화의 선구자인 마이클 페러데이가 전시 기획을 맡았다. <종의 기원>을 써서 진화론을 제창한 찰스 다윈, <제인 에어>를 쓴 여성 작가 샬럿 브론테, 어린이 권리 운동가와 사회 비평가로 유명한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의 작가 찰스 디킨스 등 유명 인사들이 만국박람회를 관람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가 루이스 캐럴(필명)과 [이노크 아든]을 쓴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도 수정궁을 찾았다. 독일 출신으로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대영도서관에서 [자본론]을 썼던 카를 마르크스도 행사장을 방문했다.

178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설립돼 1792년 런던으로 옮긴 세계 최초의 청량음료 업체 슈웹스가 이 행사의 공식 스폰서를 맡았다. 수정궁을 찾은 영국인과 영국에 사는 외국인의 면면을 보면, 영국이 당시 산업은 물론 과학기술과 문화예술·학술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당시는 시대적으로 영국이 인도 등을 식민지로 지배하던 제국주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열린 만국박람회라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가장 큰 인기와 화제를 모은 전시물은 산업 제품이 아니고 바로 제국주의와 관련된 아이템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소설 '해저 2만리'에 영감 준 파리 박람회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밝힌 에펠탑.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코이누르(‘빛의 산’이라는 뜻)로 불리는 인도산 다이아몬드가 주인공이었다. 14세기 초 인도 광산에서 발견돼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 인도 시크 왕국 등의 소유였다가 1849년 동인도회사가 차지해 영국으로 보낸 이래 영국 왕실 소유물이 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의 하나로 알려졌다. 1947년 영국령 인도가 인도·파키스탄으로 분할 독립한 이래 인도·파키스탄은 물론 이란과 아프가니스탄까지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다며 이 다이아몬드의 반환을 요청하고 있다. 심지어 급진 무장세력인 탈레반도 반환 요청에 나섰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를 합법적으로 획득했다며 반환 요구를 일축해왔다. 당시 박람회에선 다리아이누르(빛의 바다)로 불리는 연한 분홍색의 다이아몬드도 전시돼 인기를 끌었다. 인도산으로 이란 중앙은행 소유다.

당시 1만3000점의 물품이 전시됐는데, 행사 주제인 산업과 관련한 제품은 물론, 당시 처음으로 등장해 시대를 선도하던 혁신적인 발명품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세계 최초의 자동 투표 계산기, 동전을 넣고 들어가는 세계 최초의 유료 화장실 등 새로운 문명시대를 상징하는 신규 발명품도 자리를 잡았다. 영국 발명가 프레데릭 베이크웰은 알렉산더 베인이 처음 소개한 초기 형태의 팩시밀리를 개량한 ‘이미지 전보’를 선보였다. 회전 실린더와 금속 포장지를 이용해 글자와 그림을 옮기는 기계다. 미국은 콜트사의 권총 등 총기를 전시했다.

프랑스에선 조제프 샤를이 복잡한 문양을 쉽게 새기면서 천을 짜도록 고안한 자카르 직조기를 내놨다. 프랑스인 루이 다게르가 1839년에 소개해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된 최초의 사진술인 다게레오타이프로 미국인 작가가 찍은 사진도 전시됐다. 과학기술이 문화예술과 결합하고 이를 어떻게 선도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855년 파리 세계박람회는 미술작품 전시회도 함께 열어 과학·기술·산업과 문화가 인류 삶에서 함께 중요하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이 박람회에서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보르도 포도주 전시회도 함께 열렸다.

그럼에도 초창기 세계박람회는 아무래도 산업혁명으로 인한 인류 문명의 진보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1862년 열린 런던 세계박람회는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에 따른 변혁의 속도를 느끼게 해준 행사였다. 특히 정보통신시대의 여명을 여는 행사로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전류나 전파를 통해 약속된 기호로 정보를 송수신하는 전신 시스템이 전시됐다. 물속에서 전기 통신 신호를 전달하기 위하여 바다 아래에 놓는 해저 케이블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영국 수학자 찰스 배비지가 설계한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의 일부 부분이 이 박람회에 전시됐다는 사실이다. 해석기관은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계식 범용 계산기다. 컴퓨터 초기 버전의 하나로, 컴퓨터 진보에 큰 족적을 남긴 발명품이다. 배비지는 1837년 해석기관을 처음 설계한 데 이어 187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설계를 업그레이드했지만 자금 등의 문제로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의 아이디어에 필적할 수준의 범용 계산기는 1940년대가 되어서야 실용화됐다. 시대를 앞서간 전시물이었다.

1862년 박람회에선 각종 정밀 기계가 등장한 것은 물론, 최초의 합성 고분자로 초기 플라스틱에 해당하는 파케신도 소개됐다. 플라스틱 시대도 세계박람회에서 개막한 셈이다. 초기 냉장고도 전시됐다. 관람객들은 냉장고에서 얼음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감탄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눈의 시차를 이용해 사진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스테레오스코피도 등장해 관람객들의 감탄을 불렀다. 인도에서 촬영한 사진을 전시하는 코너도 마련됐다.

방적기와 직조기를 갖추고 털실과 의류 등 면섬유 제품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제면소도 전시됐다. 산업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대량생산을 위한 공장 시스템이다. 철도회사와 기차 제작업체는 증기기관차와 승객용 객차를 세계박람회장에 전시했다. 증기기관을 개량해 세계의 산업혁명에 기여한 제임스 와트와 석탄운반용 증기기관차 로커모션 호를 개발한 조지 스티븐슨의 나라 영국다운 전시였다.

러시아와 오스만튀르크도 찾아와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 사진:GNC미디어
신문물은 다른 나라나 지역의 과학기술과 경제·산업 부문에 자극을 주는 것은 물론, 문화 분야에 영감을 안기기도 한다. 파리 세계박람회는 당시로는 신문물인 전기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곳을 찾았던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은 전기의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해저 2만리]는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경험한 전기의 위력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대를 앞섰던 그의 예술적·과학적 상상은 나중에 현실이 됐다.

1867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는 전시 행사를 외교의 장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프랑스 제2제정의 군주인 나폴레옹 3세는 파리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뒤 세계박람회를 열면서 여러 외국 군주를 초청했다. 번성하는 프랑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포석이었다.

러시아 제국에선 1861년 농노해방령을 공포하는 등 한창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던 알렉산드르 2세 차르가 초청됐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9세기 산업화·도시화의 현장을 목격한 알렉산드르 2세는 더욱 강하게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20년 뒤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암살됐다.

주목할 나라는 독일의 강국 프로이센이었다. 이 나라에선 빌헬름 1세 국왕을 대신해 그의 동생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이 참석했다. 프로이센은 한 해 전인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뒤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북독일 국가들을 연합해 북독일연방을 세웠으며, 빌헬름 1세가 의장을 맡고 있었다. 독일은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부국강병을 꾀하고 있었으며, 1867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독일 크루프사는 대형 대포를 선보였다.

그로부터 3년 뒤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에 반대하는 프랑스를 공격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벌였으며, 나폴레옹 3세를 프랑스 동부 스당에서 포로로 잡고 승리한 뒤 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을 선포했다. 빌헬름 2세는 신생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됐으며, 패전한 나폴레옹 3세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폐위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선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참석했으며, 주프랑스 대사인 리하르트 폰 메테르니히가 황제를 수행했다. 메테르니히 대사는 나폴레옹 1세 황제가 무너진 뒤 프랑스를 제치고 빈 체제를 형성해 유럽의 국제질서를 새롭게 잡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교관 클레멘스 메테르니히의 아들이다. 이들의 파리 방문은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통해 유럽 국가의 국력 순위가 다시 바뀌고 있던 새로운 시대를 상징한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술탄 압둘아지즈도 참석했다. 압둘아지즈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선 처음으로 파리·런던·빈 등 유럽 대국의 수도를 직접 여행하며 서구의 물질적 진보를 직접 목격하고 철도 부설 등 근대화를 추진했다.

일본의 개국에 영향 끼친 세계박람회


▎ 사진:AP연합뉴스
종주국인 오스만튀르크로부터 준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이집트의 근대화를 추진하던 총독 이스마일 파샤도 참가했다. 이스마일 파샤는 서구식 산업화·도시화와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에선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를 대리해 배다른 동생이자 미토(水戸)번의 번주인 14세의 도쿠가와 아키다케(徳川昭武)가 28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참석한 뒤 유럽을 순방하며 서구 문물과 시대 변화를 살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1641년부터 네덜란드 상인들을 대상으로 규슈의 나가사키(長崎)에 있는 좁은 인공섬인 데지마에서만 서양과 제한적으로 무역을 해왔다. 하지만 1854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의 강요로 미·일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처음으로 개항했다. 그 뒤 1855년 러·일 수호조약, 1856년 일·화(네덜란드) 화친조약 등을 통해 서방에 문을 열었다.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대양을 건너오는 서양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했던 도쿠가와 막부는 1860년에 미국에 파견 사절단을, 1862년엔 유럽에 제1차 파견 사절단을, 1863년엔 제2차 사절단을 각각 보냈다. 아키다케의 50여 일에 걸친 파리 박람회 방문과 유럽 순방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부국강병을 실현한 서구를 방문해 과학기술·군사·교육·정치·사회·문화 등 전 부문에서 일본 근대화 전략 수립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현장을 확인하며 교류를 촉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키다케는 파리 세계박람회 방문 때는 물론 유럽 순방 과정에서 전통 복장을 고수했다. 그해 11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덴노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선언하자 귀국했으며, 1871년 봉건제를 폐지하는 폐번치현으로 영지를 잃고 번주에서 물러났다. 이는 1868년 막부 체제를 무너뜨린 메이지(明治) 유신 뒤에도 이어졌다. 일본은 1871~73년 정부 요인과 유학생 등 107명으로 이뤄진 이와쿠니(岩倉)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보내 12개국을 둘러보게 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일본 최초의 헌법을 기초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여기에 포함됐다. 1871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독일제국헌법이 제정됐는데, 이토는 이를 연구해 근대 입헌주의에 기초한 일본제국헌법을 마련했다. 일본 최초의 헌법은 1889년 2월 11일 공포돼 1890년 11월 29일 시행에 들어갔다.

이와 별개로 일본은 1867년 파리 세계박람회 참가를 계기로 유럽에서 새롭게 주목 받는 국가로 떠올랐다. 특히 유럽에 새로운 문화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규슈의 사쓰마(薩摩) 번과 사가(佐賀) 번은 이 세계박람회에 처음으로 일본관을 세우고 물품을 전시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일본에서 서구로 수출된 도자기 포장지로 재활용됐던 일본의 채색 목판화에 매료됐다. 밝고 넉넉한 공간, 얇고 단순한 색상, 풍경 속에 작게 묘사된 인물, 그림자 제거, 선을 강조하는 기법, 화초 소재의 선호 등 일본 채색 목판화의 특징은 반 고흐가 프로방스 아를 강변의 밤 풍경을 그린 ‘별이 빛나는 밤’과 ‘예술가의 방’, 그리고 ‘해바라기’와 ‘수선화’ 등에 잘 나타난다.

‘자포니즘’으로 불리는 19세기 말 유럽의 이런 미술 사조는 1867년 파리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더욱 확산했다. 세계박람회는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거대한 장이 됐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는 세계화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한 계기가 세계박람회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화의 물결은 세계박람회로부터


▎2020년 두바이 엑스포 한국관. 한국의 역동적 발전상을 엿볼 수 있다. / 사진:KOTRA
파리 박람회에 자극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873년 수도 빈에서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일본은 51명의 관리·통역과 거주 외국인 6명을 빈에 파견해 일본 각 지역의 특산물을 홍보하고 수출을 시도하는 한편, 24명의 기술자 등을 보내 세계박람회에서 신문물을 보고 이를 제작할 능력을 확보하도록 노력했다. 현지에서 수집한 물품을 일본에 들고 와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어 세계의 역동적인 변화를 일본 현지에서도 느끼고 자극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방문단은 16장으로 이뤄진 96권의 세계박람회 참가 보고서를 이듬해 발간했다. 보고서는 수도인 도쿄에 서구 문물과 상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나 거리를 조성할 것을 건의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1877년 도쿄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전국산업전시회를 열었다.

그다음 세계박람회는 대서양을 건넜다.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876년 100주 년 국제 전시회(Centennial International Exhibition of 1876)’라는 이름으로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미국에서 처음인 것은 물론, 유럽 밖에서 최초로 열리는 세계박람회였다.

필라델피아는 자유의 종과 독립 홀 등이 있는 미국 독립전쟁의 시발지인 데다 독립 이후 1800년까지 미국의 수도였다는 인연으로 1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 개최지가 됐다. 이 행사에는 35개국이 참가하고 1000만 명이 관람하는 등 대성황을 이뤘다. 남북전쟁(1861~1865)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미국에 필라델피아 세계박람회는 전 세계와 만나면서 부흥의 기틀을 다질 기회였다. 드넓은 영토와 자원, 유럽 등에서 몰려오는 이민자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회복하던 차였다.

혁신의 현장, 필라델피아 박람회

필라델피아 세계박람회는 여러모로 혁신적이었다. 국가관과 함께 ‘여성관’이 최초로 세워졌다. 여성 권리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증기기관차를 이용한 100주년 기념 모노레일이 설치됐으며, ‘레밍턴 1호’로 불린 ‘숄 앤드 기든’ 타자기와 하인즈 케첩을 포함한 새로운 제품이 등장했다. 대량생산된 재봉틀과 스토브, 랜턴, 마차, 농기구, 총기가 진열돼 새로운 생산 시대의 모습을 보여줬다. 풍부한 자원과 인력, 그리고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춘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로 부상하는 계기를 제공한 세계박람회라고 할 수 있겠다. 유럽에선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의 군수업체 크루프가 가져온 대형 대포가 빠지지 않았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그해 내놓은 ‘최초의 안정적이고 실용적인 전화기’도 자리를 잡았다. 이탈리아 발명가에게 밀려 세계 최초의 전화기 기록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실용성과 상품성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전시장 주변에는 100주년 기념 수목원(Centennial Arboretum)이 조성돼 북미 지역과 유럽·아시아에서 옮겨온 다양한 수목이 식재됐다. 지금도 무료로 시민들에게 개방돼 휴식과 소중한 기억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모금해 제작한 뒤 미국으로 옮겨 조립, 1882년 10월 뉴욕 리버티 섬(엘리 섬)에 설치된 ‘자유의 여신상’의 손 부분이 미국에서 처음 대중과 만난 곳이 바로 필라델피아 100주년 세계박람회였다. 프랑스 조각가 페르데리크 오귀스트 바르돌디가 설계한 자유의 여신상에서 횃불을 쥐고 있는 오른손 부분이 먼저 미국에 도착해 필라델피아 세계박람회에 전시된 뒤 1882년 최종 조립될 때까지 뉴욕에 머물렀다.

프랑스에선 1878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자유의 여신상 머리 부분을 전시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다. 그렇게 완성된 자유의 여신상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설치됐다. 기단 부분의 구조물은 에펠탑을 세운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세계박람회라는 자유롭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누구나 서로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설치의 계기를 만든 셈이다. 대서양 양안에 있는 자유를 희망하는 깨인 시민들의 의지도 당연히 한몫했다.

그런 점에서 세계박람회는 전 세계 사람에게 자유와 번영의 기회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작동할 수 있는 소중한 글로벌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미래를 함께 생각하고, 지혜와 힘을 나누는 2030년 세계박람회가 해방 이후 숱한 역경을 딛고 자유와 번영을 쟁취한 한국에서 열려야 하는 이유다.

-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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