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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5년 기념 명사 초대석] 안중근 순국 113주기, '하얼빈' 작가 김훈을 만났다 

“한·일 관계 재정립, 국내 갈등 요인들 해소가 먼저다”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안중근 순국 후 110여년 지났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질서 더 강고해져”
“평화는 무력이나 외교적 묘수 아닌 인간 진화의 긴 여정 속에서 달성 되는 것”


▎소설가 김훈.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안중근과 같은 행동성과 영웅성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젊은 세대가 안중근의 고뇌와 순수성을 깊이 헤아려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사진:전민규
“미래세대와 미래의 평화를 위해서 한·일 관계는 재정립해야 한다는 비전에 나는 찬성한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국내의 갈등요인들을 우선 해소해야 하고, 집권세력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과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1879~1910) 추모 열기가 해를 넘겨서도 지속되고 있다. 서울 남산 탐방객들 가운데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뮤지컬 영화 〈영웅〉이 지난해 연말 수백만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 데 이어 영화 〈하얼빈〉도 올해 하반기 개봉한다.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액션 영화로, 영화 〈내부자들〉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배우 현빈이 안중근을 연기한다. 최근에는 김월배 중국 하얼빈이공대 교수가 〈유해 사료, 안중근을 찾아서〉를 발간해 안 의사 유해 발굴의 절실함을 다시 환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안중근의 죽음으로부터 113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국론은 분열돼 있고, 안중근이 활약했던 그 나이 때 청춘들은 희망을 찾지 못한 채 고단하다.

김훈(75) 작가를 만나고자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소설 〈하얼빈〉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안중근 열풍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책은 올해 3월까지 32만 부가 팔렸다. 김훈은 〈하얼빈〉에 쓴 작가의 말에서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고 적었다. 김훈이라면 뭔가 이 시대 고단한 청춘들에게 줄 희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2월과 3월 두 차례, 지인과 함께 김훈을 만났다. 김훈은 인터뷰나 기고는 완곡히 거절했다. 다가올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이었다. 분열되고 힘들어진 지금의 세태 속에서 안중근의 죽음이 후세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김훈에 재차 청했다. 김훈은 묻고 싶은 것을 보내주면 답하겠노라 말했다. 그의 집에 팩스로 몇 개의 질문을 보냈다. 김훈은 예의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정성 어린 답변을 보내왔다.

"약육강식의 현실에 육탄으로 저항한 사람"


▎김훈은 예의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써서 팩스로 답변을 보내왔다. / 사진:김지우
3월 26일 우리는 안중근 순국 113주기를 맞이합니다. 안중근의 죽음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안중근의 옥중 유묵 중에 [弱肉强食 風塵時代(약육강식 풍진시대)]라는 글씨가 있다. 이 여덟 글자는 당대 현실에 대한 안중근의 인식과 분노를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살점을 뜯어먹고, 침탈하고, 정복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당대 현실에 육탄으로 저항했다. 안중근의 순국 후 110여 년이 지났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는 더욱 강고하게 자리 잡았다. 약육강식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안중근의 순국은 약육강식이라는 인간의 현실을 깊이 성찰하게 해준다. 이 문제는 여전히 전(全) 지구적이고 전(全) 인류적이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항소를 포기하고 감방으로 돌아와 먹을 갈아서 옥리에게 부탁받은 글씨를 쓴다. 김훈이 말한 弱肉强食 風塵時代 여덟글자다. 그러고 보면 냉혹한 국제질서나 핍진해진 국내 경제 상황이 113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훈은 그러한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였다.

안중근 의사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20~30대 젊은 세대들은 삶의 조건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젊은 안중근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안중근과 같은 행동성과 영웅성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젊은 세대가 안중근의 고뇌와 순수성을 깊이 헤아려 주기를 바란다. 세계의 악을 미워하고, 인간의 선함을 신뢰하고, 시대와 이웃에 대한 관심을 넓게 하고, 사고와 행동의 순수성을 간직하는 마음이 안중근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안중근은 젊은 시절의 김훈에게 매력적이고 드라마틱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지금의 고단한 청춘들에게 목숨을 던져 공동체의 가치를 실천했던 안중근의 고뇌와 순수성을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3.1절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주도한 일제 강제징용 해법을 두고 우리 사회는 갈등이 커져가고 있다. 당면한 현실에 대한 김훈의 발언도 듣고 싶었다.

여전히 한·일 관계는 녹록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 맺기를 두고 세대 간 생각의 차이가 큽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이 갈등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일본 정부가 그동안 마지못해 표명해온 ‘사과와 반성’을 뒷받침해 줄만한 행동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이 의심은 정당하다. 우리는 과거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만 과거를 무 자르듯이 잘라낼 수도 없다. 우리는 과거를 정리해서 과거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한·일 관계를 둘러싼 갈등은 세대 간 갈등이라기보다는 당파성이나 이념 갈등의 측면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미래세대와 미래의 평화를 위해서 한·일 관계는 재정립해야 한다는 비전에 나는 찬성한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국내의 갈등 요인들을 우선 해소해야 하고, 집권세력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과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평화는 인간 본성들 중에서 고귀한 부분"


▎김훈의 소설 [하얼빈]. 올해 3월까지 32만 부가 팔렸다. / 사진:문학동네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재판정에서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진술한다. [하얼빈]에 나오는 대목을 보자.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하여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토는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 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안중근이 꿈꾼 동양평화론은 현실에서 가능한 얘기일까? 그 정신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안중근 의사가 죽음 직전까지 집필했던 ‘동양평화론’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우리 후세대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평화는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들 중에서 고귀한 부분이다. 그러나 국가 간의 관계 속에서, 국가들은 늘 평화를 외치면서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개인의 평화와 국가 간 평화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학교에서도 국민의 도리, 민족의 영광만을 가르치지 말고, 세계시민으로서의 가치와 삶의 태도를 교육했으면 좋겠다. 평화는 무력이나 외교적 묘수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고, 인간 진화의 긴 여정 속에서 달성되는 것이지 싶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해 8월 29일 우리는 한일 합방으로 나라를 잃었다. 하지만 안중근의 거사는 당시 나라 잃은 백성들에겐 쾌거였고, 두고두고 가슴에 담아 키웠던 등불이자 희망이었다. [하얼빈]의 마지막 대목을 봐도 그렇다.

“3월 27일은 부활절이었다. 빌렘은 ‘나의 시체를 하얼빈에 묻으라’는 안중근의 유언을 신자들에게 전했다. 안중근의 시체는 하얼빈으로 가지 못하고 여순감옥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전했다. 빌렘은 신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신앙의 선조들이 기원했던 평안은, 세상의 진정한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평화는 김훈의 답변처럼 ‘인간 진화의 긴 여정 속에서 달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na.kwonil@joongang.co.kr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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