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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 (26) 통영 사량도에서 

 

남해바다 사량도 지리산에서 행복에 풍덩 빠졌다

왠지 말만 들어도 마음이 ‘바운스~ 바운스~’ 두근두근 설렜다. 남해바다, 통영, 사량도 그 이름들을 말하는 순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낭만과 쾌감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김연아의 고품격 트리플 악셀을 감상하는 느낌이랄까? 마치 초등학생 시절 소풍날 같았다. 그러한 설렘을 안고 리무진 버스는 11시 30분 한밤중 서울 사당역을 출발해 남해바다를 향해 질주했다. 잠 못 이루는 별님 달님과 함께 쉼 없이 내달린 적토마는 새벽 4시 삼천포 부둣가 어느 선창가에 멈춰섰다. 짭짜름한 바다 내음, 항구 특유의 비릿함, 낭만적인 등대 불이 앙상블을 이루며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예약해 둔 식당에서 바다 향기 그윽한 새벽밥을 먹고 부지런한 아지매들의 정겨운 사투리를 들으며 다시 버스에 올랐다. 산사나이들을 태운 애마는 그로부터 40여분을 더 달려서야 용암포 항구에서 사량도 가는 배에 승선할 수 있었다.


“와우!” 버스가 배에 오르자마자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눈앞의 바다를 바라봤다. 오늘도 어김없이 붉은 아기 태양이 저 깊은 바다 어머니 자궁으로부터 탯줄을 끊은 후 우주만물에 희망과 생명을 불어넣으며 잰걸음으로 승천하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일출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태양과 바다가 작별의 키스를 하는 듯 붉은 태양의 혈흔들이 바닷물에 반짝반짝 산란돼 눈부시게 빛났다.... 그렇게 잠깐 황홀경에 빠지고 30여분이 더 흘러서야 배는 사량도 내지항에 도착했다. 아침 8시, 사량도 항구는 옛날 옛적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찬물 한 그릇만 딱 떠놓고 사랑을 맹세하는 듯, 아주 소박하고 한적했다. 그 흔한 강아지 한 마리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적한 섬 사량도에 적토마가 내려섰다. 마지막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가다듬고 5분여를 더 달려 마침내 사량도 지리산 서쪽 입구에 도착했다.


보통 섬 투어는 야트막한 고개를 한두 개 넘고, 아름다운 바다를 감상하면서 해안도로를 걷는다. 그런데 사량도는 그렇게 만만하게 다닐 섬이 아니었다. 동서로 산이 길게 뻗어 있어서 섬 서쪽 끄트머리에서 시작해 400여 미터 고지의 산을 가파르게 오른 후에야 다도해 경관을 볼 수 있었다. 경사길을 200여 미터 정도 오르자 어머니가 귀여운 아이를 사랑스럽게 안은 듯, 푸른 남해바다가 작은 섬들을 품고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해 도파민이 춤을 추고 엔도르핀이 노래하자 행복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사량도라는 섬. 오랜 세월 동안 풍우에 깎인 바위산이라 위용이 당당하고 능선은 암릉(巖陵, 가파른 바위가 많이 노출된 날카로운 능선)과 육산으로 형성돼있어 급한 바위 벼랑을 지날 때는 오금이 저리기도 했다. 깎아지른 바위 벼랑 사이로 해풍에 시달린 노송이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가 하면 바위 능선을 싸고 있는 숲은 기암괴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한려수도의 그 곱고 맑은 물길에 다도해의 섬 그림자가 환상처럼 떠올랐다. 웅크린 사량도의 바위 묏부리와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솟구친 산의 능선은 말없이 세속의 허망함을 일깨워 주는 듯했다. 아름답고 멋진 별세계 무릉도원이 거기에 있었다.

그 무릉도원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미니어처로 축소해놓은 듯 하나같이 삐쭉뾰쭉 섹시하고, 신비롭고, 멋스러웠다. 이런 별천지 같은 광경은 수많은 세월동안 천둥과 먹구름, 사납고 차가운 풍랑과 비바람이 핥고 지나간 영광의 상처였다. 지금 내 눈에는 자연이라는 훌륭한 장인이 빚어낸 예술작품으로 보이지만, 산과 바위 입장에서는 모진 비바람의 산고와 고통의 상처를 겪은 결과물일 터였다. 순간, 그 영광스런 상처들이 멋진 트리플 악셀을 연기하기 위해 수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눈물을 쏟았던 김연아 선수의 아픔과 고뇌의 산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삶이란 게 이처럼 내면의 아픈 상처와 진실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보고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불현듯 얼마 전에 접했던 현인들의 주옥같은 명언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명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에 따르면, 세상 모든 만물, 우주의 대부분의 것은 살아있지 않고 죽어 있는 상태라고 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이 우주에서 살아있는 것들은 0.0000001%도 안 된단다. 우주에서 생명이 있는 곳은 우리가 아는 한 이 지구가 유일하고, 지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중 아주 소수만이 살아 있으며, 그중에 아주 작은 일부가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맞다면 우리가 지금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롭고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란 말인가! 우리 지구와 같은 우주의 별들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놀랍기 그지없다. 핵이 융합하고 분열하는 과정에서 수소 분자와 먼지들이 화학작용을 통해 어떤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는데, 그것들을 우주의 기본물질(수소. 산소. 철, 아연 등등)이라고 한다. 그 물질들이 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이며 물리학적인 우주의 어떤 법칙들에 따라 다시 결합하고 흩어지면서 사람, 나무, 사슴, 돼지, 꽃, 바위, 구름, 물, 바위, 공기, 먼지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일러 삼라만상이라 한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그것들이 아주 우연찮게 모여서 잠깐 숨 쉬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네 삶이고, 다시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원래의 물질 분자, 즉 원자로 돌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현상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기적 같은 삶이 어찌 큰 기쁨이요 행복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렇듯 물리학은 경이로운 우리의 삶 그 자체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함을 말해준다.


혜안이 넓으신 법륜스님의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법륜스님은 우리 인간이란 그렇게 잠깐 왔다 사라지는 법인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며 집착하고, 욕심 부리고 달성하지 못할 목표를 잡아 스스로 무능하고 비참한 불행을 잉태하느냐고 꾸짖으셨다. 우리 인간은 이 아름다운 우주와 자연에서 풀 한 포기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건강하고 장수하기 위해서라도 우주의 법칙에 따라 순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어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긍정의 법칙을 스스로 깨닫고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도 하셨다. 고통과 어려움이 와도 피하지 말고 나를 강하게 만들고,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한 담금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법륜 스님은 이왕 사는 삶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훌륭한 의사이자 교수인 전홍준 박사님의 의학적, 생물학적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과거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환경이나 유전자에 의해서 내 기질과 건강 등이 대부분 결정되고, 재수나 운에 의해서 병에 걸리고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학기술, 특히 후성유전학이 발달한 요즘에는 그것들의 진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 몸은 수천억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는데, 그 세포 속에는 23개의 염색체가 있고, 2만3000여개의 유전물질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 유전자는 인간의 성질, 기분, 성향, 질병, 장수 여부를 관장하고 좌우한다. 암과 질병은 그 중 특정한 유전자가 이상 변이가 생긴 것으로, 그것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NK세포, T세포 등이 시들하거나 꺼져 있을 때 나타난다. 대부분 나쁜 환경에 살거나 잘못된 생활 습관 유지 등이 원인이라고 한다. 전홍준 박사에 따르면, 우리 몸은 몇백만 년 동안 과일, 채소, 통곡물을 먹고 거의 매일 흙길을 걷고 뛰는 수렵과 채집 생활에 최적화된 유전자가 형성돼 있단다. 하지만 산업혁명시대에 들어와 가공식품을 많이 먹고, 잘 걷지도 않고, 오염된 공기를 흡입하고 온갖 스트레스로 걱정 근심에 싸여 사는데, 어찌 병이 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보다 훨씬 다양한 병이 생겨났고 환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가고 있는 NK세포, T세포 등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선한 야채를 먹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등산 등 운동을 많이 하고 스트레스를 줄여 행복한 호르몬 즉, 엔도르핀과 세로토닌, 도파민, 다이돌핀, 옥시토신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항상 긍정적으로 웃으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들이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 세 분의 말씀을 종합하면, 우리 인생이란 게 그렇게 허망하고 별것 없으니 자연 속에서 즐겁게 긍정적으로,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고 장수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날 나는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량도를 마음껏 즐겼다.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산’이란 뜻으로 지이망산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통영 지리산으로 불리는 서쪽 돈지리 쪽의 제일 높은 봉우리(해발 398m)를 올라 파란 다도해를 마음껏 감상했다. 이후 가마봉, 향봉, 옥녀봉 흔들다리를 구름에 달 가듯 흘러갔다. 6~7km를 능선을 타고 동쪽 끝으로 내려오는 환상의 등산 코스였다. 사량도는 적당히 등산하는 맛과 이국적인 풍광으로 관광의 멋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산을 내려와 마을 모정에 둘러앉아 회를 안주 삼아 일행들과 막걸리 한 잔씩 나누었다. 누군가 가져온 진달래 꽃잎을 잔마다 띄워 마시니 흥취가 더 돋았다. 자연과 함께한 이 순간, 세상 시름 다 날아가는 듯 즐거웠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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