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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포엠] 너무 환한 오후 3시, 담쟁이 

 

조정인

▎담쟁이 넝쿨과 장미. / 사진:박종근 비주얼실장
어디선가 연인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연인들은
일회용에 익숙하고

빗방울이 불어나고 습지가 확장되고 양서류가 번식하는
계절, 우리는 종이컵 속 얼음을 흔들며 길을 걸었지

그때 우리 앞에 펼쳐지던, 벽면을 타고 오르는
초록방울뱀의 위장술을 너는 보았니?

그날 너와 나 최대 토템은 구름, 구름은 장미를 던져주고
새로운 심장을 던져주었지

꼬깃꼬깃 접어둔 기억의 낱장들이 날개를 펴고 몰려오는 거리
기억의 습격을 받으며 혼자 걷는, 너무 환한 오후 3시
어제의 방울뱀들이 요령을 흔들며 담벼락을 오르네
투명한 얼룩 한 점이 목젖 아래 망설이고

노을이 깔리는 방식으로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방식으로
머물던 너는, 새의 방식으로 빈 하늘을 두고 갔지

어떤 풍경은 붉은 목구멍을 열어 기어이 네 이름을 부른다

※ 조정인 -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사과 얼마예요], [장미의 내용], 동시집 [웨하스를 먹는 시간], [새가 되고 싶은 양파] 등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문학동네동시문학대상, 제1회 구지가문학상 수상.

202306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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