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최남단 볕 좋은 악양(岳陽) 땅 언덕배기에 집 짓고 정착밭 일구고 풀 뽑으며 기도하는 ‘공지영식 수도처’… 틈틈이 집필
▎공지영 작가가 집 뒷마당 벤치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의 지인은 공 작가가 칩거하며 환갑을 넘기더니 한결 푸근해졌다고 했다. |
|
지난 3월과 4월, 서울 상봉동성당과 명동성당 코스트홀에서 공지영(61)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공 작가가 강연장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과 정원을 직접 찍은 사진을 청중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저희 집이에요. 저 가운데 보이는 평야는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평사리 들판입니다. 제가 땅이 한 500평 정도 되는데, 완전히 맨땅에서 3년 동안 제 손으로 다 가꾼 정원이에요. 글 안 쓰고 3년 동안 저 짓을 했습니다(웃음). 저걸 보고 좋은 곳에 산다며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하동에 놀러 가면 한 번쯤 들러도 돼요?’ 그러면 제가 ‘안 돼요’라고 말씀드려요. 대문을 굳게 닫고 ‘칩거’하며 살고 있어요. 엄청 행복합니다. 사람을 안 만나니까…”그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안 만나겠다는 사람을 설득해 만나는 것은 기자의 숙명 아니던가! 공 작가의 오랜 지인으로 지리산 건너편 산청에 사는 배봉한 전 [경향잡지] 편집장에게 청을 넣었다. 그 역시 ‘공 작가가 하동에 칩거하며 한결 푸근해졌다’며 만남을 권했다. 몇 차례 문자가 오간 뒤 5월의 어느 금요일, 광주에 사는 사진가와 함께 평사리 집 대문 앞에 섰다.“와우~” 앞마당에 막 들어섰을 때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군수님도 와 보고는 하동 최고의 뷰(View)’라고 했단다. 가슴이 탁 트였다. 어머니 같은 지리산의 끝자락, 넓은 벌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노량(露梁)으로 달려가는 섬진강의 긴 꼬리가 보였다. 물이 찰랑찰랑한 논에 갓 심어진 파릇파릇한 모와 누런 보리 물결이 평사리 너른 뜰을 바둑판처럼 반분했다.
“지리산이 저 논 속에 다 담겨요”
▎공 작가의 집 앞마당에 막 들어섰을 때,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군수도 와 보고는 “하동 최고의 뷰(View)”라고 말했단다. |
|
공 작가가 자랑했다. “눈앞의 저 논이 매일 변해요. 모내기한 직후에 저녁에 산책을 가면 지리산이 저 논 속에 다 담겨요. 여기가 지리산의 최남단이에요. 눈앞에 보이는 산이 구제봉이죠. 남원과 산청에서 올라온 지리산이 형제봉을 지나 구제봉을 휘돌아 마침내 여기 악양에서 끝나요.”볼수록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그가 왜 이곳에 집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집주인이 권하는 응접실 ‘멍 때리기’ 자리에 앉아 평사리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악양은 예로부터 치유의 땅이자 지친 이들의 안식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들이 살만한 명당을 지리, 생리(生利), 인심, 산수 등 네 가지 기준을 따져 골랐다. 하동(河東)도 그중 하나다. 이중환은 하동에서도 악양(岳陽)의 모처를 으뜸으로 쳤다. 하동군청에 물어보니 지금도 귀촌을 희망하는 이들이 한번쯤은 와 보는 곳이 악양이란다. 그 이름처럼 바위가 많은 악(岳)인데도 볕(陽)이 좋아 사람이 살기 좋다고 했다.공 작가가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알록달록 예쁜 2층집. ‘경남 도지사가 뽑은 아름다운 집’에 선정됐단다. 안채에서 뒤뜰로 이어지는 흙길에는 벽돌을 깔았고, 뒷마당도 제법 넓었다. 홀로 살기에 안전과 방범을 생각해 대문도 크고 튼튼한 것으로 주문해 달고, CCTV도 여러 개 설치해 놓았다고 했다. 야무진 집주인의 성격이 집 곳곳에 배어 있었다.뒷마당 천연 바위 아래에 성모상을 모셔 둔 게 눈에 띄었다. 그의 기도처라고 했다. 그의 세례명은 마리아다. 그는 언젠가 “신앙은 나의 전부예요. 그것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라고 말한 적 있다. “내가 하느님과 친하거든요” 사제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다. 미사를 보러 인근 하동성당, 구례성당, 멀리는 광양성당도 다닌단다. 시간을 정해 행하는 노동과 기도, 외딴 곳에서의 단순한 생활. ‘공지영식 봉쇄수도원’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평사리 사람들에게 공 작가는 그리 살가운 이웃은 아니다. 그 사이 친한 사람들이 대여섯 명 생기긴 했지만 3주에 한 번 정도 같이 밥을 먹을 뿐, 거의 혼자 밥을 먹는다고 했다.공 작가가 응접실과 이어진 주방으로 가더니 손빠르게 빵과 커피를 내왔다. 그제야 마당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5월의 여왕답게 빨간 장미꽃들이 피어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공 작가가 정원으로 안내했다.“이렇게 큰 은목서 보셨나요?”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샤넬 NO5.의 주원료로 쓰인다는 은목서였다. 그가 거액을 들여 구입해 옮겨 심었다는 50년 된 금목서도 있었다. 볕이 좋은 곳에 심는다는 정원수들이었다. 그가 강연장에서 보여주었던 흰 동백나무도 볼 수 있었다. 그는 빨간 동백도 30그루가 넘는다고 했었다. 그의 정원은 부지런한 집주인 손길이 다녀간 흔적들로 가득했다. 정갈하고 예뻤다.“우리 딸 나이와 제 문단 데뷔(1988년)가 같아요. 제가 등단한 지 36년이 됐다는 얘기죠.”
“나만 행복해서 정말 미안할 정도”
▎공 작가가 일군 밭으로 가봤다. 작은 온실을 만들어 케일과 배추를 심었다. |
|
나이가 든다는 것은 뭘까?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는 유고 시 ‘옛날의 그 집’에서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썼다. 공 작가도 다 버리고 이곳에 와서 홀가분했을까?“키가 내 두 배는 되는 커다란 동백의 시든 꽃을 다 따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침마다 그렇게 해 주자 비로소 새 꽃들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일단 가졌던 것을 다 버려야 새것이 오는 것이리라. 뿌리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 것이리라. 그때 나는 알았다. 새것이 오기 전에 옛것을 반드시 버려야 하는 때가 있는데 이 버리는 데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만두고 포기하는 것, 멀리 보내고 이별을 헤매는 것도 힘이 있어서라는 것을…”공 작가가 예루살렘 순례길에서 얻은 깨달음을 담아 펴낸 에세이 집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에 실린 한 대목이다. 그는 서울을 떠나면서 ‘세상적인 것들’과 멀어졌다. “온 나라가 그냥 돈, 자녀교육, 재테크 이런 얘기들뿐이니까. 페이스북도 다 끊었다”고 했다. 집에 TV를 없앤 지는 22년째란다.버린다는 것은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내면 새 물이 스며들 듯 빈자리는 또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 다 버리고 이곳에 정착한 그에게 악양 벌판과 평사리는 무엇을 주었을까?“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음악을 들어요.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아! 나 혼자 이렇게 행복해서 정말 미안하다. 이 맑은 공기 나 혼자 마셔서 정말 미안하다. 여기 와서 불면증이 없어져서 잠도 잘 자고, 감기 한 번을 안 걸렸어요. 집 짓고 정원 가꾸고 밭일하면서 육체노동의 기쁨을 알았어요. 일하다 보면 금방 배고파져서 얼마나 꿀맛인지, 제 평생 처음으로 밥을 두 그릇씩 먹었어요. 내 안에서 정말 손이 나와 가지고 밥을 갖고 이렇게 들어가요(웃음).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또 새로운 기분으로 세팅이 돼요.”
“예초기로 풀 베고 밭농사도 잘 지어”
▎공 작가가 지은 집은 알록달록 예쁜 2층집이었다. ‘경남 도지사가 뽑은 아름다운 집’에 선정됐다고 한다. 공 작가 옆 반려견이 ‘공동백’이다. |
|
몸이 튼튼해졌고, 팔뚝도 굵어졌다고 했다. 악양 땅의 자연과 공기가 세상살이와 사람에 지친 그를 치유해준 것으로 보였다. 자연의 회복력은 참으로 놀랍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살다 보면 속상한 일도 있잖아요. 저도 모르게 그냥 밖으로 나가요. 풀이라도 뽑으면 이상하게 가라앉더라고요. 요즘 어싱(earthing, 맨발걷기) 많이 하잖아요. 제가 어싱하는 분들에게 말했어요. 뭐 하러 걸어요. 그냥 마당에 나가 풀 뽑으면 돼요.”(웃음)평사리 생활 5년 동안 공 작가는 일 잘하는 농부가 되었다. “아침에 5시쯤 일어나서 6시부터 8시 정도까지 일합니다. 정원도 손질하고, 밭에 고추도 심고, 한꺼번에는 못 하니까 하루씩 돌아가면서 하죠. 앞마당 정리하는 데 하루, 뒤뜰 정리하는 데 하루, 집 아래 밭일하는 데 하루.” 그의 일주일은 빈틈없이 돌아간다. 바빠서 외로울 틈이 없단다. 집과 마당, 밭을 포함한 500평을 혼자서 다 관리하고 일군다. 그의 밭으로 가봤다. 작은 온실을 만들어 케일과 양배추를 심었다.“올해 농사는 성공작이에요. 그 어렵다는 케일과 양배추를 거의 성공시키고 있어요. 케일은 즙을 내서 먹는데, 그냥 생으로 먹어도 되게 맛있어요. 온실 옆에다 줄줄이 고추 모종을 심었는데, 얼마 전에 고라니가 다 먹어치웠어요. 너무 속상해서 다시 모종을 심어서 울타리까지 쳐놨다니까요. 어제는 풀 깎으려고 예초기를 돌렸고, 나무 잔가지 칠 때는 전기톱도 써요. 장비 쓰는 거 그거 어렵지 않아요. 해보면 두려울 게 없어요.”(웃음)시골살이의 즐거움은 뭘까? “평사리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해요. 여기 햇살이 너무 좋아 태양광 전지를 에너지로 쓰는데, 한 달 전기료가 3만5000원. 생활비가 서울의 반 정도밖에 안 들어요. 재래시장 가면 싱싱하고 값싼 것들이 많아요. 여기는 음식점이 많지 않아서 주로 집에서 모이거든요. 집에서 뭐 한 가지씩 만들어가지고 와서 먹으면 돈 들어갈 일이 없어요.”평사리 예찬론이 이어진다. 물론 아쉬운 것도 있다. 젊은이들 일자리가 없단다. 악양에 인력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하동차(茶) 덖을 때, 그리고 곶감 말릴 때다. 일자리만 있으면 시골이 살기 딱 좋은데, 그게 참 안타깝다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공 작가가 가는 곳마다 강아지가 졸졸 따라다녔다. 공 작가의 반려견 ‘공동백’이었다. 공 작가가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중에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지금 (모르는 손님들이 와서) 약간 긴장된 분위기가 연출되니까 다가와서 엄마를 지키는 거예요. 처음에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불쌍했던 개였죠. 너무 학대 받아서 제가 구조했는데, 이제는 식구가 됐네요.”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 진행자가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중 아멜리아의 아리아를, 차이콥스키의 ‘소중했던 날들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1989년 그의 소설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읽었다. 그로부터 35년 세월이 훅~ 지나갔다. 공 작가는 여전히 글을 쓰고, 책을 낸다. “화엄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고 있어요. 사찰요리 배우러 다니다가 보살님 눈에 들어가지고 제가 육법공양(향·등·꽃·과일·차·쌀 등 여섯 가지 중요한 공양)을 했거든요.(웃음) 가을에는 쿠팡 플레이에서 드라마가 하나 나오는데, 원작이 [사랑 후에 오는 것들]입니다. 제가 쓴 유일한 사랑이야기였죠.”
“공지영은 다시 외로워져야만 한다”
▎공지영 작가는 예루살렘 성지 여행에서 자신이 다시 ‘소수’가 될 것임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가 ‘잠수함의 토끼’로 살 것이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
|
과거 그는 빅스피커이자 여전사였다. 세상사에 맹렬했던 공 작가의 스타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의 ‘열정’을 높이 샀지만, 어떤 이들은 오지랖 넓게 뭘 잘 모르고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기도 했다. 과거 잠수함에 산소측정기가 없을 때는 산소에 민감한 토끼를 잠수함 밑바닥에 태웠다고 한다. 산소가 모자라게 되면 토끼가 사람보다 여섯 시간 먼저 죽기 때문이다. 게오르규는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공 작가는 우리 사회의 민감한 국면마다 특유의 감수성으로 경계경보를 울려주었던 잠수함의 토끼가 아니었을까? 시나브로 순수성을 잃고 거짓을 일삼는 이들이 많아진 요즘,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김민수 상봉동성당 신부는 공 작가를 두고 “<수도원기행>등으로 영적 깨달음을 주었고, 갈수록 높은 단계로 올라가 우리의 낡은 의식을 깨는 ‘도끼’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공 작가의 명동성당 강연회에서 한 가톨릭 신부는 공 작가의 신작을 언급하며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말은 ‘너는 다시 외로워져야만 한다’는 말로 들린다”고 했다. 기자에게는 공 작가가 잠수함의 토끼로, 예언자로 살아야 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공 작가도 자신이 다시 ‘소수’가 될 것임을 예감했다며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해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옛날에 소수였던 우리가 다수가 됐는데, ‘그게 아니잖아’라고 말하게 되면 나는 모든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들더라. 그때 제 마음속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네 말대로 너는 다시 소수가 될 것이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네가 느끼는 진실을 얘기해야 된다. 사실 혼자서 손을 들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기는 너무 어렵다. 하지만 제가 이왕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아니라고 말할 건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랬다. 올해 초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공 작가는 “86 운동권이 국회의원이 되고, 민주당이 다수당이 됐는데도 여전히 낡고 이분법적인 논리를 내세우며 80년대식 구호를 외치는 이데올로기적 동지들과는 결별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시든 꽃은 떼어줘야 나무가 건강해져”바람이 처마에 걸린 풍경을 건드리자 파이프오르간 닮은 소리가 났다. 초여름 따가운 햇볕이 그새 누그러졌다. 헤어져 돌아가는 길, 기자를 정원으로 안내하며 공 작가가 해주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이 정원이 그냥 이렇게 만들어진 게 아녜요. 비료도 주고, 진딧물도 다 떼어내고 시든 꽃들은 솎아내고… 유튜브 보면서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장미뿐 아니라 모든 정원 가꾸기의 가장 첫 번째가 뭐냐면, 시든 것은 빨리 떼어줘야 회복이 빨라요. 인간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 사회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혼자 떼어내려면 너무 힘들어요. 이미 병이 들면 더 못 떼어내요. 그러니까 누군가 그 시든 것들을 인위적으로라도 떼어줘야 합니다.” 그랬다. 다 잊었다지만 공지영의 미세한 ‘촉’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건강하게 돌아오기 위해 떠난 것 아닐까?보길도에 살았던 윤선도의 오우(五友)처럼, 평사리에 사는 공지영의 오우는 뭘까?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뒤뜰 바위 앞에 모셔진 성모상, 어김없이 찾아오는 노을과 산그늘,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공동백, 손수 심고 가꾼 정원의 나무와 꽃들일 수 있겠다. 마지막 하나를 채우라면 하동차(茶)와 커피일까, 아니면 와인일까?시인 김용택의 [섬진강]에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는 시구가 있다. 공 작가도 “여기 해질녘 노을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했는데, 못 보고 떠나온 게 아쉬웠다. ‘공지영의 봉쇄수도원’을 개방해 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작가의 영적 성숙과 평화를 빈다.- 글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na.kwonil@joomgang.co.kr / 사진 장정필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