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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 (48) 광주 무등산, 삼복더위에 새기는 초인의 외침 

 

한여름 중머리재, 입안에서만 맴돌던 그 말

무등산(1186m)은 광주광역시, 담양, 화순에 걸친 광주의 진산이다. 지리산에서 영암 월출산, 해남 두륜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호남정맥 남서 측 연변부에 속하는 장대한 산지에 자리 잡고 있다. 특이하게도 동서남북 어디에서 조망하여도 산줄기와 골짜기가 뚜렷하지 않은 둥근 모습을 하고 있다.

산 정상은 천왕봉·지왕봉·인왕봉 3개의 암봉으로 이뤄져 있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규봉·입석대·서석대 등 기암괴석과 증심사·원효사·약사사 등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광주 사람들은 평소에 무등산을 동네 뒷산처럼 오르내린다.

새벽 4시. 6월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비교적 덜 뜨거운 새벽에 증심사 방향으로 무등산을 혼자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5시 무렵, 증심사 넘어 무등산 정상에서 솟아오르는 해는 가없이 아름다웠지만, 햇살의 열기는 살갗에 칼침을 놓은 듯 뜨거웠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그때 난생처음 알았다. 시원한 나무 그늘도 선선한 새벽 공기도, 열대야가 계속되면 찜통 한증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등산 3시간 만에야 무등산 중머리재(617m) 능선에 가까스로 올라섰다. 정말 그때부터 살 것 같았다. 시야가 확 트이고 찜통 열기에서 벗어나자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혔다. 형언하기 어려운 청량감이 해방처럼 밀려왔다. 잠시 벤치에 누워 눈을 감고 바람을 음미하며 쉬고 있는데, 먼저 올라온 청년들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죽어도 더는 못 가겠다. 미쳐 버리겠다. 다음에 꼭 시간 내서 우리 다 같이 오자.”

“그래 오늘만 날이냐!”

다들 이구동성으로 합창하더니 하산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청년들에게 소리쳤다.

“젊은 양반님들! 정상까지 겨우 400m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까짓 더위에 물러선다면 이 험난한 인생길을 어찌 헤쳐갈 수 있단 말이오! 저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지금 포기한 그 자리에서 바라본 세상과는 천양지차일 것이오. 지금의 고통을 이겨내고 정상에 우뚝 서는 경험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인생의 최고 자산이 될 것이오. 이때야말로 호연지기를 기를 절호의 기회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생을 조금 살아보니 내일이 꼭 온다는 보장이 없고, 내일은 또 내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거외다. 무슨 일이든 오늘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내일은 기회가 없게 되어서 후회와 미련만 쌓이게 마련이더이다. 그러니 나약한 마음을 고쳐먹고 어서 나와 같이 정상을 향해 다시 한번 오릅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말은 내 입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벤치에 누워 있자니 요즘 내 머릿속을 온통 휘저어놓은 니체의 ‘초인’이 떠올랐다. 전기작가 수 프리도가 쓴 《니체의 삶》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니체(1844~1900)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한 문제작들을 통해 “신의 의지”에 기반을 둔 기존의 철학을 전복하고 “니체 이후”의 시대를 열었다. 니체는 철학적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첫째, 삶이란 권력(힘)에 대한 의지다. 행복·복지·동정이란 단어들은 희망의 푸른 목장일 뿐이다. 둘째,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를테면 모든 생존은 순결하고 정당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선악 개념이 뒤바뀌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악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망했기 때문에 악한 것이 된다. 반대로 선하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승리했기 때문에 선한 것이 된다. 셋째, 삶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아모르파티)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나타난 모든 과정을 그저 견디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초인(超人)을 소망해야 한다”고 말했다. 초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첫째, 천국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지금 이곳에 충실한 자다. 둘째,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는 유토피아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 땅에 순응하는 자다. 셋째, 영겁회귀의 사상을 깨달은 사람이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윤회한다. 모든 것은 무한한 시간 가운데 흘러갔다가 되돌아온다. 바로 이 사상을 깨닫는 자가 초인이다. 인생의 핵심을 관통하는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본질을 고민하게 만든다. 니체의 초인, “지금 이곳에 충실한 자”가 되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 여전히 혼란스럽다.

수직의 미와 수평의 덕이 어우러진 무등산


벤치에서 일어나 1km 정도를 더 올라가자 ‘서석대’가 나를 사로잡았다. 다양한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참으로 기묘했다. 서석대는 노을에 반사되면 수정처럼 강한 빛을 발하며 반짝거 려서 ‘서석의 수정 병풍’으로 불린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고 부르는 것도 서석대의 지형 경관과 연관되어 있다. 저렇게 멋진 병풍은 누가 빚었을까? 무등산을 빚은 조물주의 선물일까? 그저 화산과 풍화작용이 낳은 자연법칙의 산물일까? 경이로움과 궁금증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수풀 우거져 시원한 그늘이 드리운 곳에 놓인 널찍하고 평평한 돌침대가 쉬어가라며 나를 유혹한다. 못 이기는 체 유혹에 넘어간 나는 잠깐 눕는다는 것이 그만 깊이 잠들어버렸다. 일어나 보니 2시간이나 단잠을 잤다.

가볍게 요기를 한 뒤 따가운 햇볕을 뚫고 400m를 더 올라가니 무등산의 제2경이라는 입석대가 수려한 자태로 나를 맞았다. 돌기둥이 반달 모양으로 둘러서 있어 입석대라는 이곳은 서석대와 대체로 비슷한 형상이다.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다. 어떻게 저 키 큰 돌들이 무너지지 않고 이고 지고 수천 년을 견뎌왔을까? 기묘하게 솟아오른 주상 절리 기둥은 웅장한 병풍의 형상을 이룬다. 어떤 산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절경이다.

입석대를 뒤로하고 마지막 안간힘을 짜내 드디어 무등산 정상 천왕봉에 올랐다. 장장 7시간의 등정이다. 우리나라 산의 정상은 대부분 뾰족하고 날카로운데 정상마저 펑퍼짐한 무등산은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다. 무등無等은 등급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나다는 뜻이다. 어머니 품속도 등급이 없다.


오후 3시쯤, 중봉과 장불재를 걸쳐 8부 능선의 무등산 쉼터를 찾았다. 무등산은 평소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복작거리지만, 삼복더위라서 그런지 오늘은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 만큼 한산하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쉼터로 들어오기에 물었다.

“이런 무더위에 어찌 올라왔어요?”

“여름 방학 중인데, 이렇게 젊을 때 대우주를 만끽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면 너무나 후회될 것 같아 명산을 찾아 전국 일주를 하고 있습니다.”

대답과 함께 해맑게 웃는 아가씨를 보며 나도 모르게 “그래, 그래, 맞아! 유레카!”를 외쳤다. 진리는 너무도 평범한 데 있었다. 니체를 읽으며 들었던 의문의 답이 저 해맑은 웃음 속에 다 들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2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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