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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 유성운의 역사로 본 부동산 이야기(1)] '딸깍발이' 선비는 왜 남산골에 살았을까 

가난한 선비들 살던 동네, 일제강점기 때 180도 달라져 

이순신·김종서, 정약용·유성룡 등 굵직한 명사 다수 배출
남촌 개발로 명문세도가 동네 북촌 상대적으로 열악해져


▎서울 중구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관중들이 민속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조선시대 남촌은 남인, 소론, 소북 등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였다. / 사진:연합뉴스
중학교 때인가. 국어 시간에 [딸깍발이]라는 수필을 배운 적이 있다. 국어학자 이희승 씨가 쓴 글로, 청렴하고 지조 있는 선비의 모습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남루한 의복에 사시사철 콧물이 맺혀 있으며 추워도 내색하지 않는 그는 요즘 말로 하자면 ‘자존심만 남은 꼰대’이지만, 사실 이 글은 최소한의 지조마저 사라진 현대 세태를 비꼬는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선비는 왜 하필이면 북촌이 아닌 남산골에 살았을까? 한양에 사는 양반이라면 안국동 일대의 북촌에 거주했던 게 아닌가.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깊은 내막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사대문 안은 크게 북촌, 중촌, 남촌으로 나뉘었다. 이 중 [딸깍발이] 선비가 살았던 동네는 남촌에 속한다. 남촌은 중촌 남쪽부터 남산 아래까지 영역으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남산동과 회현동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남촌은 남인, 소론, 소북 등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였다. 일단 궁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부터 이곳이 권력의 핵심에서 비켜나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희승 씨가 [딸깍발이]의 무대를 남산골로 삼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남촌엔 하급 관리나 군인들 많이 살아


▎성탄절인 지난해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가 열린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렇다고 해서 남촌에 살았던 조선시대 인물들이 모두 별 볼일 없는 인사였던 것은 아니다. 일단 조선 역사를, 아니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 출신이다. 그는 한양 건천동(현재의 서울 중구 인현동 1가)에 살았다. 건천동(乾川洞)이라는 지명은 이곳을 흐르는 개천이 비가 오지 않은 날엔 말라붙어 바닥이 보일 정도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마른냇골이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건천동이 된다. 건천동에는 이순신의 라이벌이자 임진왜란의 빌런(Villain)으로 묘사되고 있는 원균도 비슷한 시기에 살았다. 재미있는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두 사람의 집안을 보면 남촌이라는 지역 특색이 아주 잘 드러난다.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평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음서(고위 관직을 지낸 조상 덕분에 관직에 오르는 것)로 종5품 창신교위를 지낸 하급 관료였다. 원균의 부친 원준량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니 제법 높은 관직이었으나 무반, 즉 무인이었다. 다시 말해 남촌은 공무원 중에서도 하급 관리나 군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다. 고위층이 많이 살았던 북촌과는 그만큼 대비가 되는 동네였다.

이곳에는 남별영, 남소영, 금위창, 어영창, 금위화약고, 수어화약고 등 각종 군사 시설이 있다는 것도 무인들이 많이 거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예나 지금이나 군사시설이 많은 곳은 땅값이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조선시대 군인들은 그래도 남촌에서 거주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궁성 내에 근무한 호위 군관 중에서는 한양에서 집을 구하지 못해서 파주, 교하, 양주 등에서 살면서 통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집을 구하지 못해 장거리 통근을 해야 하는 애환은 이미 이때부터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당시엔 무관들에게 한양의 싼 하숙집을 알선해주는 것도 병조(지금의 국방부)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이들보다 약 한 세대 뒤에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이곳에서 자랐다. 허균은 사색당파 중 가장 마이너리티였던 북인에 속했다. 반항적이고 반골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확실히 권력과는 거리가 먼 동네의 분위기가 배어 있는 듯하다. 조선 후기 유명한 화가 강세황도 남소문동(현재의 장충체육관 부근)에 살면서 각종 그림을 남겼다.

남촌에 거주했던 사람들 중에도 고관은 있었다. 세종 때 북방 개척으로 유명한 김종서와, 역시 동시대에 유명한 정치가였던 정인지도 건천동에 살았다. 또 회현동에 살았던 동래정씨에서는 정광필을 비롯해 정태화, 정원용 등 정승이 12명이나 배출됐다. 하지만 대부분이 조선 전기와 중기 때 사람들이고, 시간이 갈수록 북촌보다 그 위세가 낮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노론의 권세가들이 사는 동네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 중 하나가 조선시대 유행했던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신위가 쓴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나오는 말인데, 남촌은 술이 유명하고 북촌은 떡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다. 남촌은 정치적으로 불우하고 가난한 선비들이 많아 세상을 한탄하며 술 소비량이 많았고, 북촌은 잔치가 많아 떡 빚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낙원동은 떡집이 유명하고, 남촌 일대는 유흥가가 번성하기는 했다.

[경수당전고]에 따르면 “남촌의 술은 장흥방과 회현방에 나는 것이 빛깔이며 맛이며 단연 최고였다. 한 잔만 먹어도 취했는데 곧 깨면 깔끔하여 나라를 통틀어 최고의 명주로 알려졌다. 피로한 사람에게는 더욱 좋다”고 적혀 있다. 남촌의 술이 품질 좋기로 유명했던 것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해 빚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동성당이 명동에 있는 이유


▎일제강점기 남촌은 혼마치(本町·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현재의 남대문로에서 태평로·회현동·명동 등이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당시 들어선 미쓰코시백화점 자리에는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한편 북촌보다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남촌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들이 이곳에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김종직이나 정탁 같은 유명한 지방 출신 관료들이 이곳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이순신을 천거했던 유성룡도 남촌에 살았다. 경북 의성 출신인 그는 영의정, 이조판서 등 주요직을 지내며 이곳에서 거주했다.

또 조선 후기 유명한 학자인 정약용도 남촌에 있는 명례방(明禮坊)에 살았다. 명례방은 지금의 명동에 해당한다. 그는 원래 남양주에 살았는데, 처가에서 마련해준 돈으로 전세를 얻었다고 한다. 이 또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지방 출신으로 한양에서 집을 구하려면 집안의 도움 없이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던 것이다. 정약용조차도 처가 도움 없이는 한양에서 살 수 없었던 게 18세기 조선의 현실이었다.

명동성당이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남촌에는 정약용을 비롯해 천주학을 공부하는 남인 계열 학자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들이 서학에 심취했던 것도 어쩌면 권력에서 밀려난 현실에서 도피하고 새로운 진리를 갈망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남인들 사이에서도 서학을 두고 이에 찬성하는 신서파와 반대하는 공서파로 나뉘었다는 사실이다. 대개 영남 남인들은 공서파였고, 서울·경기 남인들은 신서파에 속했다. 나중에 정약용을 서학 혐의로 고발한 것도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노론이 아니라 같은 남인의 공서파였던 홍낙안이었다. 내부의 사상 투쟁이 더 치열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이상이 쓴 소설 [날개]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미쓰코시백화점이 있던 자리는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들어서 있다. 한때 가난한 [딸깍발이] 양반들의 동네였던 이곳이 20세기 전반에는 가장 돈이 넘치는 지역이 됐다.

개항기부터 일본인 남촌에 모여 들어


▎화신백화점 앞 종로 네거리에서 동쪽을 바라본 거리 풍경 사진엽서. 화신백화점은 1987년 2월까지 건재했고,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삼성그룹에 매각돼 현재는 종로타워가 세워져 있다.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북촌과 남촌의 운명이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다. 남촌이 일본인들의 주거지로 변모하면서다. 북촌에는 워낙 조선의 쟁쟁한 집안이 많다 보니 한양으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개항기부터 남촌에 모여 살았다. 구한말 일본의 초대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공사관을 세운 곳도 남산 밑 금위대장 이종승의 집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가 되면 조선인은 북촌, 일본인은 남촌이라는 구도로 확연하게 나뉘었다. 남산에는 조선신궁이 있었고, 1930년대 중반 서울의 인구(약 44만 명) 중 25% 이상이 일본인이었다고 하니, 이곳은 서울에 만들어진 작은 도쿄였던 셈이다.

남촌은 혼마치(本町·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현재의 남대문로에서 태평로·회현동·명동 등이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현재 한국은행 자리엔 경성 조선은행이 들어섰고, 그 맞은편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있는 자리엔 미쓰코시백화점이, 그리고 그 옆으로는 히라다백화점과 미나카이백화점이 나란히 들어섰다. 참고로 지금 롯데 영플라자 자리에는 죠지아백화점이 있었으니 불과 반경 200m 안팎 4곳에 백화점이 자리했던 셈이다. 그 치열한 경쟁은 오죽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쇼핑객이 드나들었겠는가.

이 4곳 중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곳은 신세계백화점과 롯데 영플라자다. 죠지아백화점은 해방 후 중앙백화점, 미도파백화점으로 바뀌었다가 2002년 롯데쇼핑에 인수되면서 지금의 영플라자가 됐다.

당시 남촌이 워낙 발달하다 보니 이전까지 명문세도가의 동네였던 북촌이 상대적으로 인프라가 열악한 동네가 되고 말았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일제강점기 시절 유명 여류화가였던 나혜석이 “(내가 만약 경성의 시장이 된다면) 조선인 거리도 혼마치처럼 전기 시설을 갖추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혼마치를 충무로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 이유가 이순신이 태어난 건천동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일본인이 대거 거주했던 기세를 누르기 위해서라는 설이 많다. 이 설이 억지로 쥐어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지금의 을지로 역시 여기에 화교 상권이 형성돼 있어서 맞춤형으로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기 때문이다. 살수대첩 때 수나라 군사 30만 명을 물리친 을지문덕은 평양 출신으로 지금의 을지로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한편 조선의 상인들이 500년 가까이 지켜왔던 지금의 종로에는 조선인 자본으로 화신백화점과 동아백화점이 세워지면서 나름대로 경쟁 구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 중 화신백화점은 1987년 2월까지 건재했고,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삼성그룹에 매각돼 현재는 종로타워가 세워져 있다. 삼성은 2016년 이 건물을 이지스자산운용에 매각했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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