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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20)] 제사와 잔치를 통해 본 조선 궁중음식 

제사에 진설하는 음식 50그릇… 많게는 100그릇 올려 

제사상의 60%는 보기 좋고 맛도 좋은 과자와 과실
일반에는 금지됐던 유밀과… 만드는 사람도 따로 둬


▎5월 5일 서울 종로구 종묘 영녕전에서 종묘대제가 진행되고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대제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제례의식이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에서 지내는 제사만 1년에 수백 회나 됐으므로 여기에 들어가는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 사진:연합뉴스
서울 동대문구에는 휘경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지금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여러 종류의 학교가 있고, 상가를 비롯한 아파트와 빌라가 꽉 들어차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도 이 지역은 서울 근교의 한가한 마을이었다. 휘경동에는 배봉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이 산자락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가 있었다.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이므로 왕비의 묘에 붙이는 능(陵)은 쓸 수 없고, 임금을 낳은 후궁에게 붙이는 원(園)을 썼다. 수빈 박씨 묘의 명칭은 휘경원이다. 휘경동이란 지명은 이 휘경원에서 유래한 것이니, 수빈 박씨가 돌아간 1823년 뒤 생긴 이름이다. 이후 두 차례 묘를 옮겨 휘경원은 현재 경기 남양주에 있다. 사람의 다리를 묘사하는 말로 ‘다리가 휘경원 정자각 기둥 같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면 19세기 중반 서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곳이다.

휘경원이 있던 배봉산에는 왕족의 묘가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도세자의 무덤이다. 처음 사도세자 묘를 배봉산에 썼을 때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였지만, 정조가 즉위한 후 영우원(永祐園)이라고 격을 높여 불렀고, 정조 13년(1789) 화성(현재 경기도 수원)으로 이장하면서 현륭원으로 고쳤다. 그리고 고종 때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한 뒤에는 현륭원을 융릉이라는 왕릉의 명칭으로 격상시켰다. 정조 임금이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여기를 여러 차례 행차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 환갑 잔치를 위해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 동안 화성을 왕복하는 여행을 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홍씨는 1735년 같은 해 태어났으므로, 1795년은 부모 둘의 회갑이 되는 해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살아계신 어머니를 위해 정조는 성대한 회갑연을 화성에서 열었다. 8일 동안의 상세한 내용을 책으로 간행한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다.

서울 청계천의 타일로 만든 벽화로 유명한 [반차도]는 이 의궤에 들어있는 행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근래에 이 책에 나오는 음식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궁중음식 연구가 이뤄졌고, 다양한 음식 관련 책자도 간행됐다. 이번 호에서는 조선 왕가의 제사와 생일잔치를 얘기하면서 여러 가지 음식 중 기름에 지지거나 튀긴 과자인 유밀과(油蜜果)와 관련된 내용을 보기로 한다.

효성 지극해 부모 극진히 기리던 정조


▎밀가루로 만들어 기름에 튀긴 유밀과는 조선시대에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과자였다. 국가에서는 유밀과가 사치를 조장할 수 있다고 여겨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유밀과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
정조 임금은 1776년 3월 10일 즉위했고, 즉위한 지 이틀 뒤 아버지 사도세자 사당의 명칭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열흘 후에는 기존 수은묘(垂恩廟)라는 이름을 경모궁(景慕宮)으로 바꿨다. 그리고 수원으로 묘소를 옮기기 전 여러 차례 직접 배봉산 아버지 묘소에 가 제사를 지냈다. 정조는 아버지의 생일인 1월 21일이면 어떤 형식으로든 아버지를 기렸다. 아버지 사당에 가 제사를 지내거나 신하를 아버지 산소로 보내 묘를 살펴보는 등 아버지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꾸준히 내외에 알렸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수원으로 옮긴 1789년 이후에도 10여 차례 아버지 묘소를 찾아갔다.

1795년에는 윤2월에 어머니 회갑연을 화성에서 열기로 돼 있었으므로, 1월 21일 사도세자의 60회 생일에는 서울에 있는 사당인 경모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일성록]에는 이날 제사에 올린 제물의 목록을 기록해 놓았는데, 전체 음식 그릇 수가 100그릇이었다. 그 종류를 보면 조과(造果) 20그릇, 다미(茶味) 20그릇, 과일 20그릇, 저냐 14그릇, 탕 10그릇, 떡 7그릇이다. 이밖에 젓갈, 절육(切肉), 각종 적(炙), 국수, 만두, 떡국, 꿀, 겨자, 초장이 각각 1그릇이었다.

이 제사상 음식에서 요즈음 별로 익숙하지 않은 이름은 조과(造果)와 다미(茶味)다. 사전에서는 조과를 ‘유밀과나 과자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조과가 나오는데, ‘과일 모양을 본떠 만든 과자를 우리나라에서는 조과라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과일 모양이었겠지만, 그릇에 담기 편하게 네모나게 잘라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사도세자 60회 생일 제사상에 올린 조과의 종류는 약과, 중박계, 산자, 한과, 차수과, 만두과 등인데, 현재는 이를 모두 유밀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다미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이 자료 외에는 용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미로 분류한 20그릇은 여러 가지 강정과 다식이 중심이고, 그밖에 조란(棗卵), 전약(煎藥), 산약(山藥) 등이 더 있다.

과실 20그릇 중에는 잣, 밤, 감. 대추, 호두, 은행, 배 등의 국내산 외에 용안이나 여지 같이 외국에서 들여온 것도 있다. 그런데 과실 항목에는 실제 과실뿐만 아니라 과실이 들어간 여러 음식이 포함됐다. 밀조와 호두당처럼 대추와 호두를 꿀에 잰 것이나 귤병과 건포도처럼 귤과 포도를 가공한 것도 들어 있다. 그리고 연근과 도라지 등을 꿀에 조린 각종 정과는 물론 배나 감이 들어간 수정과와 대추나 모과 등을 넣어 부친 전(煎)도 과실 항목에 넣어 놓았다.

제사상에 올린 100그릇의 제물 가운데 60그릇이 과자와 과실이고, 나머지 40그릇 중 가짓수가 많은 것은 저냐와 탕과 떡이다. 그런데 저냐와 떡은 한 그릇에 여러 종류를 담는 것도 많아서 전체 음식 종류는 그릇 수의 몇 배가 된다. 예를 들어 저냐에 들어있는 누르미는 한 그릇이지만, 하나의 그릇에 전복, 대합조개, 생선, 쇠고기 등 네 종류의 누르미를 담았다. 이렇게 보면 저냐는 14그릇이라고 하지만, 전체 종류는 42가지가 된다.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에 진설하는 음식이 50여 그릇 정도인데, 사도세자의 제사상에 100그릇의 음식을 차려놓은 것을 보면 정조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성대했던 혜경궁홍씨 생일잔치


▎조선시대 유명한 지식인 가운데는 자신의 제사에 유밀과를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사람이 많이 있다. 대표적 인물로 퇴계 이황을 들 수 있다. 사진은 퇴계 이황 선생 종가의 불천위 제사상 차림. / 사진:아름지기
정조는 즉위한 뒤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탄생일이 되면 생일 전날인 6월 17일 돈과 옷감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어느 해에는 어머니의 탄신을 축하하는 행사를 창경궁 명정전에서 열었다. 혜경궁홍씨의 생일잔치 중 가장 큰 잔치는 회갑을 맞이한 1795년 열린 여러 가지 행사다. 먼저 윤2월에는 화성에서 회갑연이 있었고, 6월 18일 탄신일에도 명정전에서 성대한 생일축하 행사가 있었다.

화성에서 열린 회갑연의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여드레 동안 일어난 일의 모든 내용이 들어있다. 특히 8일 동안 혜경궁홍씨와 정조의 매 끼니 음식상의 자세한 내용이 정리돼 있어 궁중요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이 여드레 동안에 올린 음식들이 혜경궁홍씨의 일상적 음식상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화려한 궁중음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8일 동안의 수라상 중 윤2월 11일과 12일의 상차림을 보기로 한다. 11일에는 다섯 차례 상을 올렸는데, 각 상의 명칭은 죽(粥)수라, 조(朝)수라, 주다소반과(晝茶小盤果), 석(夕)수라, 야다소반과(夜茶小盤果) 등이다. 12일은 조수라, 주다소반과, 주(晝)수라, 미음, 석수라, 야다소반과 등 여섯 차례다. 대체로 하루에 대여섯 번 음식을 바쳤는데, 혜경궁홍씨의 상에는 매번 15그릇 정도의 음식이 올라갔고, 정조의 수라상 그릇 수는 그 반 정도였다.

이처럼 정조는 자신의 음식 그릇 수를 어머니의 반 정도로 해 음식을 통해서도 어머니를 공경하는 뜻을 보였다. 그런데 이 회갑연에 그치지 않고 혜경궁홍씨의 생일인 6월 18일에도 생일잔치를 치렀는데, 화성의 회갑연보다 훨씬 화려하고 성대했다. 음식상에 올린 음식 숫자만 보더라도 화성의 회갑연에는 70그릇을 올렸는데, 명정전에서 열린 본 생신에서는 82그릇을 올렸다. 그리고 꽃장식도 화성에서는 42개의 꽃을 꽂았지만, 본 생신에서는 83개의 꽃을 꽂았다.

화성에서 열린 회갑연에서 신하들에게 내린 음식상은 상, 중, 하의 세 가지 구분이 있었는데, 모두 280명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그리고 군사 7716명에게 떡 두 개, 탕 한 그릇, 건대구 한 조각을 나눠줬다. 6월 18일 생일잔치에는 남녀 친척과 함께 문신과 무신 합해 약 1800명의 신하가 참석해 식사했다. 그리고 유생, 장교, 병사, 서리, 하인, 기생 등 5000명 정도되는 인원에게는 떡과 참외 등을 줬다.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이한 해의 생일잔치가 얼마나 성대했는지는 다음 해 열린 생일잔치에 올린 음식이 59그릇이고, 이후에는 대체로 40그릇 정도의 음식을 진설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들어 왕실에서 지내는 제사만 1년에 수백 회나 됐으므로 여기에 들어가는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왕실의 혼인이나 장례 때에도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큰일이 있을 때는 임시로 조과청(造果廳)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운용했다. 그러나 때때로 제사 음식을 허술하게 만들어 관리가 처벌을 받는 일도 있었다.

조선 후기 왕실 제사만 연간 수백 회

영조 4년(1728년)에 왕이 선릉과 정릉을 친히 살펴봤는데, 이 두 능은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영조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먼저 선릉에 올라가 예를 올렸는데, 제사를 마치고 나서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를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그 이유는 제사상에 올린 과자의 색이 옅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이 왕릉에서 직접 제물의 질을 언급하고, 담당 관리를 처벌하는 일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임금이 제사 음식을 직접 맛보기도 했다. 정조는 현재 경기 고양 서오릉 경내에 있는 홍릉과 창릉 등에 가 친히 제사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제사가 끝난 다음 담당 관리를 파직시키고 요리사도 엄하게 신문해 처벌한 다음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린 일이 있다. 이는 창릉의 조과(造果)를 규정대로 만들지 않아 유밀과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물 가운데 특히 유밀과는 들어가는 재료 양이나 만드는 방식과 규격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와 요리사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면 이와 같은 규정에 맞지 않는 유밀과를 만들게 되고, 제사상에 진설했을 때 모양이 바르게 되지 않았다. 정조는 제물의 고임새뿐만 아니라 맛까지 확인했다.

위에서 본 사도세자의 제사상이나 혜경궁홍씨의 잔칫상에도 여러 종류의 유밀과가 들어있다. 사도세자 제사상에 올린 조과(造果) 20그릇은 대부분 유밀과고, 다미(茶味)는 사탕이거나 꿀로 조리한 것이다. 현재 개념으로 본다면 조과와 다미는 과자와 사탕이라고 할 수 있다.

혜경궁홍씨의 생일잔치 상차림에도 이런 과자 종류가 상당수 들어있다. 화성 회갑연에서는 전체 70그릇 중 반 정도가 유밀과를 포함한 과자 종류고, 6월 18일 명정전에서 열린 생일잔치에서는 82그릇 중 20그릇 정도가 과자 종류다. 잔칫상보다는 제사상에 과자를 더 많이 진설한 것으로 보인다. 잔칫상이나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중 과자와 사탕의 비율이 높은 것은 맛도 좋지만, 상에 차려 놓았을 때 보기가 좋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유밀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당시에는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것이 최고급 과자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밀과를 특별히 고급 과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유밀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약과의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 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밀가루로 만들어 기름에 튀긴 유밀과는 조선시대에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과자였다. 국가에서는 유밀과가 사치를 조장할 수 있다고 여겨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유밀과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유밀과를 금지했다. 이후 이 명령이 여러 왕을 통해 반복적으로 내려졌고, 마침내 조선을 통치하는 기준이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실리게 된다. [경국대전]에는 ‘환갑잔치, 결혼식, 제사 외에는 유밀과를 쓸 수 없다. 이 규정을 어기는 자는 볼기 60대를 때린다’는 규정이 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경국대전] 이후 나온 여러 법령에도 이 대목이 그대로 들어갔는데, 1785년의 [대전통편]이나 1865년의 [대전회통]에도 들어있다. 그러므로 법에서 정한 행사가 아니라면 유밀과를 만들어 먹는 것은 조선시대 내내 불법이었다.

지금과 달리 사치품이던 유밀과

조선시대 유명한 지식인 가운데는 자신의 제사에 유밀과를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사람이 많이 있다. 대표적 인물로 퇴계 이황을 들 수 있는데, 퇴계는 돌아가기 며칠 전 세 가지 유언을 남겼다. 첫째는 국가에서 주관해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면 유언이라고 말하고 굳게 거절할 것. 둘째는 장례에서 유밀과를 쓰지 말 것. 셋째는 커다란 비석을 만들지 말고, 아주 작은 돌에 이름과 집안 정도의 간략한 내용만을 새길 것 등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이런 유언을 남긴 이유는 국가의 시책을 따른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사에 유밀과를 쓰는 것은 불법이 아니지만, 제사를 검소하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유밀과는 엄격하게 통제하는 먹거리였으므로 19세기 대중소설에도 유밀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처음 춘향의 집에 갔을 때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목에 나오는 음식을 보면 갈비찜, 돼지고기볶음, 신선로, 닭찜, 생선회 등과 함께 송편, 설기, 두텁떡, 각종 웃기떡이 나온다. 그리고 여러 과일과 과자 중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용안이나 여지 같은 과일이나 민강이나 귤병 같은 과자도 등장한다.

또 [계우사]라는 작품에도 기생집에서 차려낸 음식상에 각종 화려한 음식이 나온다. 귤병·편강·민강·호두당·포도당·옥춘당·인삼당·인삼정과·모과정과·새앙정과 등의 꿀에 조린 과자와 사탕이 있고, 메밀완자·신선로·벙거짓골·영계찜·갈비찜·승기악탕·어육·제육·어만두·떡볶이 등의 음식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지만, 유밀과는 찾아볼 수 없다.

유밀과가 대중 먹거리와 거리가 먼 음식이라는 것은 서울 상점가에 유밀과를 파는 가게가 없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세기 서울 시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는 [만기요람]이나 [동국여지비고] 같은 책에도 엿을 파는 상점이 보이지만, 유밀과를 파는 가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제사, 결혼식, 회갑연 등에서는 공식적으로 유밀과를 쓸 수 있었지만, 이는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된 얘기이지 가난한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1895년 어떤 사람이 쓴 일기를 보면 아들의 혼례에 조과(造果)를 만드는 사람에게 52냥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 말까지도 유밀과는 가게에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유밀과 만드는 전문가를 따로 불러서 썼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 외세가 밀려들면서 외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이 많아지는데, 이런 가게에서는 각종 과자나 사탕도 팔았다. 이제 유밀과는 더 이상 금지된 먹거리가 아니었다. 진고개의 일본인 상점에서 유밀과 두 근을 12냥에 샀다는 1895년의 기록은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약과나 사탕을 높이 고여 놓은 회갑상을 받는 것보다는 고급 호텔에서 케이크를 자르는 회갑연이 더 인기가 있고, 유밀과보다는 초콜릿 과자가 더 일반적인 세상이 됐다. 마치 배봉산의 왕족 무덤이 있던 자리에 학교와 아파트가 들어선 것처럼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10호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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