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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31)] ‘돌아와요 부산항에’, 동포애 흐르는 조용필 출세곡 

쫓겨나고, 끌려가고, 북송되고… 재일동포 수난사를 노래하다 

차별·억압에 맞서며 유대감 형성… 국적은 다르지만 ‘같은 한국인’
재일동포 북송 둘러싼 남·북·일 암투… 김정은 친모도 북송선 탔다


▎1976년 나온 조용필과 영사운드의 스플릿 음반. 1976년 가수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리메이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 톱가수로 올라섰다. / 사진:한국대중가요앨범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 목 메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 형제여 /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1절)

‘가왕’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20세기 최고의 대중가요로 꼽힌다. 실제로 2000년을 전후해 실시한 여러 설문조사에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등을 제치고 세기의 노래로 선정된 바 있다. 조용필은 1972년에 이 곡을 발표하고 1976년 다시 리메이크해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가왕의 ‘위대한 탄생’을 알린 것이다.

사실 이 노래는 원곡이 따로 있었다. 가수 김해일(본명 김성술)이 1970년에 내놓은 ‘돌아와요 충무항에’(황선우 작곡)다. 이듬해 원곡 가수가 불의의 화재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밴드를 하던 무명 가수 조용필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원곡을 개작하고, 편곡해 1972년 자신의 음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수록했다. 노래는 부산을 기점으로 입소문을 타며 퍼져나갔다.

“재일동포, 그리운 내 형제여”


▎1975년 재일동포 추석성묘단의 가족 상봉 모습. 그해 추석을 맞아 조총련계 재일동포 720여 명이 부산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 사진:국가기록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큰 인기를 얻은 것은 1976년이었다. 그해 조용필은 새 음반을 발표하며 이 노래를 다시 만들었다. 트로트 음계를 썼지만, 기존 트로트와 혁신적으로 달랐다. 전주에 직접 연주한 기타 리프를 넣고 록 음악의 활기찬 리듬을 가미했다. 중간중간 바이올린 연주를 깔아 애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음악적 정서를 주었다. 귀에 착 감기는 조용필 특유의 음색이야 더 말해 뭐하겠는가.

음반은 밀리언셀러로 떠오르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조용필만 부른 건 아니었다. 이미자, 나훈아, 조미미 등 당대의 톱가수들이 앞다퉈 취입했다. 하지만 조용필을 넘어서진 못했다. 대중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그의 노래는 1970년대 중반 우후죽순 생겨난 음악다방에서 각광받았다. 인기는 벚꽃처럼 꽃망울을 터뜨려 부산에서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장르를 넘나들고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왕의 음악적 역량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명실공히 국민가요가 됐다. 그런데 국민가요는 시대가 만든다고 한다. 뮤지션의 개인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노래가 시운을 타지 못하면 비운의 명곡으로 묻히기 십상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74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대한민국과 북한 사이에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그 영향으로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이 줄을 이으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1975년 추석을 맞아 조총련계 재일동포 720여 명이 부산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눈물바다가 된 가족 상봉 장면이 TV로 생중계돼 뭉클한 감동을 자아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재일동포 모국 방문은 민단과 조총련을 아우르며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됐다. 방문객은 이듬해 4월 한식(寒食)까지 7000여 명에 이르렀다.

조용필은 대중의 관심사를 자신의 노래에 담았다. 시대 정서에 맞게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개작과 편곡이 이뤄졌다. ‘님 떠난’을 ‘형제 떠난’으로 바꾸고, ‘보고픈 내 님아’를 ‘그리운 내 형제여’로 고쳤다. 여기서 형제는 재일동포를 뜻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개인의 감정이 담긴 가요에서 동포애가 흐르는 시대의 노래로 탈바꿈했다. 한국인이 가장 즐겨 부르는 애창곡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재일동포들에게도 ‘최애곡’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당시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이 대중의 관심사가 되고 국내·외에서 화제를 불러모은 까닭은 무엇일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어째서 재일동포들의 가슴에 먹먹한 전율을 일으켰을까?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일반적으로 ‘재일동포(在日同胞)’는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과 한국계 자손을 가리킨다. 재외동포청 현황을 보면 2023년 기준으로 총 80만2118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은 영주권자 33만7766명, 일반체류자 6만1720명, 유학생 1만2414명으로 도합 41만1900명이다. 일본 시민권자는 39만218명을 기록하고 있다.

좁은 의미로는 일제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이민가거나 강제로 끌려갔다가 광복 이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과 그 자손을 ‘재일동포’라고 일컫는다. 그들은 한민족의 뼈아픈 근현대사를 짊어지고 일본 땅에서 고난의 시간을 헤쳐왔다. 국적을 기준으로 세분하면 한국 국적, 조선적(朝鮮籍), 일본 귀화인으로 나뉘는데 모두 합쳐 약 70만 명으로 추산된다. ‘재일한국·조선인’ 또는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르기도 한다.

살 길 막막해진 농민들, 일본 사회 최하층으로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토목공사 현장에서 감시받으며 일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일본 땅에 조선인이 크게 늘어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1915년까지만 해도 재일조선인은 3만여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제가 강력히 추진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1934)이 민족대이동을 몰고 왔다.

토지조사사업은 지주의 소유권을 보장해줬지만, 소작농의 경작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상 대대로 도짓논을 부쳐 먹던 가난한 농민들이 경작지를 빼앗기고 생존 위기에 몰렸다. 산미증식계획은 조선 쌀의 일본 유출을 심화해 식량 부족과 쌀값 폭등을 불러왔다. 땅을 잃은 농민들은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머나먼 길을 나섰다. 북쪽 국경을 넘어 간도로 향했다. 남쪽 바다를 건너 일본에 들어갔다. 하와이, 연해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주린 목숨 움켜쥐고 멀리 쫓겨간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1920년대에 27만 명 가량 늘어나 1930년에는 약 30만 명에 이르렀다. 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최하층으로 파고들었다. 폐품수집 등 허드렛일에 종사하며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려고 애썼다.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살아남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일본은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 전쟁의 병참기지로 삼아 물자와 인력을 쥐어짰다. 공권력을 이용한 반강제 모집으로 일본에 건너가는 조선인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8년에 재일조선인은 약 80만 명으로 집계됐다. 그들은 공사판을 전전하며 궂은일을 도맡았다. 소작인, 직공, 하인 등 일자리를 닥치는 대로 구했다. 하지만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도 못 받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전시총동원 체제에 들어갔다.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정부가 인력과 물자를 마음대로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은 식민지 조선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1940년대에 접어들자 침략 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됐다. 전쟁을 도발하긴 했지만, 자원 부족을 절감한 일본은 사활을 건 총동원에 나섰다. 일본 인력을 끌어모아 최전선으로 내보내고, 그 빈자리를 식민지 노동력으로 채웠다.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일본의 군수공장, 탄광, 금속광산, 공사장 등지에서 노예처럼 일했다. 재일조선인이 폭증해 1945년 경에는 230만 명을 넘어섰다. 일제는 말로는 ‘일본 신민’이라면서도 민족적 편견을 조장해 조선인들을 핍박했다.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은 60만 명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돌아온 조선인들이 부산항으로 들어오면서 기뻐하고 있다. / 사진:부산시
“우리는 독일 총통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쓴 것과 같은 종류의 정책을 택해야 합니다. 법을 지키지 않는 모든 조선인을 어디 섬으로 끌고 가서 씨를 말려버려야 합니다. (중략) 서구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 민족이, 동양에서는 야마토 민족이 다른 인종들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야나가와 헤이스케 일본 법무대신이 1941년 6월 기자회견에서 밝힌 입장이다(데이비드 스즈키·오이와 게이보,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 조선인들은 고분고분하지 않다며 법무대신은 입에 담지 못할 독설을 퍼부었다. 저항하는 조선인은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 총통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을 본보기로 거론했다. 섬뜩하다.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청소의 참극이 어른거린다. 제국의 악의는 일본 사회를 물들였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 박해가 극심했다.

집을 빌려주지 않거나 가게 출입을 금하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불이 나서 뛰어온 사람들이 조선인의 집이라는 걸 알고는 모두 되돌아가 버렸다. 정거장 대합실에서 자리를 양보하라며 구둣발로 찼다. 이삭 줍던 조선 여인을 도둑이라 욕하고 발길질해 유산시키기도 했다. 고국을 잃고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일상적 비극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해방을 맞자 대부분의 재일조선인은 귀환을 서둘렀다. 이듬해 3월까지 약 150만 명이 돌아갔다(일본 후생성 조사). 귀국을 망설인 동포들도 적지 않았다. 고국에 돌아가도 경작할 땅이 없거나,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일본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이들도 있었다. 남북 분단과 이념 갈등으로 한반도 정세가 험악했던 상황도 우려가 됐다. 귀국했다가 6·25전쟁 때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이래저래 약 6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남았다. 그들이 오늘날 재일동포의 근간을 이루었다.

1952년 4월 연합국과 일본의 전후 처리를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됐다. 이에 따라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도 바뀌었다. 일본 정부는 자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일본 국적이 조약에 의거해 상실됐다고 선언했다. 재일동포는 모두 일반 외국인과 같은 처지가 됐다. 외국인의 체류를 허가하거나, 퇴거를 강제하는 권한은 정부에 있었다. 일본 정부가 재일동포의 거주권을 틀어쥐고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재일동포는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 전쟁이 낳은 존재다. 만약 과거를 반성한다면 역사적 경위를 살피고 책임 있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죄업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재일동포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동포들은 외국인 등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국적이었다. 고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였다. 국적란에 어느 쪽을 기입해야 할지 애매했다. 동포들은 그래서 ‘조선’이라고 썼다. 이른바 ‘조선적(朝鮮籍)’이다. 대한민국도, 북한도 아니다. 그저 조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의 권리를 억압했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복지 혜택도 빼앗았다. 1950년대 중반 동포들은 일자리가 없어 생활보호 대상자가 많았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생활보호 수혜자가 약 2만 세대, 8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에 대한 생활보호 지급을 중단해 극심한 생활고에 빠뜨렸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북한에서 솔깃한 제안을 했다. 1955년 2월 재일동포의 ‘귀국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북한으로 귀국하는 동포들은 생활을 책임질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대한민국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과시하고, 전쟁 피해 복구와 재건사업에 동원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955년에 설립된 조총련을 중심으로 재일동포 사회에서 ‘귀국운동’이 시작됐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의 검은 속셈


▎북송선 만경봉호가 재일동포들을 태우고 니가타항을 출발하고 있다. / 사진:국가기록원
일본 정부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재일동포의 귀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인들은 생활보호 비용도 많이 들고, 범죄율이 일본인보다 훨씬 높으며, 조총련의 영향으로 좌경화 우려가 큰 집단이었다. 경비 절감과 치안 유지를 위해 귀찮은 조선인들을 내보내는 게 이득이었다. 이에 따라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1959년 2월 재일조선인의 ‘귀환 업무’를 개시하기로 했다.

중재 역할은 적십자사가 맡았다. 일본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회는 1959년 8월 인도 캘거타에서 회담을 열고 협정을 체결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단은 ‘북송(北送)’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인도주의를 빙자해 재일동포를 북한으로 추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승만 정부는 ‘북송 저지 공작대’를 조직해 실력 행사에 나섰다.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한 공작원들이 북송선이 정박할 예정인 일본 니가타에 잠입했다. 그러나 이 과격한 공작은 일본 경시청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니가타 일본적십자센터 폭파미수 사건’이었다.

일본은 마침내 귀환 업무를 성사시켰다. 1959년 12월 14일 북한의 만경봉호가 재일동포 975명을 태우고 니가타항을 떠났다. 협정 만료시한인 1962년 11월 12일까지 7만7288명이 북한 땅에 발을 디뎠다. 일본 국적의 배우자와 자녀들도 포함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어머니 고영희도 1962년 10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북송선에 탔다.

그런데 북송 동포들 가운데 북한 출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원래 재일조선인의 90% 이상은 한반도 남쪽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왜 연고도 없는 북한으로 이주했을까? ‘사회주의 낙원’에 대한 환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생활고가 컸다. 일자리도 없는데 생활보호 지급까지 중단되니 일본에선 끼니를 잇기 힘들었다. 먹고살려면 북송선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이후 북송 동포들의 비참한 실상이 알려지면서 만경봉호 탑승객은 급격히 줄었다. 그래도 북송사업은 1984년까지 이어졌으며 모두 9만3339명이 이주했다.

같은 한국인, 더 큰 한국인


▎2018년 4월 3일 오후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북남 예술인들의 련환공연무대 우리는 하나’에서 조용필(왼쪽)이 열창하고 있다. /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1965년에 맺어진 한일기본조약은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에게 특별영주권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추방 위협에 시달려온 동포들에게 한국 국적 취득은 거주권의 보장을 의미했다. 게다가 재일동포의 원적지를 살펴보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와 제주도 출신이 많았다.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는 동포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1970년대에 이뤄진 재일동포 모국방문도 큰 호응을 얻었다. 대한민국의 발전상과 가족 상봉의 감동은 조총련계 동포들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조선적 대신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동포들이 더욱 많아졌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한몫 단단히 했다. 동포들은 어느새 노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타고 부산항에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다. 노래처럼 그리운 형제들을 외쳐 부른다.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2절)

최근에는 재일동포 사회에서 한국 국적 보유자가 조선적의 10배에 이른다고 한다. 재일한국인은 해외에 나갈 때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재입국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 재입국 신청 서류에는 여행 목적을 써야 하는데 동포들은 대개 ‘거주(Residence)’라고 적는다. 거주를 목적으로 여행하는 자, 난민이다(서경식, [난민과 국민 사이]).

재외동포청의 2023년 재일동포 현황을 보면 한국 국적과 조선적을 가진 영주권자가 33만7766명, 일본 국적을 보유한 시민권자가 39만218명이다. 재일동포가 4세까지 내려오며 일본 귀화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영주권자도 젊은 세대는 한국어를 못하고 한국 문화에 어둡다. 그렇다면 그들을 한국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국적은 본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언어와 문화도 자격요건일지언정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인이 같은 한국인인 것은 근현대 고난의 역사를 공유하며, 차별과 억압 속에서 함께 저항하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 역동적인 기억과 짙은 유대감이 한국인을 더 큰 한국인으로 만든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

202410호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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