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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103)] 남북한이 존경한 독립지사 단재(丹齋) 신채호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고 지조를 지키다” 

[대한매일신보] 논객과 고구려 현장 연구 등 민족운동 전념
임시정부 탈퇴 뒤 무정부주의자로 전향, 뤼순 감옥에서 옥사


▎윤석위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전 대표가 단재영각 앞에서 사당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1936년 2월 21일 중국 뤼순(旅順) 감옥. 한 항일 독립운동가가 죽음에 이른다. 옥고 8년째에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지 나흘 만이다. 뤼순 감옥 하면 사람들은 먼저 안중근 의사를 떠올릴 것이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는 이곳에 갇혀 있다가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사형이 집행됐다. 26년이 지나 뤼순 감옥의 악연은 다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으로 이어졌다.

가족은 단재가 쓰러졌다는 전보를 받는다. 부인 박자혜 여사와 아들 신수범, 친구 서세충이 급히 뤼순에 도착했다. 21일 오후 4시 20분 단재는 유언을 남기지도 못한 채 타국에서 옥사한 뒤 다음날 오전 11시 뤼순에서 화장됐다. 향년 57세. 2월 24일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성역에 도착했다. 선생은 다음날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생전에 살던 고드미마을 집터에 안장됐다.

8월 19일 35도 폭염 속 단재의 묘소를 찾았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를 이끈 윤석위 전 대표가 안내했다. 주변에 태극기가 펄럭였지만 방문객은 없었다. 묘소 앞에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다. 조건상 충북대학장이 쓴 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이 사람을 내려 무디어진 겨레의 넋을 일깨우고 흐려진 민족의 정신을 깨쳐 민족의식을 제자리 잡을 수 있도록 비바람 한평생을 지사(志士)로 사가(史家)로 석학 문호로서 역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묘역의 둔덕을 왼쪽으로 넘으면 널찍한 빈터가 나타난다. 묘소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기 전에 있던 곳이다. 그 아래가 사당이다. 사당 처마엔 ‘丹齋影閣(단재영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문을 열고 향을 피웠다. 영각 가운데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의자에 앉은 단재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오른쪽 벽면에는 단재의 상반신 사진이 걸려 있었다. 윤 전 대표는 “해마다 두 차례 선생이 태어나신 날 탄신제와 돌아가신 날 순국제를 여기서 올린다”며 “단재는 남북한 모두 존경하는 인물인데 지금도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고 안타까워했다.

인생 멘토도 친일 변절하자 단호히 의절


신채호는 대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에 할아버지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뒤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할아버지(신성우)는 부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둔 뒤 낙향한다. 이후 할아버지는 처가 문중의 훈장으로 초빙돼 일가족은 대전으로 이주했다. 단재는 그 시기 태어나 세 살 무렵 할아버지가 관직에 복귀하고, 아버지는 병이 나자 선대 고향인 청주 고드미마을로 돌아온다.

신채호가 여섯 살 무렵 할아버지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지금의 사당 자리 뒤편에 사숙을 열어 단재 형제를 비롯한 학동을 가르쳤다. 신채호는 10세에 행시(行詩)를 짓고 13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으로 불렸다. 신채호는 향리에서 더는 읽을 책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친구 신기선을 손자에게 소개한다. 신기선은 사상가이자 중추원 부의장이었다. 그의 천안 목천 집에는 장서가 많았다. 한문 전적은 물론 국내외에서 발간된 신학문 서적이 두루 있었다. 신기선은 시골 아이의 지적 호기심에 감동해 신채호를 서재에 자유롭게 출입시키고 장서를 읽도록 배려했다.

신기선은 그의 안목을 터 주었다. [단재 신채호 평전]을 쓴 김삼웅은 “여기서 신·구 서적을 접하고 학문의 지평을 넓히는 한편 학자, 대신의 경륜을 접하고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기회가 됐다”고 정리했다. 나아가 신기선은 1898년 19세 신채호를 성균관에 들어가도록 추천한다. 성균관에서 그의 열정과 능력은 주목받았고, 독립협회에 참여하며 전통 유학사상에서 개혁사상가로 과감한 방향 전환을 시도한다. 신채호는 이름이 알려지며 이제 서울 한복판에서 명사들과 나란히 자주자강(自主自强) 이론가로서 여론을 끌어간다. 그는 이후 성균관에서 박사를 받지만 관직 대신 계몽지식인으로 기울어가는 나라의 사회 현장에 참여한다. 언론과 사회단체, 사학 등의 길이다. 훗날 단재는 신기선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멘토였던 그와 결별한다. 사적인 정리와 공적인 의리는 다르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1905년 26세 신채호는 청주에서 위암 장지연을 처음 만난다. 그의 초청으로 단재는 민족지 [황성신문]에 입사해 항일 논객으로 첫발을 딛는다. 그는 그 곳에서 봉건적 인습을 청산하기 위해 단발을 결행하고 향리에서 한자무용론을 주장해 한때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1906년 [황성신문]이 폐간되면서 단재는 양기탁의 추천으로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된다. 그는 약 4년에 걸쳐 [대한매일신보]에 많은 글을 썼다.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적 지지를 받을 때는 관련 논설을 쓰고 스스로 성금을 냈다. 단재는 이 운동이 실패한 뒤에는 더 많은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또 시론이나 평론뿐만 아니라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의 전기도 썼다. 한민족이 유교에 젖어 문약에 빠진 것을 한탄하며 자강 영웅을 통해 국난극복 의지를 찾은 것이다. 이와 함께 휴간 중이던 국문 ‘가정잡지’를 속간해 여성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한반도 넘어 북방으로 역사 연구 영역 확장


▎신채호 묘역에 조성된 단재 선생과 부인 박자혜의 동상. 박자혜는 간호사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해 3·1운동에 참여했다. / 사진:송의호
단재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 재직 시절 시작된 민족사 연구는 망명 초기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그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민족주의로 전 국민을 일깨우는 ‘신(新)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했다. 윤석위 전 대표는 “[독사신론]은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이란 뜻이며 우리 역사의 강역을 한반도가 아닌 북방으로 확대하는 등 민족의 자부심을 심었다”고 강조했다. 부여와 고구려 주족론(主族論), 만주영토설, 임나일본부설 부정 등이 그것이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는 판권과 시설이 일본 통감부에 팔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단재는 통감부의 유혹을 물리치고 단호히 신문사를 떠난다. 신채호는 민족 언론인으로서 지조를 잃지 않았다. 그는 이어 집을 팔아 조씨 부인에게 논 5두락을 사준 뒤 부부의 연을 끊고 망명 준비를 서둘렀다.

1910년 한일병합 국치 4개월 전 단재는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망명길에 나섰다. 처음에는 안창호 등과 배편을 이용하기로 했으나 여의치 않아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신의주에서 배로 압록강을 건넌 뒤 중국 단둥에 도착했다. 칭다오로 이동한 것은 6월 초. 그는 그곳에서 망명한 신민회 동지들과 해외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했다. 이듬해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국권 회복을 목표로 광복회를 조직해 회장 윤세복, 총무 이동휘와 함께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노령(露領, 러시아) 광복회는 항일비밀결사로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두고 간도·회인현지회 등을 설치, 국내와 만주 일원에 회원 약 2만여 명을 둔 강력한 독립운동 조직이 됐다. 1912년 교민단체인 권업회 기관지로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단재는 주필을 맡았다.

이듬해 그는 임시정부 살림을 꾸린 신규식의 초청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 단재는 같은 집안 출신인 신규식의 집에 머물며 박은식·정인보 등과 박달학원을 세워 청년교육에 참여한다. 1914년에는 안희제·서상일 등이 단둥에서 대동청년단을 재조직하자 단장으로 추대된다. 그는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틈틈이 단원들과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한 만주 일대 고구려 유적을 1년 넘게 답사한다. 윤세복 등과 백두산에 올라 한국 고대 국경도 확인한다. 단재는 “집안현(集安縣) 유적을 한 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망명 전 [독사신론] 연재와 함께 고구려 정신을 새로 인식시켰다. 한국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시작이다. 그해 말에는 베이징으로 옮겨 도서관에서 독서하며 [조선사] 집필 구상과 저술에 전념한다.

1917년 단재는 조카의 혼사 문제로 밀입국한다. 망명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귀국이다. 그는 진남포에서 조카 신향란을 만난 뒤 서울로 잠입해 요절한 제자 김기수 대동청년단원의 집을 찾아 애도한 뒤 바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직후 상하이에서 신규식·홍명희 등 14인이 서명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임되자 임시정부와 결별


▎중국 뤼순 감옥 수감 시절의 신채호 선생 모습. / 사진: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19년 2월 단재는 만주 지린(吉林)에서 대한의군부가 주동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9명의 한 사람으로 동참했다. 3·1운동 직전이다. 4월에 그는 마침내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7월에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뽑혔다. 단재는 임시정부 조직 당시부터 서울 한성정부의 법통을 따를 것을 주장한다. 하여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사건을 들어 이승만 대통령 선임에 적극 반대했다. 단재는 이 뜻이 관철되지 않자 의정원 의원과 전원위원회 위원장직을 모두 사임한다. 임시정부 노선에 크게 실망하고 결별한 것이다. 대신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재건에 착수해 단장에 추대됐다. 1920년엔 이회영 부인의 주선으로 박자혜와 결혼해 베이징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박자혜는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간우회 사건을 주동한 인물이었다.

1922년 단재는 독립운동가 류자명의 주선으로 중국인 최초의 아나키스트이자 베이징대 교수인 리스쩡(李石曾)을 만나 교유를 시작한다. 그해 12월 그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상하이에서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한다. 이듬해 1월 마침내 선언문이 발표됐다. “조선 민족이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驅逐, 몰아서 쫓아냄)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 ‘조선혁명선언’은 식민지 현실을 해소, 타파하는 방법으로 폭력에 의한 민중혁명을 천명하고 있다.

1926년 단재는 대만인 동지 린빙원(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에 가입한다. 이 무렵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권력투쟁과 민족독립운동단체의 분열, 외교론(이승만)과 준비론(안창호)을 주축으로 하는 임시정부의 지도 노선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운동은 단재가 모색한 새로운 독립운동의 탈출구 같은 것이었다. 이듬해는 친구 홍명희의 요청으로 국내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으로 태동된 신간회의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파란만장한 항일 투쟁… 행동하는 아나키스트


▎1931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와 유고집 [조선사론]. / 사진:청주시
1928년 4월 단재는 톈진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서 적의 기관 파괴를 결의한다. 나아가 베이징 교외에 폭탄과 총기 공장을 건설하고 제조한 뒤 각국으로 보내 요인 암살과 건물 파괴를 도모한다. 자금이 필요해졌다. 이를 위해 대만인 동지 린빙원과 함께 위조와 환전을 기획한다. 일본으로 건너가 대만 지룽(基隆)항으로 가는 고슌마루(恒春丸)에 승선했다. 5월 8일 단재는 ‘유문상’이란 중국인으로 위장, 타이베이 지룽우편국 위체 창구에서 지급청구서에 서명하고 현금 수령을 기다리던 중 지룽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된다. 이른바 ‘외국위체위조사건’이다. 단재는 다롄으로 압송돼 형무지소에 수감된 뒤 1930년 징역 10년 형을 받고 뤼순 감옥으로 이감됐다.

단재의 파란만장한 항일 투쟁의 대강이다. 그는 일제 타도와 조국 해방을 위해 언론·민족사·의열단·아나키즘 등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광복 이후 그의 아나키스트 이력은 사상적 걸림돌이 돼 남북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임에도 합당한 대접을 못 받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늦었지만 이제 예우는 달라지고 있다. 우리 해군은 지난 4월 진해에서 3000t급 잠수함 신채호함 취역식을 거행했다.

단재는 항일에 뛰어들어 뤼순 감옥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단 한 번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다. 포은 정몽주의 단심(丹心)에서 취한 단재라는 아호 그대로 지조를 지킨 선비였다.

[박스기사] 단재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인가 아나키스트인가

자유주의자, 공동체주의자, 민족주의자로서의 무정부주의

신채호가 아나키스트로 활동한 시기는 1920년대이다. 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은 베이징대 교수였던 리스쩡(李石曾) 등 중국 아나키스트와 교류하면서부터로 본다. 단재는 1923년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다.

신용하 교수는 단재가 아나키즘으로 기운 것을 안타까워한다. “신채호는 3·1운동 직후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로 학문과 사상과 운동에 실로 거대한 업적을 냈다. 그런데 이후 무정부주의로 전환해 가장 미약한 흐름인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노선을 선택했다.”

한편 신일철은 신채호가 아나키즘적 투쟁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은 “투쟁 대상이 날로 강대해지는 현실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는 길은 테러리즘 등 비합법적인 폭력 수단의 행사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단재의 사상적 전환은 민족주의 한계를 극복한 민족해방운동으로서 아나키즘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 나라 약소 민족의 독립이라는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를 넘어 전 세계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향한다.

신채호는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천명한 바 있다. 단순한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주의자, 공동체주의자, 민족주의자란 주장이다.

- 송의호 언론중재위원 yeeho1219@naver.com

202410호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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