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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외교계 ‘왕따’로 출세가도 달려 

“아첨과 배신의 상징 인물 …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군 피해 10년 만에 톈진으로”
조선 개화기 100가지 경제풍경 ⑪ - 위안스카이, 조선 발판으로 대륙 집어삼키다
전봉관의 근대사 가로보고 세로읽기 

전봉관·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1916년 새해 첫날,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국호를 중화제국으로 개칭하고 황제에 등극한다. 1881년 경군통령(慶軍統領) 우장칭의 일개 막료로 출발한 그는 어떻게 35년 만에 청국 내각총리대신과 공화정 수반을 거쳐 제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위안스카이(袁世凱)는 1859년 허난성 샹청(項城)현에서 위안바오중(袁保中)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안씨 가문은 대대로 가난한 선비 집안이었지만, 그의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당숙이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면서 일약 샹청현에서 손꼽히는 명문가로 성장했다.



그의 증조할머니 궈(郭)씨는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까지 전당포에 맡기고 학식 깊은 학자를 초빙해 자식들을 가르치는 극성을 떨어 기어이 두 아들을 과거에 합격시켰다. 위안스카이는 다섯 살 되던 해에 숙부 위안바오칭(袁保慶)에게 입양되었다. 아들이 없어 여러 해 고심하던 위안바오칭은 양자를 얻고는 뛸 듯이 기뻐했고, 양자를 가문을 빛낼 인재로 키우기 위해 명망 높은 학자 두 명을 초빙해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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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호 (200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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