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주주권 강화하는 국민연금 - 한국판 ‘포커스 리스트(경영성과·주가·지배구조 평가해 감시 기업 선정)’ 등장할까?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지침 개정 …“독립적 사외이사 한 명이 기업 투명성 높일 수 있어”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지침을 개정해 이사 선임 등에 관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했다.



국민연금은 한국 주식시장의 ‘큰 손’이다. 어지간한 상장 기업의 주식은 다 가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주주총회에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정부가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민간 기업의 경영에 간섭한다는 비판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소극적이라 주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적절히 주주권을 행사해 기업가치를 높이고 수익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연금이 2월 28일 의결권 행사 지침을 개정했다. 재계의 반발에 밀려 횡령·배임 혐의를 받는 이사 선임에 대한 반대한다는 내용은 보류했다. 국민연금 주주권 강화의 필요성과 문제점 등을 짚었다.


국민연금이 부적격 이사의 선임에 반대하는 등 의결권을 좀 더 적극적으로 행사하기로 했다. ‘2014년 국민연금기금 의결권 행사지침 개정안’을 통해서다. 이 개정안은 2월 28일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의결돼 올해 3월 주주총회부터 적용된다. 우선 의결권 행사의 주체를 기금운용본부와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로 변경했다. 이전에는 투자위원회와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권 행사 여부를 판단했다. 더 자주 모이는 소위원회로 행사 주체를 바꾼 셈이다.

국민연금은 또 특정 기업에 10년 이상 이사로 재직한 경우, 이사회 출석률이 75% 미만인 경우에는 이사 선임에 반대할 방침이다. 재직한 임기와 앞으로 추가될 임기를 포함한 기간이 10년 이상 되는 장기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는 계열회사 근무경력까지 따지도록 해 낙하산 인사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했다.

‘이사 선임 때 횡령·배임 기업인 배제’ 내용은 보류

하지만 2월 24일 국민연금실무평가위원회에서 논의된 횡령·배임 기업인과 관련 범죄로 재판 중인 대기업 총수 등의 이사 선임에 대한 반대한다는 내용은 보류했다. 애초 이번 개정안의 핵심이란 평가를 받았던 내용이다. 횡령·배임 행위로 법원 1심 판결을 받는 시점 등 기준을 세우고, 이 같은 의결권 행사 방안을 사전에 공개한다는 구체적인 방침까지 마련했지만 이번 개정안에 포함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는 “노동계 인사 3명이 기금위에 참석하지 않아 추후에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재계의 반발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계획만 못한 개정안이지만 국민연금이 앞으로 더욱 주주권 행사를 강화할 것이란 관측엔 무리가 없다. 2008년 5.4%(109건)에 머문 국민연금의 주주총회 반대표 행사 비중이 지난해 10.9%(277건)로 늘어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강화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는 건 덩치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기금 규모는 설립 25년만에 400조원을 돌파했다. 일본 공적연금(GPIF), 노르웨이 글로벌펀드연금(GPFG)에 이어 세계 3대 연기금이다. 운용 규모는 현재 약 424조원이다. 이 중 약 84조5000억원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소유한 상장 회사는 218곳이나 된다. 포스코·KT·SK하이닉스·KB금융지주 등의 최대주주다.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의 경우 국민연금이 주식 7.43%를 가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3.38%)의 두 배 수준이다. 금액으로는 약 14조6000억원 규모다. 국민연금의 기금 규모는 2020년 847조원, 2030년 1732조원으로 급증할 전망이다.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현재 국민연금의 국내외 주식투자 비중은 2013년 약 30% 정도”라며 “장기적인 저금리 추세로 채권 투자의 수익성이 떨어져 주식 등 대체투자 비중을 늘리는 게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기업에 미치는 힘 역시 막대해지리란 예상이 가능하다.

국민연금의 이번 발표에 기업들은 대체로 차분한 반응을 나타냈다. 일종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최근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실제 실행 단계로 접어든 사례는 없었다. 국민연금이 대주주인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더라도 권리행사를 할 수 있는 건 주주총회뿐이고 주요 경영 전략을 결정하는 이사회가 별도로 운영되기 때문에 경영 자체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내부에서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KB금융지주 관계자는 “이미 금융당국으로부터 규제를 받아왔기 때문에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측은 “특정 주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공식적인 답변을 피했다.

지금까지 국민연금은 주주권 행사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가장 적극적인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기금(CalPERS)은 의결권 행사, 주주 제안, 포커스 리스트(기업의 경영 성과와 주가, 지배구조 등을 평가해 감시 대상 기업을 선정하는 것) 발표, 투자자연대, 입법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주주권을 행사한다.

반면 국민연금은 일부 주주총회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하는 정도다. 그 비중도 해외 연기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정부가 운영 주체인 국민연금이 민간 기업의 경영에 간섭한다는 쓸데없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지만 너무 소극적이라 정당한 주주의 권리마저 행사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연기금의 주주권 강화는 피할 수 없는 길’

국민연금은 포트폴리오의 대규모 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워낙 투자액 자체가 커서다. 운용 전략이 바뀌었다고 7.43%를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을 하루 아침에 매각한다면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준다. 장기 투자를 기본으로 하는 만큼 해당 기업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 손실이 발생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더 멀리는 기업 가치를 높여 운용 수익을 극대화하는 게 목표다. 그러려면 주주로서 기업이 올바른 경영판단을 하고 있는지, 이사 등 핵심 경영자를 제대로 선임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배임’이란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이 같은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기업 가치를 높이는 목적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2009년 국민연금 자체적으로 외부 연구용역도 진행했다. 전광우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주주권 강화 방안을 직접 언급한 적도 있다. 전 전 이사장은 2010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관투자자와 공동으로 주주협의회를 구성하고 이를 회사 경영진과의 공식 대화 채널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부 주인없는 상장기업 경영진의 무능과 전횡으로 주주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국민 노후생활자금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주주 권리를 적극 행사하는 방안을 마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독자적인 사외이사 인력풀을 만들어 주요 상장사에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하는 방안, 경영 성과나 지배구조 관행 등에 문제가 많은 기업에 대한 포커스 리스트 작성하고 공개해 경영개선을 유도하는 방안 등 구체적인 방법도 내놨다.




저배당 성향 기업에도 영향 줄 듯

또 다시 국민연금 주주권 강화가 거론된 건 2011년 4월이다. 미래기획위원회가 ‘공적 연기금을 통한 주주권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당시 곽승준 위원장은 “기업들이 기존 아이템의 효율화와 재무구조 안정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쌓아 놓은 내부 유보금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연결시키고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특히 포스코·KT 등 오너십이 부족한 대기업의 경우에는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에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항상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전 전 이사장의 인터뷰에 대해서는 “주주권 강화 관련 사안은 현재 아무것도 결정된 바가 없다”고 발을 뺐고, 곽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미래위에서 나온 방안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후로도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지만 법적·제도적 개선으로 이어지진 못한 채로 시간만 흘렀다.

신진영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수익률 제고가 가장 중요한 목표인 국민연금이 기업에 우호적이지 않은 경영 간섭을 왜 하겠느냐”며 “적법한 절차에 따라 주주권을 행사하고, 이를 통해 국민연금이 기업에 대한 건전한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주주권 강화 방안으로는 의결권 행사를 비롯해 주주제안·주주대표 소송 등이 있다. 주주제안은 일정 지분 이상을 보유한 주주에게 주주총회 의제를 제안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상법은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 총수의 100분의 1 이상을 보유한 주주(상장회사의 경우)에게 주주제안권을 준다. 보통 대주주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경영진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무기이자, 기업의 투명성 확보나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한 압박 수단이다.

미국에서는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를 중심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 사회·환경 관련 이슈 등에 대한 주주제안이 활발하다. 2005년 1월부터 2013년 6월 사이 S&P500에 포함된 338개 기업의 주주제안 건수는 3779건이다. 이 중 64.5%가 이사선임 방식 등 지배구조 관련 제안이다. 통과율도 23.25%나 된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는 “주주제안을 활용해 사외이사나 감사 후보를 제안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사외이사의 독립성 확보, 낙하산 인사 차단에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견제를 하려면 우선 이사회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대기업 이사진은 오너나 경영자의 측근으로 구성된다. 경영진을 감시하라고 뽑은 사외이사마저도 ‘거수기’인 경우가 많다. 특히 민영화된 공기업이나 금융지주회사의 경우 사외이사들이 반대표를 던지는 일 자체가 드물다.

국민연금이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의 선임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면 여러 면에서 경영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 사외이사 1명이 부당한 경영행위 등을 직접 제어하진 못해도 부당함을 감시하고 알릴 순 있다. 2012년 하나금융지주가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에 사외이사 추천을 요청한 바 있는데 인수합병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이유로 며칠 뒤 철회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사외이사 추천은 처음이라 업계의 관심이 컸다.

물론 자질이 없는 인사나 정권과 가까운 이사를 추천하게 되면 또 다른 ‘관치’나 ‘낙하산’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국민연금이 추천한 사외이사에겐 보수를 거의 주지 않거나 사회복지재단 등에 자동 기탁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경영 간섭의 소지가 없도록 애초에 사외이사 후보를 복수 추천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강화는 장기적으로 배당에 지나치게 인색한 우리 기업들의 성향을 바꾸는 데도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발표에 따르면 현금배당을 결정한 186개 상장사의 올해 평균 시가배당률은 1.75%에 그쳤다(이코노미스트 1226호 기사 참조). 지난해보다 0.32%포인트 낮아진 수치다. 현금배당금을 시가총액으로 나눈 배당수익률은 2012년 기준으로 1.03%에 그친다. 미국(2.01%)·영국(3.71%)·중국(3.64%) 등에 비해 훨씬 낮다.

지난해 3월 국회에서 열린 국민연금 주주권 관련 정책토론회에서 채이배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원은 “아직 배당 논의가 거의 없는데 꾸준히 캐시플로어(수익원)를 창출해야 하는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배당을 요구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독립 상설기구로 운용주체 분리해야

이에 대해 국민연금 관계자는 “배당 요구보다는 장기 성장을 위해 투자를 늘리도록 유도하는 방향이 더 맞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우려를 반영한 답변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과도한 배당금 압력을 걱정하고 있는데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관치나 과도한 배당금 요구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주식회사 시스템상 별다른 대응책이 없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답답해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민연금의 주주권 확대가 불가피한 추세라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모아지는 분위기지만 그 전에 부작용을 최소화 할 제도적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우선 정부가 국민연금을 운용하는 현 시스템에서는 아무리 중립적인 구조라도 정부의 기업 경영 개입이란 의혹의 눈초리를 피하기 어렵다.

정부는 지금도 포스코·KT 등 민영화된 공기업이나 금융지주회사 등의 CEO, 사외이사 선임에 관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라고 하지만 이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의 운용 목적은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수익성 제고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이를 벗어나 과도하게 민간 기업 인사와 경영에 간섭하는 건 기업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며 “실제 주인인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정권의 입맛에 맞춰 주주권을 행사하는 일이 없도록 확실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자체의 지배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운용본부를 독립시켜 정부와 거리를 두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국민연금 도입 단계부터 언급돼왔다. 운용본부와 기금운용위원회를 민간상설기구로 독립시키는 법안이 17대, 18대 국회에 연이어 제출됐으나 폐기됐고, 19대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논의 중이지만 통과는 미지수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운용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는데 의사결정 통제조직인 기금운용위원회나 관리조직인 기금운용본부 모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격”이라며 “연금의 금융적 특성을 고려해 운용기관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곽관훈 선문대 경찰행정법학과 교수는 “지금 국민연금은 정부 관계자와 각 이해단체자 추천인들이 모여 기금 운용에 대한 중요 사항을 결정한다”며 “해외 연기금처럼 운용을 전적으로 민간 전문가 집단에 맡기는 게 수익률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일단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지침을 개정하면서 동력은 다시 얻었지만 재계의 반발에 밀려 주주권 강화가 늘 소극적으로 마무리됐던 걸 돌아보면 추진에 속도를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신진영 교수는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자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대주주가 기업의 장기적인 가치 제고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기관투자자와 협력하는 건 전 세계적인 추세”라면서 “최근 웅진·STX·동양·LIG 등의 위기가 오너 중심의 독단적인 경영 판단에 기인한 점을 생각하면 적절한 균형자 역할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정당한 주주권 행사에 대해서는 기업들이 전향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1227호 (2014.03.10)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