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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 제도의 본고장 미국에선… 

CEO 출신 사외이사가 이사회 장악 

이해관계 얽매이지 않고 자율적 판단 … 사외이사 비율도 80%



세계 최대 생활용품 기업 P&G의 CEO였던 로버트 맥도널드는 경영을 맡은 지 4년 만인 지난해 5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경쟁사에 밀리고 신규 시장 개척에 실패해 회사 실적이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맥도널드를 전격 경질하고 전 P&G CEO 겸 회장인 앨런 조지 래플리를 구원투수로 불러들였다. 미국 재계에서는 이사회가 CEO를 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조차 자신이 데려온 이사들로부터 축출당해 회사를 나가야 했을 정도다. ‘거수기’라며 조롱을 받는 국내 기업의 사외이사들과 위상이 사뭇 다르다.

다양한 경험 쌓은 CEO의 실질적 조언

왜 글로벌 기업의 이사회는 힘이 셀까? 사외이사 제도가 가장 먼저 태동한 미국 기업을 보면 일단 수적으로 사외이사가 우세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주요 법인의 이사회 사외이사 비율은 80%에 이른다. 미국의 시가총액 상위 기업인 애플과 엑손모빌은 각 회사의 CEO 한 사람만(팀 쿡 애플 CEO,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 회장) 이사회에 속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외이사로 채웠다.

이와 달리 국내 기업 중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는 9명의 이사진 중 사외이사가 5명이다. 국내 상장 규정은 사외이사 비중이 이사회의 절반, 혹은 과반만 넘도록 정해져 있다. 규정대로만 사외이사 수를 채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과반수 정도만 사외이사 몫이다.

미국 기업은 이사회에서 CEO 선임과 해임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외이사의 입김이 강하다. 우리나라 역시 규정상으로는 이사회 투표를 통해 대표이사를 선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회사 정관에 따라서 주주총회에서도 대표이사를 선임할 수 있다. 전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조정실장은 “대부분의 국내 회사가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를 선임하고 이사회에서 해임을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상 이사회 권한의 상당 부분이 축소된 셈”이라고 말했다.

사외이사의 면면을 들여다봐도 차이점이 느껴진다. 애플의 이사진을 보면 앨 고어 미국 전 부통령에서부터 월트디즈니 CEO, 의류업체 제이크루의 CEO 등이 이름을 올렸다. 다른 주요 기업의 경우에도 회사 사업 영역과 관련 없는 업종의 경영인들이 사외이사로 경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맥 휘트먼 HP CEO가 몇 년 전까지 P&G와 드림웍스의 사외이사를 겸한 것처럼 다수의 기업에 이사로 참여하는 전문경영인도 많다.

우리나라처럼 대학교수나 전직 관료, 법조계 인사 일색이 아니라 다른 기업 전문경영인까지 인맥 풀을 넓혀놨다. 그러다 보니 여러 분야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조언을 주고 경영 활동을 감시하는 역할도 수월하게 해낸다. 문종진 명지대 경영대 교수는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가 경영에 참여해야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고 예방하며 조치를 마련하는 등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좀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사외이사 제도 운영에서 미국과 우리나라 기업은 큰 차이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경영활동에 대한 외부 감시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미국식 사외이사 제도를 강제적으로 도입했다. 현재 사외이사 제도는 상법과 자본시장법에 명시된 사항이다.

미국은 1940년대에 투자회사법에서 ‘이사회 구성원 중 40% 이상은 회사와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고 이후 1960년대부터 상장기업은 사외이사 선임을 의무화 했다. 사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경영진들은 자발적으로 사외이사 제도를 마련했다. 왜 외부 감시자를 스스로 경영에 관여하도록 만들었는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 기업 대부분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된다. 회사에 관련된 의사결정을 내리면 경영진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CEO는 경영상의 책임 부담을 덜고, 주주는 CEO를 견제·감시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사외이사 제도다. CEO가 내린 중요한 결정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주 가치에 손해를 끼쳤더라도 사외이사가 포함된 이사회의 검토나 동의를 받았다면 CEO 포함 경영진의 책임이 경감된다. 숙련된 경영인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투자자와 주주들로부터 신뢰를 얻기에도 좋다. 전재규 실장은 “CEO 입장에서는 경영의 위험 부담을 줄이며, 만약 사법적 책임까지 물어야 할 경우 이사회를 통과한 건은 경영진의 책임이 제한된다”고 설명했다.

이렇다 보니 회사는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성을 갖춘 사외이사를 엄선한다. 만약 경영진과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면 이사회가 제대로 된 견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고 시장에서 여기기 때문이다. CEO와 같은 학교 출신마저 꺼릴 정도다. 이들은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해 이사회 산하의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참여한다. 사외이사 제도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 GE는 경영개발, 보상, 과학기술, 회계, 위기관리 등의 소위원회에서 17명의 사외이사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매년 8회 이상 회의에 참석해 경영 전략과 사업 전망을 논의한다.

물론 미국이라고 사외이사가 전지전능한 건 아니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도 지분을 확실하게 보유한 오너 경영인이 있는 기업은 사외이사가 반발하기 쉽지 않다”며 “사외이사가 사업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져 거수기로 전락하는 현상은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CEO의 책임 부담 더는 장치로도 활용

독일·프랑스 등 유럽 국가는 감사 제도를 통해 경영진을 견제하고 사외이사 제도는 도입을 미뤄왔다. 전문성에 한계가 있어 판단을 그르칠 수 있고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최근 들어서야 유럽 국가에서도 사외이사 제도가 시행됐다. 독일의 상장기업은 업무집행기관인 경영이사회와 감독기관인 감독이사회가 이원적 이사회를 구성한다. 경영이사회는 전원 상임이사, 감독이사회는 근로자 대표를 포함한 비상임이사로 이뤄진다.

BMW를 예로 들자면 콴트 가문이 BMW 지분의 절반 가까이를 보유하고 있지만 감독이사회에 단 한 명만 참여하는 식이다. 이사회가 주주의 소유권을 대신한다는 미국 기업의 관점과 달리 독일 기업은 근로자 및 이해관계자가 기업의 소유주라고 본다. 결국 이사회는 근로자·채권자 등 여러 이해관계자가 경영을 감시하는 수단이라는 것이 독일식 관점이다.

스웨덴은 소액주주도 이사회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독일식 법 체계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사외이사 제도와 유사한 ‘외부감사 제도’를 운영한다. 2011년 일본에서도 사외이사 제도 도입이 논의됐지만 편익에 대한 논란이 많아 아직 시행하지 않고 있다.

1233호 (20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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