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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그룹 상장사 93곳 사외이사 338명 전수 조사 

권력기관·교수 출신, 10명 중 7명 

조용탁·문희철 이코노미스트 기자
전관예우 기대하고 로비 창구로 활용 … 롯데·한화·두산은 계열사 임직원 출신 뽑기도



사외이사 제도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1998년부터 국내 상장회사의 의무사항이 됐다. 대기업의 방만한 경영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로부터 16년. 사외이사 제도는 여전히 겉돌고 있다. 오너 입김이 강한 기업에선 ‘거수기’이기 일쑤다. 주인이 모호한 회사에서는 ‘그림자 권력’으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기업들도 이 제도를 악용한다.

사외이사를 로비 창구로 활용하곤 한다. 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금감원·사법당국 등 권력기관 출신이 사외이사가 많은 이유다. 기업이 다루기 쉬운 교수도 단골 사외이사다. 이코노미스트가 10대 그룹 상장사 93곳의 사외이사 338명을 전수 조사한 결과다. 경영진을 감시하고 조언하는 사외이사 본연의 역할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권력기관과 교수 출신이 대기업 사외이사 자리를 독식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올해 10대 그룹 상장사 93곳의 사외이사 338명을 전수 조사한 결과다. 교수 출신이 136명으로 단연 많았다. 법원과 세무 공무원 출신이 모두 81명으로 뒤를 이었다. 둘을 합하면 227명으로 3분의 2에 달했다. 기업인 출신은 49명에 불과했다. 미국 기업의 사외이사가 대부분 기업인 출신인 것과 딴판이다.

국내에 사외이사 제도가 처음 도입될 당시만 해도 이사회 구성이 이렇게 편향되진 않았다. 한국상장사협의회의 자료를 바탕으로 2004년부터 10년 동안 사외이사 직업을 분석한 결과, 제도도입 초기에는 절반 가량(45.4%)을 차지한 기업인 비중이 14.5%로 크게 줄었다. 이와 달리 교수 출신 사외이사는 21.2%에서 40.2%로 두 배 가량으로 증가했다. 법조 공무원이나 변호사 출신 사외이사 역시 9.7%에서 15.4%로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사외이사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 경영 전반에 조언과 지식을 제공하거나 경영활동을 감시해 회사에 도움을 주는 비상근 이사다. 증권거래법 2조 19항은 사외이사를 ‘당해 회사의 상무에 종사하지 않는 이사로, 증권거래법 54조4 혹은 191조16에 따라 선임된 자’로 정의한다. 사외이사는 이사회에서 상법상 사내이사와 동일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나아가 경영진을 견제하며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교수와 권력기관 출신이 늘며 본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기업에 대한 전문 지식과 경영 경험이 없는 사외이사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주요 안건마다 단순한 거수기 역할만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사외이사로 선임된 교수 가운데 전공과 무관한 기업 오너의 학교 동창도 적지 않다.


권력기관 출신의 증가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경영진 견제나 자문 역할보다 권력기관에 대한 민원을 해결하거나 정부 내 각종 위원회와 평가단을 통해 정책 로비를 하는 역할로 흐르기 일쑤다. 채이배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원은 “판·검사 출신의 법조인을 사외이사에 임명하는 건 회사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로비 창구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며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 출신을 사외이사로 임용할 때도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10년 사이 교수 출신 두 배로 늘어

실제로 기획재정부·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 등 기업과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이 많은 부처 출신이 10대 그룹 사외이사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10대 그룹 상장사 93개사가 올해 정기주주총회에서 재선임 또는 신규 선임한 사외이사는 모두 125명이다. 이중 정부 고위 관료나 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금융감독원·사법당국 등 권력기관 출신은 46명으로 전체의 36.8%에 달했다.

재선임을 제외한 신규 선임 사외이사만 따지면 이 비율이 더 높아진다. 전체 68명의 신규 선임 사외이사 가운데 41.2%인 28명이 권력기관 출신이다. 삼성카드는 양성용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현대건설은 박성득 전 감사원 감사위원을 영입했다. LG는 윤대희 전 대통령 경제정책수석비서관을, LG상사는 김정관 전 지식경제부 2차관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SK텔레콤은 이재훈 전 지식경제부 2차관을 영입했다. 롯데케미칼은 정동기 전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을 사외이사로 뽑았다.

올해는 특히 국세청 출신 사외이사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정부의 증세 방침에 갈수록 거세지는 세무조사에 대비한 것이란 분석이다. 새로 선임되거나 재선임된 사외이사 10명이 국세청 출신이다.

임성균 전 광주지방국세청장이 HMC투자증권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이승재 전 중부국세청장은 SKC에 자리를 잡았다. 박동열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은 롯데쇼핑, 윤종훈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은 한진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계열사 임직원 출신 사외이사도 늘었다. 롯데·한화·두산그룹의 경우 일부 사외이사가 전직 계열사 임직원 출신이다. 특히 한화그룹의 경우 상장사 전체 계열사 사외이사직 27개 중 30%에 달하는 8자리를 전직 임직원으로 채웠다. 한화케미칼은 8명의 사외이사 중 3명이 한화그룹 계열사 근무 경력이 있다. 정인현 사외이사는 한화이글스 대표였다. 한동석 사외이사는 한화에너지·한화유통·한화타임월드 등에서 근무했다. 재선임된 김영학 사외이사 역시 한화생명(당시 대한생명)에서 임원을 역임했다.

올해 신규 선임자 중 국세청 출신 증가 두드러져

신규 선임된 사외이사 중 일부는 아예 본인이 근무하던 기업의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한화의 노선호 사외이사는 한화에서 회계2팀장을, 오재덕 사외이사는 한화 부회장으로 근무했다. 오재덕 사외이사의 경우 한화그룹 퇴직임원 모임인 한화회 회장이다. 송규수 한화투자증권 사외이사도 한화증권에서 센터장으로 근무한 한화맨 출신이다. 이밖에 정진세 한화생명 사외이사는 한화건설에서, 홍남표 한화타임월드 사외이사는 한화호텔앤드리조트와 한화국토개발에서 각각 근무했다.

롯데그룹도 상황은 비슷하다. 롯데제과는 자사 생산본부장이었던 박재연 씨를 사외이사로 선임했고, 롯데칠성음료는 김광태 롯데삼강 전 영업본부장을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롯데쇼핑(고병기 사외이사)과 롯데케미칼(임지택 사외이사) 역시 롯데그룹 계열사 출신 임직원이 사외이사 자리를 차지했다. 두산그룹의 광고 계열사 오리콤도 한승희 전 두산 생활산업 의류BG 사장이 사외이사다.

이들 중 일부는 사외이사 선임 안건이 올라왔을 때 계열사 상근 임직원 경력 때문에 독립성 훼손이 우려된다는 소수 안건이 제기됐지만 묵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지수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변호사는 “상법 542조의 8 시행령 34조에 따르면, 최근 2년 이내에 해당 상장사의 계열사에 근무했던 관계자는 사외이사로 선임할 수 없는데 일부 대기업이 법률적 요건만 겨우 면해서 전직 계열사 임직원을 선임하는 경우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들은 계열사에서 일하면서 이미 경영진과 상당한 유대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사외이사(社外理事)는 말 그대로 회사 소속이 아니면서 경영에 참여하는 이사로 경영진이나 대주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회사에 적(籍)이 있던 사람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면 경영진이나 대주주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두산그룹의 박범훈 사외이사와 효성그룹의 최중경 사외이사 선임도 부적절하다는 논란에 시달렸다. 두산엔진은 박범훈 전 중앙대 총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중앙대 재단은 두산그룹이 운영한다.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도 효성 사외이사 선임과정에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경기고 동문이라는 친분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형사 사건에 휘말린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운영하는 기업의 사외이사를 공직자가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선임 철회를 주장했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사회가 제 기능을 하려면 다양한 배경의 인사가 들어와 쓴 소리도 하고 경영 자문을 해야 하는데 그런 기능이 거의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계열사 출신자 늘어 독립성 훼손 우려

사외이사 제도는 1998년부터 국내 상장회사의 의무사항이 됐다.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대기업의 방만한 경영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외이사 제도 도입을 권고했다. 그후 16년째를 맞은 사외이사 제도는 일정 규모 이상인 대부분의 기업이 갖춘 최고 의사결정기구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사외이사 제도가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는 게 중평이다. 재계가 교수와 권력기관 출신 인사들로 사외이사 자리를 채우는 것은 늘 반복된 일이지만 올해는 더욱 노골적이란 지적이나온다.

전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조정실장은 “사외이사가 재직 중에 투자자들에게 현저한 손해를 끼치더라도 특별한 법적·경제적 책임을 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사외이사 인재풀이 부족해 특정 회사에 손실을 끼치고도 다른 기업의 사외이사로 이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일부 교수는 사외이사를 부업으로 생각한다”며 “사외이사 평판 검증을 강화해, 사외이사의 의무와 책임에 충실하고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 사외이사로 선임되도록 제도를 강화해야한다”고 조언했다.










1233호 (20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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