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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년 <이코노미스트>로 되짚은 한국 경제 30년 ① 1994~1998년 - 정부·가계 흥청망청하다 외환위기 맞아 

OECD 가입하고 과소비 만연 … 본지, 외환위기 가상 시나리오 적중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OECD 가입 축하연을 하고 있다. 섣부른 개방화와 세계화는 외환위기의 씨앗이 됐다.



1994년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과 김영삼 대통령이 느닷없이 들고 나온 ‘세계화’와 ‘개방화’가 신년 경제 이슈였다. 정재석 부총리를 수장으로 2기 경제팀을 꾸린 YS 정부는 강력한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세계화와 개방화라는 어젠다는 매혹적이었다. 재계는 물론 언론계도 환영 일색이었다.

1994년 초 YS 경제 1년을 평가하는 본지 기사 역시 호평 일색이다. ‘정경 유착 고리를 끊고,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나 회복에 돌입했으며, 주요 제조업의 활력이 회복됐다’는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겉옷만 갈아 입는 식의 개방화 추진으로 한국 자본시장은 외국 투기 자금의 먹잇감이 됐고, 외채 급증, 외환시장 불안으로 이어졌다.

249호(1994년 7월) 커버스토리 ‘21세기 혁명-멀티미디어’ 기사는 지금의 IT 혁명이 얼마나 빨리 진행됐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 기사는 ‘당신이 완벽한 하드·소프트웨어·통신기능을 갖춘 미디어 PC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는 글로 시작된다. 컴퓨터로 TV도 보고, 음악을 듣고, 전화와 통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전망 기사다. ‘미리 가본 2015년 멀티미디어 사회’라는 기사는 지금 보면 촌스럽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상상 속 얘기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회사원 박씨는 회사와 연결 된 네트워크로 집에서 일한다. 저녁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동네 비디오숍을 가지 않고, VOD(주문형 비디오)로 원하는 영화를 마음껏 감상한다. 옆방에서는 아들이 유선 TV로 게임을 즐긴다. 친구와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게임을 각자 집에서 즐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컴퓨터로 신문을 읽고, 컴퓨터로 옷을 주문한다. 옷값은 즉시 은행계좌에서 결제된다.’ 당시는 삼성전자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256메가 D램 반도체가 화제가 됐던 때였다.

256호(1994년 9월)는 ‘주 5일 근무제 확산’이 커버스토리였다. 국내 대기업 중 가장 먼저 주 5일제 실시를 천명한 곳은 한라그룹이었다. 이 해에는 외국어 바람과 연봉제 확산, 컴맹 스트레스, 출산 제한 정책 변화, 중년 실직 등이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한편, 인터넷은 1995년 말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10대 히트 상품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1995년 초에는 ‘외환 자유화-유혹과 함정’이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는데, 섣부른 외환시장 개방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취지였다.

당시 본지가 제시한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 내용을 보자. ‘가상 1997년. 엄청난 핫머니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주가는 끝없는 대폭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선을 앞둔 정부는 돈줄을 더욱 풀었다. 물가는 폭등했다. 원화가 대폭 절상돼 수출 경쟁력이 급전직하했다. 길거리 곳곳에 실업자들이 웅성거린다. 외국 언론들은 일제히 남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단정했다.’ 실제로 1997년 말, 이 시나리오는 그대로 현실이 됐다.

이와 달리 289호(1995년 5월)에서 경제 전문가 11인이 장기전망한 ‘2010년 한국경제’는 상당히 빗나갔다. 경제 규모는 8위, 1인당 국민소득 3만4000달러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한참 모자라다.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세계 15위, 국민소득은 1인당 2만6000달러다. 북한과의 경제통합 진전으로 완전한 하나의 경제로 새롭게 태어난다거나,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부로 다시 태어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완전히 잘못 짚었다.

노태우 정권의 부정축재 파문으로 시끄럽던 1995년 말에는 한국 경제에 이상 징후가 뚜렷해 진다. 당시 본지가 전한 ‘경제긴급진단’은 이렇다. ‘기업 투자 마인드 위축, 경제성장률 하향 조정, 연말 특수 감감, 카드 주문량 작년의 절반, 부동산 수요 심리위축…’ 여기에 한양·유원건설과 재계 27위였던 우성건설이 부도나고 중소기업 부도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면서 위기감은 점차 고조됐다.

1996년 중순엔 김영삼 대통령이 경제팀을 강하게 질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본지는 ‘한국 경제 과연 위기인가’라는 특집을 꾸몄는데, 급작스러운 총체적 위기론이 오히려 위기를 부채질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전했다. ‘걱정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 총체적 위기나 외채 망국론이라는 얘기가 수도 없이 나왔지만 돌이켜보면 총체적 위기도 아니었고 외채로 망하지도 않았다.’

1995년 외환시장 개방 최악 시나리오 현실로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한국경제는 총체적 위기였고, 외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후에도 위기 진단은 안이했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박사는 본지 기고를 통해 ‘현재의 경기 수축이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심각한 불황으로 이어지거나 수 년 간 불황이 지속될 확률은 높지 않아 보인다’고 예측했다. 1996년 말에는 ‘한국의 외채 상환능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비율이 급속하게 늘지는 않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예측이다. 그만큼 수출이 신장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직까지는 외채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 때가 아니다’고 전했다.

1997년 초, 기어이 사고가 터졌다. 한보철강이 부도난 것이다. 외환위기의 전조였다. 본지에는 ‘실업 쇼크’ ‘감봉시대 오는가’ ‘구조조정 공포’ 등이 기획 기사가 이어졌다. 이후 삼미·진로·기아자동차 등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385호(1997년 5월)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제목은 ‘30대 그룹도 안심 못한다’. ‘요즘 사채 시장에선 30대 그룹 계열사 어음이라 해도 제대로 행세를 못한다. 30대 그룹 계열사 어음 중 3분의 1 정도가 사채 시장에서 어음 할인이 중단된 채 휴지조각이 돼버렸다는 게 사채시장 쪽 귀띔이다.’ 그러자 정부는 금융권을 압박해 대기업 부도를 미루는 정책을 내놨다.

동남아시아 국가에 이미 IMF 금융지원이 시작됐는데도 한국 정부와 언론은 낙관적이었다. 본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지는 일본 경제전문가들의 긴급 진단을 통해 ‘한국 경제가 불황의 마지막 터널을 통과 중’이라는 잘못된 분석을 내놨다. IMF 구제금융 신청 두 달 전인데, ‘외환위기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전했다.


▎1997년 12월 3일, 구제금융 협상에 합의한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와 임창열 부총리(가운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악수하고 있다. 한국 경제 굴욕의 날이다.



외환위기 직전 ‘과연 위기인가’ 진단은 빗나가

한국 경제는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가가 대폭락 사태를 빚으면서 국내 증시가 사상 최악의 붕괴 위기를 맞고 있다’, ‘외국인 주식 매도, 신용 잃은 게 결정타’ ‘구조조정 미흡으로 한국 경제 총체적 불안 평가’ 등의 긴급 기사가 실렸다. 기어이 한국 정부는 1997년 11월22일 IMF에 300억 달러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그 주에 발행된 본지 415호에서 훗날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박승 중앙대 교수는 이렇게 일갈한다. ‘기업이 쓰러지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한 나라가 부도를 내고 도산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더구나 개발도상국의 우등생으로 OECD에까지 가입하며 선진국 행세를 하던 우리나라가 그 지경이 됐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부도 기업을 인수한 꼴이 됐다. 외환위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1998년 초엔 ‘3월 대란설’로 떠들썩했다. 종금사의 2차 폐쇄 조치가 내려지고, 1997년 12월 한 차례 만기 연장됐던 기업어음 만기 도래가 다가오면서 일본 금융회사의 한국 내 자금 회수설이 확산됐다. 금리는 폭등했고, 부동산 시장은 폭락했다. 기업 도산이 이어졌고, 동화·동남·대동·경기·충청은행은 간판을 내렸다. 1998년 2월엔 정리해고 법안이 통과됐다. 당시 상황을 이코노미스트(435호)는 이렇게 썼다.

‘기업들의 정리해고로 대량 해고 사태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3월 말 현재 실업자 수가 138만명이라는 정부 공식 통계 발표와 함께, 연말까지 실업률 8%에 실업자 수가 20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 해 5월은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 중에 한 “5월 안에 살릴 기업과 죽일 기업을 판정해 처리하겠다”는 발언으로 재계가 요동을 쳤다. 이른바 ‘기업 살생부 파문’이다. 실제로 정부는 6월 55개 퇴출 기업 명단을 발표했다. 주가 300선이 무너졌다. 외환위기 책임론도 불거졌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외환위기 실상을 축소 보고했다는 혐의(직무유기)로 기소됐다(두 사람은 5년 간의 법정 공방 끝에 2004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는다).

기업은 물론 가계도 고통스런 한 해를 보냈다. 455호(1998년 9월)가 전한 현실은 이렇다. ‘공사가 없어 9개월 넘게 쉬고 있는 건설 노동자인 아버지와 집안 살림의 큰 몫을 하다 갑자기 힘들게 된 파출부 어머니. 이런 상황에서 하루빨리 취직해 살림을 꾸려가야 할 실업계고교 딸이 취업할 수 길은 막막하기만 한 것이 우리 이웃 가정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들이 버틸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1998년 ‘돈, 돈, 돈, 돈이 돈다’

유례없는 불황 속에서도 희망은 싹텄다. 1998년 말이 되면서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본지는 ‘U자형’ 회복에 무게를 실었다. 466호(1998년 12월) 커버스토리 제목은 ‘돈, 돈, 돈, 돈이 돈다’였다. 당신 분위기는 이렇다. ‘주가가 사상 최대의 폭등세를 보이면서 증권 객장마다 고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장롱 속 쌈짓돈은 물론 은행 예금, 투신사 수익증권 등을 해약하고 주식 투자에 나서는 분위기다. 심지어 퇴직금을 몽땅 싸들고 증권사를 찾는 퇴직자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부동산 시장은 지금 사두면 곧 뛴다는 기대로 아파트 분양시장에 사람들이 몰린다. 백화점은 IMF체제 진입 이후 1년 동안 볼 수 없던 쇼핑 열기로 뜨겁다.’

1238호 (20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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