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움츠러든 한국 기업 | 한국은 세계 M&A 시장의 변방? 

눈앞의 가격만 보는 ‘몸사리기 경영’ … 잇단 ‘승자의 저주’도 위축 요인 




국내외 경기가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매력적인 기업이 시장에 매물로 종종 나온다. 주요 글로벌 기업은 이를 놓치지 않고 사업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동종업계 경쟁사에 대한 적대적 인수를 시도하거나 선두권 기업끼리 합병을 하는 등 덩치 키우기에 한창이다. 구글을 필두로 주요 IT기업은 돈이 될 만한 기술을 가진 기업을 쓸어 담고 있다.

국내 기업은 정반대의 분위기다. ‘빅딜’을 찾아보기 어렵고 조직 단순화를 위한 계열사간 합병, 혹은 구조조정을 위한 계열사 매각만 줄을 잇는다. 기업 안팎에 돈이 넘치는 데 왜 지갑을 꽁꽁 닫아두고 있을까? M&A를 꺼리는 기업의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또 해외 기업의 M&A 동향과 일본 기업의 실패 사례도 분석했다.


“오너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임원들은 혹시 자기 책임이 될까 눈치만 보며 전전긍긍하고.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한 대형 식품기업의 인수합병(M&A) 자문을 맡았던 한 회계법인 관계자의 말이다. 회사가 원료 조달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해외농장 인수를 검토하던 때의 일이다. 경영진과 오너는 몇 달을 고심하며 차일피일 인수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임원들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니냐’며 불편한 기색이었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쓸 수 있는 현금도 넉넉하고 재무구조도 견실한 기업인데 이 정도의 리스크도 감수할 생각이 없다니, 솔직히 그 회사를 다시 봤다”며 “결국 그 회사는 농장을 사지 않았고 얼마 후 해외 기업에 우리 예상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 대기업의 CEO는 기업 오너 입장에서 말을 전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물건이 너무 비싸다 싶으면 지갑을 열지 않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요즘 기업이 (인수합병) 매물을 보며 비싸다고 느끼는 건 대상의 가치가 낮아서가 아니라 비관적인 시장 분위기 탓이 크다. 기껏 인수해도 수익을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업이 몸을 사리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외 M&A에도 적극 나섰던 국내 대기업이 요즘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13년 기업결합 신고 및 심사동향’을 보면 지난해 대규모 기업집단(대기업) 소속 회사의 기업결합 건수는 총 144건, 금액은 6조1000억원이었다. 2012년의 197건, 7조8000억원에 비해 확연히 줄었다. 그나마도 대기업이 조직개편을 위해 그룹 내 계열사끼리 합병한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외국 기업이 국내 기업을 탐내는 분위기다. BOA메릴린치 서울지점이 최근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주요 기업 최고재무 책임자(CFO)에게 M&A 의향이 있는지, 있다면 어느 지역의 기업인지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세계 주요 경제권 13곳 중 한국에 대한 관심도는 2012년 8위에서 2013년 4위로 올랐다. 실제로 지난해 외국 기업이 국내 기업을 인수한 사례는 41건으로 2012년 28건보다 크게 늘었다.

성장전략 부재 … 자신감 없으니 ‘일단 보류’

동북아 국가의 기업 분위기와 비교해보면 온도 차이는 더 뚜렷해진다. 중국 기업은 자금력과 국가의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 인수에 무서운 식욕을 드러내고 있다. M&A 규모에서 이미 일본을 제쳤다.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실적을 올린 일본 기업도 해외 M&A에 잰걸음을 이어 간다. 포화 상태에 이른 내수시장에서 벗어나 새 시장 개척에 나선 것이다.

이에 비해 국내 기업은 최근 몇 년간 M&A를 통한 확장보다는 내실을 다지기 위한 구조조정이나 조직 단순화 등 축소 지향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10대 그룹의 현금성 자산이 124조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이를 투자하기보다는 쌓아만 두는 실정이다. M&A 업계 관계자들은 “기업이 자신감을 잃고 위축됐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그럴 만한 게 M&A로 사세를 확장하고 새로운 산업 분야에 진출한 기업이 최근 줄줄이 경영 악화로 위기에 처하는 등 ‘승자의 저주’를 자주 목격한 탓이 크다. STX그룹은 과도한 빚으로 사세를 확장하다가 주력 사업 실적이 악화되며 그룹이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웅진그룹은 극동건설을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얹어 지나치게 비싸게 인수했다는 평을 들었는데 건설 경기가 악화되면서 결국 그룹이 법정관리에 이르렀다.

대우건설 인수 이후 재정난에 시달리다 3년 만에 재매각을 결정한 금호아시아나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어려움에 빠진 그룹이 일부 계열사를 내놓으며 구조조정에 나서도 잠재적 매수자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공기업 성격이 남은 민간기업도 움츠러들긴 마찬가지다.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시중은행이나 포스코, KT등 정부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는 기업은 경영자가 사퇴하는 과정에서 M&A를 비롯해 경영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 많았다”며 “후임 경영자는 아무래도 M&A에 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게 된다”고 말했다.


경제환경의 불확실성 역시 걸림돌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후 벌어진 일부 그룹의 부실화와 와해,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목격하면서 대외 환경 변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영향, 중국 경제의 연착륙 여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 등을 꼽을 수 있다. 한 외국계 증권사의 기업금융 부문 대표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경제 환경에서 어느 기업이 투자를 하겠느냐”며 “좋은 매물이 많은데 비해 적극적인 매수자가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인수 후 통합 과정의 경험도 부족해

국내 대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도 많다. 오너의 의지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조직문화가 오히려 M&A에는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국내 경제가 성장 일로를 달리던 1970~80년대는 대기업 오너의 주관에 따라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M&A를 감행하며 사세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저성장시대, 세계 경제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예측가능성이 작아진 요즘에는 오너의 직관에만 의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요즘은 오너들도 M&A 실패로 기업이 큰 타격을 입는 것을 목격한 터라 ‘일단 보류’하는 분위기다. 안진딜로이트 홍순재 이사는 “객관적이고 계량적인 분석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예측해서 인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직 시스템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이 결정하고 책임지는 문화는 기업인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현실에 안주하게끔 만들고 도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한다. 법무법인 세종의 장재영 변호사는 “대기업 계열사는 해당 기업 임원과 CEO 보고는 물론 그룹 지주사를 거쳐 오너까지 복잡한 보고 체계를 거쳐야 하는데 좋은 매물을 빨리 선점해야 하는 M&A 시장에서 대응이 느려 놓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2008년 이전까지 주로 해외 자본·기업이 국내 기업을 사들였다면 금융위기 이후에는 국내에서 해외 기업을 사들이는 경우가 늘었다. 특히 IT·제조 등 국내 기업이 원천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분야는 해외 기술 기업을 인수해 핵심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어떤 기업이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그중 어떤 기업이 매물로 나왔는지 M&A 관련 정보 자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알짜 기업은 해외 현지 기업이 대부분 소화해버린다. 발품을 팔며 해외 사정을 파악하고 다니기에는 대기업 내부 역량이 부족하고 언어적 장벽으로 정보 접근이 쉽지 않다. ‘한국은 사실상 세계 M&A 시장에서 변방국가’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오는 이유다.

M&A에 대한 사회적 반감도 악영향

국내에서 동종업계 회사를 인수하려 해도 벽이 존재한다. 최근 한 식품 대기업은 소규모 동종업체를 하나 인수하려다 불발에 그쳤다. 해당 회사의 생산 품목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돼 인수합병 하면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기업의 시장 독점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면서 시장에서 확장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분위기다. 대기업 관계자는 “가뜩이나 M&A에 반감이 큰 사회인데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다”고 말한다. 장재영 변호사는 “국내 기업이 눈치 보느라 인수 못한 회사를 외국 기업이나 자본이 가져간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내 대기업이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가장 큰 원인은 역시 ‘M&A 실패 사례로 인한 자신감 상실’이다. 특히 해외 기업인수에 뼈저린 실패를 많이 겪었다. 왜 해외 M&A는 성공하기 힘들까? 흔히 시장가치보다 너무 높게 책정된 인수가격, 과도한 차입금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런 난관을 잘 헤치고 나갔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투자은행과 자문사 등 업계 관계자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대기업 관계자들이 M&A에 관련해 가장 골머리를 썩는 이슈는 인수합병 후 통합과정(PMI:Post Merger Intergration)”이라고 말한다. 두 회사를 하나로 합치면서 겪는 진통이 예상보다 크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그룹 차원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획일적 조직문화를 강조하는 반면 인수된 해외 기업은 보다 독립적인 경영을 원해 합병 초반 불협화음을 겪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시너지 효과를 내기는커녕 조직 통합에 실패해 컨트롤이 어려워지는 상황까지도 발생한다. 보수적이고 경직된 기업문화가 새로운 조직과 융화하는 과정이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다.

대내외적 악조건과 숱한 실패 사례에도 기업이 좋은 매물을 노려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수 시장에서의 한계에 봉착한 기업이 해외 시장을 노리거나 성장동력이 될 새로운 분야로 진출해야 하는데, 성공적인 인수합병이 왕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시너지 효과를 내거나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큰 좋은 매물을 얻기 위해서는 ‘물건값’만 가지고는 어림없다. 좋은 기업을 발굴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인수하기 위한 ‘기타 투자비용’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시장을 꾸준히 조사하고, 관련 지식과 노하우가 풍부한 인재를 육성하거나 스카우트하는 등의 투자가 이뤄져야 내부 역량도 기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은 역량 강화를 위한 투자는커녕, 인수합병 과정에서 당연히 드는 자문료 등의 비용마저도 아끼는 행태를 보인다.

법무법인과 투자은행, 회계법인 등에 지불하는 수수료에 대해 할인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세계 M&A 시장에서 유명하다. 한 투자은행 관계자는 “일하는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지불하는 고객사에 더 많은 신경을 쓰지 않겠느냐”며 “큰 규모의 인수합병은 기업의 명운이 달렸는데 비용을 아끼려다 소‘ 탐대실(小貪大失)’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1244호 (2014.07.0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