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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아이디어로 벤처 창업 전범이 되다 

대만 출신의 컴퓨터 엔지니어 … 웹디자이너와 결합해 소비자가 생산자 되는 사이트 만들어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스티브 첸 유튜브 창업자.

People 글로벌 파워피플 63 스티브 첸 유튜브 창업자

#1. 세계적인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YouTube)에는 지난 8월19일 끔찍한 동영상이 하나 올랐다. 이라크와 시리아 일대에서 활동 중인 이슬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서방을 비난하며 미국인 기자 제임스 폴리를 참수하는 장면이다.

IS는 8월28일 쿠르드족 민병대로 지목된 포로를 같은 방식으로 처형하는 장면을 유튜브에 내보내며 쿠르드족이 미국에 협조하면 포로를 계속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빼놓지 않았다. 8월30일에는 시리아-레바논 국경에서 생포한 레바논 병사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유튜브에 공개하며 IS인사를 석방하지 않으면 레바논군 포로를 추가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9월2일 에는 8월19일 유튜브 동영상에서 다음 처형 대상이라고 공개했던 미국인 기자 스티븐 소트로프를 살해했으며, 이 동영상에서 다음 살해 대상이라고 지목했던 영국인 구호요원 데이비드 헤인즈를 살해하는 동영상을 9월13일 각각 공개했다. 9월18일에는 인질인 영국인 존 켄틀리 기자의 동영상을 공개하며 IS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주장했다.

IS가 동영상 공유사이트인 유튜브를 서방 비난과 공포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미디어전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서방은 IS의 미디어전, 사이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평가다. 전 세계 어디에서든 동영상을 올리고 볼 수 있는 유튜브에는 사이버 익명성이 있어 추적이 쉽지않다.

#2.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에서 인질을 잔혹하게 살해한 복면의 남자는 영국 런던 동부(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 인도계 무슬림 이민자가 많은 서민 지역) 억양의 영어를 사용하며 8월8일 시작된 미국의 IS에 대한 공습을 비난했다. 영국은 계층·지역에 따라 영어 억양이 다양하기 때문에 목소리만 듣고도 해당 인물의 출신 지역과 교육 수준, 사회적 신분을 파악하는 음성범죄학이 발달했다.

이로 인해 파키스탄·방글라데시·예멘 등 무슬림 국가에 뿌리를 두고 영국 등 서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방국가 국적의 무슬림 수천 명이 IS에 참가해 서방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새롭게 국제문제가 됐다. 시리아나 이라크 등에서 잔인한 경험을 쌓은 이들이 본국으로 귀국할 경우 서방의 테러 위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문제의 인물이 영국 억양을 사용하는 것이 확인되자 휴가 중이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총리는 급히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귀환해 긴급 안보대책 회의를 열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휴가지인에서 일시 백악관으로 귀환했다. 영국은 최다 3000명, 독일도 400명 정도의 국민이 IS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튜브가 전해준 정보가 영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에 새로운 위협을 파악하게 해준 것이다.

#3. 2010년 7월 저스틴 비버는 ‘베이비’라는 노래를 부르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다. 최근까지 7억회 이상 재생됐다. 무명 가수이던 그가 세계적인 가수가 된 것은 유튜브의 힘이 컸다. 한국의 싸이도 마찬가지다. ‘강남 스타일’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메이저 음반사의 유통망이 아니라 가수와 팬이 직접 만날 수 있는 유튜브 덕분이다. 싸이는 유튜브 스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렇듯 모든 길은 유튜브로 통하는 세상이다. 테러 단체가 정치 선전을 하며 공포를 확산하는 수단도, 인터넷 스타 탄생도 유튜브를 통해야 한다. UCC(사용자 제작 콘텐트)는 강력한 이미지로 보는 이의 뇌리에 선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UCC 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매체의 대명사가 유튜브다. 유튜브는 21세기를 상징하는 매체이자, 사이버 공간이 됐다. 유튜브는 공기처럼 우리의 삶에 필수재로 자리잡고 있다.

세계 최대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를 세상에 내놓은 인물이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첸(36)이다. 중국명은 천사쥔(陳士駿)이다. 인터넷결제 시스템을 만든 페이팔에서 일하던 첸은 2005년 직장동료이던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과 함께 유튜브를 설립했다.

IS의 참수 영상으로 다시 관심

유튜브 창업은 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2005년 봄 샌프란시스코의 친구 집에서 모임을 열었던 그는 행사에서 함께 찍은 동영상을 참석자들에게 전달해야 했는데 문득 일일이 보내기가 귀찮아졌던 것이다.한 군데에 동영상을 올려 서로 공유할 수 있다면 간단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동영상 공유사이트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됐다.

유튜브의 이러한 창업 스토리는 실리콘밸리에서 하나의 신화이자 창업의 한 전범을 만들어 준 것으로 평가 받는다. 대단한 계기를 통해 엄청난 아이디어를 창안해 온라인 기업을 창업하는 것이 아니고,우리 생활 주변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지속적인 혁신으로 비로소 모든 사람이 찾는 엄청난 글로벌 IT업체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의 창업에는 첫 직장인 이베이에서의 생활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같은 엔지니어인 자웨드와 함께 창업 초기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을 맡았다. 채드는 감각적인 화면을 만들 줄 아는 웹 디자이너였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힘을 합치면 인터넷 사이트는 날개를 달게 된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의 결합은 실리콘밸리에서의 전형적인 창업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시스템은 첸의 성장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 받는다. 1978년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태어난 스티브 첸은 8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일리노이주에 정착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암기만 강요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며 문제와 해결법을 찾는 데 무관심했던 대만의 교육 방식으로는 유튜브 창업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점수가 아닌 창의력 향상에 주안점을 뒀던 미국의 교육 방식 때문에 그는 어려서 컴퓨터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학 명문인 어버나샴페인 일리노이대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그는 주로 독학으로 컴퓨터를 공부했다. 공대생의 교양을 넓히기 위한 역사와 철학 과목을 열심히 들으며 인문학적인 교양도 쌓으며 상상의 폭을 넓혔다. 그런 그를 강하게 유혹한 것이 실리콘 밸리였다. 욱일승천하는 IT산업의 심장부인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창업하며 성공으로 달려가는 것이 그의 꿈이 됐다.

1999년 11월 실리콘밸리로 날아간 그는 전자결제 기업인 페이팔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며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맡았다. 그는 여기서 페이팔의 독특한 시스템을 익혔다. 관리자가 거의 없이 실무자가 주도하는 시스템이었다. 사이트를 운영하는 엔지니어가 업무를 주도하며 여

기에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웹디자이너가 바로 옆에서 결합해 업무의 효율을 높였다. 엔지니어가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즉각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이를 웹디자이너가 사이트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의 긴밀하고도 즉각적인 시너지 효과는 일의 속도와 효율을 높였다. 의사결정도 빠를수밖에 없다. 아이디어가 현실화하는 데 1주일 이상 걸리는 법 이 드물었다. 아이디어를 방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기술이나 디자인이 부족해 실패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IT기업의 속도전’이 가능해지는 스타일이었다.



엔지니어+디자이너 시스템에 매료

이런 시스템 아래에서 모든 직원은 아이디어의 실현은 물론 그 아이디어가 어떻게 매출과 이익으로 연결되는지까지 즉시 파악할 수 있었다. 모든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회사가 돌아가는 전체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직원이 주인인 기업 운영 시스템이었다. 전체 직원이 자발적으로 밤을 새우면서 일에 푹 빠지고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첸은 물론 거의 전 직원이 언제 창업을 해도 즉각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달리 말하면 창업사관학교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페이팔은 항상 떠들썩하고 신나며 창의적 아이디어로 가득 찬 즐거운 직장이었다.

하지만 페이팔은 상장 5개월 뒤인 2002년 7월 이베이에 팔렸다. 그 뒤 최고경영자 맥스 레브친, 부회장 리드 호프먼을 비롯한 페이팔 경영진은 회사를 떠났으며 기업 문화가 확 바뀌었다.

엔지니어보다 관리직의 발언권이 강해졌고 경영진은 현장 개발자의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페이팔의 혁신적인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대접 받지 못하는 기업문화에 실망해 스스로 짐을 쌌다. 당시 창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결합한 유튜브의 창업은 토론으로 시작됐다. 한 달이 넘는 동안의 토론을 통해 누구나 사용하기 쉬우며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되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를 만들기로 하고 이 사이트에 ‘유튜브’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튜브라는 이름은 하루 만에 나왔다. 당신 또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유(You)와 텔레비전을 의미하는 튜브(Tube)를 결합해 모든 사람, 또는 바로 당신이 시청자 겸 제작자라는 뜻을 강조했다. 이는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는 ‘프로슈머(prosumer)’ 시대에 걸맞은 이름으로 평가 받았다. ‘www.youtube.com’이라는 도메인은 이미 누군가가 등록해 놨기에 2005년 2월 14일 이 도메인을 구입했다. 2005년 4월 23일 ‘동물원에서’라는 이름의 19초짜리 동영상을 자웨드가 올리면서 유튜브가 출범했다.

2005년 6월 이들은 유튜브의 동영상을 다른 곳에 얼마든지 ‘퍼나르기’ 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됐다. 콘텐트를 공개하고 분배하면서 사이트가 더욱 커진 것이다.

이를 통해 유튜브 동영상은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됐다. 유튜브를 통해 다른 사이버 커뮤니티에 확산하는 동영상에는 유튜브라는 마크와 링크 주소가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동영상을 공유하는 사이트는 삽시간에 전 세계에 빛의 속도로 전달하고 전파하고 퍼나르는 미디어로 진화했다.

구글이 운영하는 벤처캐피털로 다시 돌아와

유튜브는 매달 이용자가 두 배로 불면서 사용자의 절반 이상이 미국 밖에서 나오는 글로벌 미디어로 성장했다. 유투브는 창업1년 만에 구글과 야후로부터 동시에 인수를 제안 받았다. 양측 대표를 모두 만나본 첸은 수많은 자회사가 모기업의 지시를 받는 수직적인 분위기의 야후보다 수평적이고 기술지향적인 기업문화를 가진 구글을 선택했다. 유튜브는 창업 1년 여 만에 구글에 16억5000만 달러(1조6000억원)에 팔렸다. 전 세계 벤처업계의 신화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첸은 그 뒤로도 유튜브를 떠나지 않고 2009년까지 구글에서 유튜브를 글로벌 서비스로 키우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 왔다가 구글코리아 마케팅 매니저였던 박지현씨를 만나 결혼했다. 2009년 창업을 위해 구글을 떠났던 그는 최근 구글이 운영하는 벤처캐피털 ‘구글벤처스’로 돌아와 일하고 있다. 그가 앞으로 어떤 벤처를 길러 세상을 바꿀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1254호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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