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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사 전수 조사 | 소리 없는 구조조정 - 상장사 10곳 중 4곳 사람 줄였다 

덜 뽑고 더 내보내는 기업 늘어 외환위기 때의 전면적 구조조정과는 다른 양상 

국내 기업들이 사람을 줄이고 있다. 장기 불황이 결국 인력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과거 구조조정과 다르다.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한꺼번에 실업자가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티나지 않게 조용히, 그러면서 전 산업으로 퍼지고 있다. 이른바 ‘소리 없는 구조조정(silent restructuring)’이 확산 중이다. 소리 없는 구조조정은 일시적 충격은 덜해 보인다. 그러나 정부나 가계가 대책·대처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산업계 전반으로 조용히 번져가는 구조조정 현황을 취재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보고….” ‘내년에 인력 구조조정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국내 주요 기업 인사 담당 임원이나 실무진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한 대기업 임원의 말이 진실인지 모른다. “계획이 있어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바로 뉴스가 되고 조직이 동요할 텐데….”

사실 ‘상황을 볼’ 필요도 없다. 이미 인력 구조조정은 금융권을 넘어 전 산업으로 확산 중이다. 과거 외환위기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많은 기업이 일시에 대규모로 감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기업별로 조용히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KT나 LG디스플레이·삼성생명처럼 드러나게 대규모 감원을 단행한 곳도 있지만, 많은 기업은 덜 뽑고 더 내보내는 방식으로 고용을 줄이고 있다. 이른바 ‘소리 없는 구조조정(silent restructuring)’ 이다.

본지가 상장사 1682곳을 전수 조사한 결과, 올 상반기 기준으로 687곳의 직원수가 전년 대비 줄었다. 무려 41%다. 다양한 업종에 포함된 이들 기업에서만 1년새 5만 명 넘게 줄었다. 1년 전보다 3만 7000명이 준 금융·보험 업계 인력 구조조정이 다른 산업에서도 광범위하게 진행됐다는 얘기다. 우량 기업이 밀집 한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100대 기업 중 39곳이 고용이 줄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제외하면 100대 기업에서만 5100명이 감소했다.

국내 기업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감원을 자제했다. 2008년 4분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4.5%로 떨어지고 수출이 대폭 줄어도 버틸 힘이 있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국내외 경제 장기 불황으로 한계를 드러내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만성적인 내수 부진에 수출 환경까지 나빠지면서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감원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국의 주력 산업이 정체 단계에 접어들었고, 많은 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이다. 일부 대기업이 오너 리스크와 후계 구도 문제, 미래 불확실성 등으로 대규모 투자를 보류한 것도 고용 시장에 악영향을 줬다. 노동조합의 세력 약화와 비정규직 확대도 인력 구조조정이 만연하게 된 한 원인이다.

무엇보다 한국 경제와 기업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게 우려스럽다.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 3분기 우리 나라 경제성장률은 0.9%에 그쳤다. 4분기 연속 0%대 성장이다. 수출은 전 분기보다 2.6% 줄고, 설비투자는 0.8% 감소했다. 당연히 기업들이 버는 돈도 줄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상장기업 경영분석’에 따르면 올 2분기 상장사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 가까이 감소했다. 2009년 3분기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이다.

경제 심리도 개선될 조짐이 안 보인다. 한은이 조사한 ‘9월 기업 경기실사지수(BSI) 및 경제심리지수(ESI)’에 따르면 제조업 업황 BSI는 ‘74’에 그쳤다. BSI가 ‘100’ 이하면 경기를 부정적으로 전망하는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많다는 뜻이다. 제조업의 10월 업황 BSI는 72, 11월 전망BSI도 74에 머물렀다. 비제조 업 11월 업황 전망BSI는 67로 전월 대비 7포인트나 하락했다.

2012년 건설업계, 2013년 금융권으로 전이된 감원 칼바람은 내년에 더 매섭게 불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최근 기업 1182개사를 대상으로 ‘구조조정 계획 유무’를 조사한 결과 35.5%가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기업 규모별로는 대기업이 39%, 중소기업 35.8%, 중견기업 29.9%였다. 내년에는 ‘권고 사직·명예퇴직·정리해고’ 등이 언론을 장식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또한 조사 대상 중 18.1%는 ‘이미 구조조정을 실시했다’고 답했다. 이는 본지가 상장사를 전수 조사한 결과와 유사하다. 본지 조사 결과 상장사 중 전년 대비 직원수가 20% 이상 줄어 사실상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한 곳은 135곳에 달했다.

1260호 (201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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