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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 피플 [77]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 - IT혁명 불 붙인 세계 최고의 부자 

올해 MS 창업 40주년 기술고문 역할과 개도국 지원사업에 집중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
‘세계적인 기업’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올해로 창업 40주년을 맞는다. 40년 전 친구 폴 앨런과 함께 MS를 창업한 빌 게이츠 3세(60) 창업주 겸 기술고문은 지난 40년 간 전 세계 정보기술(IT) 혁명의 선두에 섰다. 그러면서 전 세계의 명예란 명예를 온통 독점하다시피 해왔다. 우선 그는 컴퓨터 운영체계(OS)인 MS-DOS와 윈도즈를 개발해 개인컴퓨터(PC) 시대를 선도한 창의적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를 통해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았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정보기술(IT) 시대의 상당 부분은 게이츠의 창의력과 열정 덕분이다.

그는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약관 20세에 벤처기업 MS를 창업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키웠다. 그가 경영인으로도 성공한 과정은 전 세계 기업인·엔지니어의 신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IT가 세계를 변화시키고 이끄는 주류 비즈니스가 되고 벤처로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게이츠는 그들의 영웅이 됐다. 젊은 시절 맨손으로 창업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과감한 도전을 통해 성공을 거둔 그의 진취적인 삶은 전 세계 벤처 기업인의 벤치마킹 대상 1호가 됐다. 그는 강연을 통해 그들의 멘토를 자처했다. 교육 분야에서도 ‘빌 게이츠 같은 창의적인 재능 키우기’가 숙제가 됐다.

그는 사업 성공으로 개인 재산이 세계 1~2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에 따르면 2015년 1월 현재 그의 재산은 811억 달러로 멕시코의 카를로스 슬림에 이어 세계 2위다. 그는 이 재산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기부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쓰는 것이다. 특히 부자들은 재산을 최소한도로만 상속하고 나머지는 기부하자는 운동에 앞장서 ‘개념 있는 부자’로 존경 받고 있다.

‘개념 있는 부자’로 세계인의 존경 받아


▎지난 2011년 인도 파트나 인근 교외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빌 게이츠 부부.
그의 기부는 독특하다. 기부를 하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현금이나 혜택을 나눠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위한 노력에 돈을 투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발도상국에서 아직도 높은 유아사망률의 가장 큰 원인의 하나인 말라리아를 퇴치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거액의 상금을 걸거나 연구비를 투입하는 것이 그중 하나다. 최근에는 식수개선 사업을 통해 제3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글로벌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기부방식은 전 세계 거부들의 기부 방식을 바꿔놓았다. 선한 부분에 투자해 세계를 바꿔놓은 능동형 기부다. 그는 이런 방식을 통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자선사업가로서 명성과 함께 지구촌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발로 뛰는 활동가의 명성도 얻었다.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 국제사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기부 형식의 투자를 통해 자신이 하고 있는 셈이다. 기부가라기보다 기부사업가에 가깝다. 기부로 세상을 바꾸는 파워인물이다.

그는 새해 벽두인 1월5일에 자신의 블로그인 ‘게이츠노트’에 동영상과 함께 등장했다. 물을 마시는 장면이었는데, 이 물이 보통 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제가 됐다. 이 물은 사람의 배설물을 넣으면 이를 정화하고 분해해 전기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식수로 바꾸어 배출하는 ‘옴니프로세서’를 통해 생산된 물이었기 때문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배설물을 넣고 가열해 수증기와 마른 잔여물로 분리한 뒤 잔여물은 태워 증기기관을 돌려 전기가 만들며 이 과정에서 나오는 수증기는 정수시설을 거쳐 식수로 정화하는 것이다.

미국 시애틀의 재니키바이오에너지란 회사가 만든 이 기기는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는 개도국을 위해 개발한 것이다. 원래 이 하수 배출물을 태워 전기만 생산하는 발전기를 개발했는데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지원을 받아 식수까지 생산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게이츠는 “지금도 전 세계 20억명이 제대로 된 화장실 없이 구덩이에 용변을 보고 이것이 주변의 식수를 오염시켜 매년 70만명의 아이가 죽는다”라며 “안전하게 사람의 배설물을 처리할 수 있다면 아이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11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화장실 재발명 프로젝트’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몇 년째 화장실과 식수 문제 해결에 집중해왔다. 게이츠는 옴니프로세서를 올 하반기 서아프리카 세네갈을 시작으로 개도국에 보급해 쓰레기와 배설물을 안전하게 처리하고 전기와 식수를 팔아 수익도 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새해 벽두에 공개됐다. 지난 1월3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게이츠는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연구지도자 겸 파리경제학교(PES) 교수와 논쟁을 벌였다. 피케티는 지난해 펴낸 <21세기 자본>에서 자산소득률이 경제 성장률보다 높아지면서 소득 불평등이 더욱 심화해 세습자본주의가 생긴다고 지적하며 이를 막을 유일한 대안으로 부유세를 지목했다. 게이츠는 그 몇 주 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경제 콘퍼런스에서 피케티에게 “당신의 책에 담긴 내용이 모두 마음에 들지만 세금을 더 내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했다고 피케티 교수가 전했다. 피케티는 “나는 게이츠가 한 말을 이해한다. 그는 정부보다 자신이 더 효율적이라고 믿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피케티는 기부를 통한 사회적 투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정부를 대신하고 있는 게이츠의 심리를 잘 헤아린 듯하다. 게이츠의 활약상을 보면 정부는 물론 유엔도 대신할 것 같아 보인다.

기술고문으로 파트타임 경영

게이츠는 이제 기업인보다 사회사업가도 더욱 유명하다. 실제로 그는 2006년 6월 풀타임 경영인에서 파트타임 경영인으로 경영일선에서 일부 발을 뺐다.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함께 딴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풀타임으로 자선사업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2008년 7월27일 인도 출신의 사티야나델라 최고경영자(CEO)에게 MS의 경영권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아예 물러나 자선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지난해 2월 기술고문으로 복귀했는데, 그는 이 복귀가 나델라 CEO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그도 초창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게이츠는 공동창업자인 앨런과 레이크사이드 고교 동기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대단한 열정이 있던 게이츠와 비즈니스 아이디어가 많았던 앨런은 프로그래밍 능력을 어떻게 사업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MS를 창업했다. 사실 MS는 이들의 첫 창업 기업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의 창업 경험담이 있었다. 딱히 실패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공신화도 아닌 어정쩡한 경험이었다. 두 사람은 1972년 트래프-오-데이터(Traf=O-Data)라는 회사를 세웠다. 설립 목적은 특정 도로와 관련한 1차 자료를 읽어 도로 구간별 평균 주행속도를 산출, 교통 엔지니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연방 정부와 지방 정부는 도로변에 교통량 산출기라는 도구를 설치해 수시로 도로 상황을 파악했다. 이 도구는 지나가는 자동차 때문에 생기는 바람의 속도와 시간을 종이테이프에 기계적으로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16비트 데이터로 기록했다. 교통 당국은 이를 지역기업에 맡겨 읽어내게 한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도로를 개선하거나 가로등을 추가로 설치하는 등 교통 정책에 반영했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이 데이터를 더욱 값싸고 효율적으로 읽는 방법을 개발해 지역기업에서 하청 계약을 따내려고 했다.

두 사람은 지루한 수동 작업을 하는 대신 데이터를 자동으로 읽는 도구 개발에 나섰다. 이들은 당시 막 나왔던 인텔8008 마이크로칩을 활용했다. 컴퓨터를 이용해 데이터를 읽는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장치는 비즈니스적으로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교통데이터 수집 방식이 바뀌어 지역기업과의 하청 계약이 종료됐기 때문이다.

트래프-오-데이터의 경험은 두 사람이 나중에 MS를 창립하는 데 엄청난 경험과 아이디어를 안겨줬다. 첫째, 반복적이고 어려운 일은 줄이기 위해 기계를 이용해야 하며 둘째, 이 기계를 컴퓨터와 결합해 일을 자동화해야 하며. 셋째, 이를 구동할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들은 특히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두 사람은 1975년 뉴멕시코주에 있는 MI 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ems)라는 전자 회사를 위해 소트프웨어를 만들어 주는 하청 사업으로 두 번째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미국 공군에서 일하던 에드 로버츠와 포레스트 밈스가 1969년 창업한 MITS는 원래 로켓에 쓰는 원격측정 장치를 소형화하는 것이 사업 목적이었다. 하지만 전자계산기의 사업성을 눈여겨본 창업주들은 회사를 1971년 전자계산기 제조업체로 전환했으며 여기서 벌어들인 돈을 바탕으로 1975년 퍼스널 컴퓨터를 사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전자계산기 업계가 엄청난 출혈 경쟁을 벌이면서 수익성이 현저하게 악화해 다른 사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MITS는 1975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퍼스널 컴퓨터인 앨테어8800을 개발했다. 당시 인텔이 개발한 인텔8080CPU(중앙연산장치)를 썼다. CPU 용량이 256바이트에 불과한 원시 컴퓨터였다. 소프트웨어가 따로 없었고 연산 처리 결과도 깜빡이는 불빛으로 나타나 이를 해독할 수 있어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도구였으며 전자 관련 취미잡지인 ‘포퓰러 엘릭트로닉스’ 1975년 1월호에 표지로 소개됐다. 이를 본 앨런은 두 사람이 불빛 데이터를 해독할 수 있는 베이직 해석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했다. 게이츠와의 통화에서 해석 프로그램과 관련한 작업을 한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하청 기업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MITS에 연락을 하자 시연을 해보라는 제안이 돌아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시연할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워싱턴대 학생이던 앨런은 시뮬레이터를 만들고 하버드대 학생이던 게이츠는 이를 위한 해석 프로그램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1975년 3월 MITS 본사에서 진행된 시연에서 흠잡을 데 없이 잘 가동됐다. 이에 따라 MITS는 이 프로그램에 ‘앨테어 베이직’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사 PC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MITS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는 사업을 위해 1975년 4월4일 이 업체가 위치한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회사를 세웠다. 게이츠가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최고경영자를 맡았고 앨런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회사 이름을 지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이름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시작은 이렇게 소박한 소프트웨어 하청기업이었던 것이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1269호 (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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