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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미의 ‘도시 미술 산책’⑪ 김정연 ‘꿈꾸는 마을 2010’ - 넥타이 맨 어린왕자가 보는 서울 풍경 

우리에게 묻는 진정한 ‘집’의 의미 … 당신의 안식처는 

박보미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서울 서대문역 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꿈꾸는 마을 2010’.
서대문 네거리에서 독립문 방향을 바라보면 바닷가 수많은 따개비들처럼 아파트단지들이 보입니다. 금싸라기 같은 서울 땅이라 집들은 층층이 쌓여 하늘 높이 솟았습니다. 무수한 창문들의 집합체는 언제 보아도 경이롭습니다. 하긴, 거리를 채운 이 많은 사람들도 밤이면 누울 자리가 필요할 테니까요. 지금도 맞은편으로 GS건설이 2533가구나 되는 대단지 아파트를 한창 짓고 있습니다.

서대문, 호텔과 사무실, 고가도로와 아파트들이 얽힌 삭막하고 평범한 서울 풍경 중에 뜻밖의 장면이 보입니다. 넥타이 맨 남자가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남자는 어린왕자처럼 왕관을 썼지만 목에는 기다란 머플러 대신 넥타이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작가 김정연의 조각 작품 ‘꿈꾸는 마을 2010’입니다.

내가 꿈꾸는 ‘집’이란


넥타이를 맨 어린왕자 옆에는 큼직한 빨간 열매가 달려있는 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가 앉아있는 화강암 좌대에는 구름이 떠가고, 나무가 있는 단출한 마을풍경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어린왕자의 등 뒤로도 거대한 빌딩이 한창 지어지는 중인데 호텔신라의 비즈니스호텔 ‘신라스테이’입니다. 호텔 이름이 말하듯 그곳도 조만간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다(stay) 가겠지요.

시가지에 얽히고 설켜가며 낡아가는 이 수많은 건물들은 어쩌면 도시 그 자체입니다. ‘집’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것을 갖기 위해 큰 액수의 대출금을 빌리고, 그것을 갚기 위해 노동의 대가를 일평생 지불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사실 그 엄청난 비용 때문에라도 우리가 정말 그 정도의 가치를 집에서 얻고 있는 것인지 한번쯤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위스 출신 모더니즘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집의 기능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첫째, 더위·추위·비·도둑, 호기심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피난처일 것. 둘째, 빛과 태양을 받아들이는 곳일 것. 셋째, 조리와 일, 개인생활에 적합한 작은 방이 있을 것. 르 코르뷔지에는 이 세 가지를 제외한 다른 요구란 불필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위안하는 각종 장식이나 시설 따위는 쓸모없는 ‘낭만적인 거미줄’에 비유할 정도로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추구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다들 직관적으로 느끼듯, 집이 그가 말한 대로 단순히 물리적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머무르는 공간에 기능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합니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그의 저서 [행복의 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라고. 그러나 동시에 가장 고귀한 건축일지라도 때로는 낮잠이나 아스피린이 주는 작은 위안만도 못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사실, 집의 기능을 세 가지로 요약해버린 모더니즘 건축가의 대표 르 코르뷔지에조차도 특유의 미니멀한 집에 나름의 미학적 메시지를 담고자 했었습니다. 이처럼 ‘집’에 대한 의미와 가치는 최소한의 물리적인 기능부터 행복의 상징까지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어떤 이에게 ‘집’이란 중요한 투자와 매매의 대상일 수도 있지요.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네 번째 별에 사는 사업가처럼요. 그는 수억만개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것들을 관리하고, 소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집’이란 생존을 위해 필요한 휴식과 충전의 장소이고 마음 붙일 장소이자, 가족의 보금자리일 겁니다. 드라마나 광고에 나오는 모델하우스처럼 크고 세련된 곳은 아니지만, 바가지 긁는 아내와 울어대는 자식이 지지고 볶으며 사는 가족의 냄새를 담고 있는 곳. 내가 지켜야 할 혹은 위로받을, 삶의 이유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평범한 우리의 ‘집’입니다.

‘꿈꾸는 마을 2010’은 동화책의 삽화처럼 오밀조밀합니다. 이 작품은 여기를 지나는 수많은 ‘직딩(직장인) 어린왕자’를 위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비록 양복과 유니폼, 직함과 각종 책임의 무게에 눌려 모습을 알아보긴 어렵지만 마음만은 순수한 수많은 어린왕자들 말입니다.

자신의 별에서 해 지는 광경 보기를 좋아하는 어린왕자. 지금 그의 눈에 비칠 풍경은 어떨까 싶어 그 방향을 봤더니 다름 아닌 아파트 재개발 공사 현장입니다. 참으로 집이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인가 봅니다. 만약 지금 내가 정처 없는 가난한 여행자나, 무슨 이유건 당장 길가에서 자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면, 딱 다음의 것만을 간절히 바랄 텐데요. 바로 네 칸 바람 막을 벽과 비를 피할 지붕, 신을 벗고 누울 수 있는 깨끗한 바닥, 화장실 한 칸과 작은 조리대. 그 외의 모든 것은 없어도 되고 있으면 좋은 것들일 겁니다. 딱 르 코르뷔지에가 주장했던 3요소와 비슷하네요. 그에 비하면 이 어린왕자는 참 여유로워 보입니다. 아마 집 위의 집, 그 위의 집, 또 그 위의 집. 거기서 공중에 발을 허둥거리며 사는 ‘경제적 안정감’이 없는 대부분의 도시인들에게도 여기 어린왕자가 있는 맑은 공기나 과실나무, 흰 구름이 보이는 풍경은 결코 소박해 보이지 않을 겁니다. 마당이나 나무는커녕 공중에 지은 몇 평 내 집을 위해 매달 대출금 이자를 갚노라면 그런 감성 자체가 말 그대로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건장한 남자의 것이 아닌 왜소한 소년의 등입니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단순하게 생긴 눈, 코, 입의 표정은 모호하여 수수께끼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어떤 의문사나 감탄사에 가까워 보입니다.

어둑해지긴 했지만 아직 가로등은 켜지지 않은, 밤과 저녁의 틈새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고급 타운하우스나, 시영(市營)아파트나, 골목의 판잣집이나 차별 없이 노란 불빛이 딸깍, 켜집니다. 집집마다 밥을 짓습니다. 외출한 식구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시금치를 데치고, 쌀을 씻어 솥에 안치는 시간. 밖에 있는 솔로는 쓸쓸해지고, 기다리는 가족이 없는 이는 어디든 따뜻한 곳에서 걸칠 한 잔의 술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마음의 외풍(外風)을 막아주는 안락한 별

사실 이럴 때 우리가 집에 원하는 것은 베이스캠프가 주는 안도감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강남의 비싸고 럭셔리한 무슨 ‘팰리스’나 ‘캐슬’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이 생에서 잠시 머무를 곳이 필요한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히 잘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이웃들, 자연 속에 있는 소박한 집과 먹을 양식이면 충분합니다.

☞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_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8-1

김정연 작가의 ‘꿈꾸는 마을 2010’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사거리 인근에 위치한다. 서대문역 8번출구로 나오면 신라스테이 건축 현장과 서대문경찰서, 웨스트게이트타워가 있는데 이 세 건물 사이에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작품은 자귀나무, 목련, 철쭉, 휴게의자 3개, 데크쉼터 1개와 함께 286.08㎡의 조그마한 공터에서 감상할 수 있다.


박보미 -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com

1280호 (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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