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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먼저 의심하고 지레 억측하지 말라 

섣불리 예단해 스스로 ‘총명하다’ 여기는 왕 많아 … 선입견 버려야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이경(정종)이 병을 이유로 아우(태종)에게 왕위를 사양한 것이 과연 진심에서 나온 행동인가? 그 아우가 형에게 의롭지 못한 행동을 했기 때문은 아닌가? 아니면 나라 안에 내란이 벌어져서이거나, 혹 (명나라) 조정을 얕보고 희롱하려는 뜻은 아닌가? 공자는 나를 속이리라 미리 의심하지 말고, 나를 믿지 않으리라 억측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먼저 깨닫는 것이 현명함이라고 했다. 짐이 비록 정성과 신의로 사람을 대접하고자 하나 경솔히 고명(誥命, 황제가 제후국의 새 국왕을 인준하는 것)을 줄 수는 없다.”(태종1.3.6).

1401년, 왕위에 오른 태종이 고명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위와 같은 황제의 질문이 포함된 자문(咨文,외교서한)을 보내왔다. 정종에서 태종으로의 양위 과정이 투명하지 않으므로 승인을 유보하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재차 해명 사신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의 책봉을 받아낼 수 있었다.(태종1.6.12).

‘왜=간사’ 선입견이 왜변 불렀다 지적도

여기서 황제가 인용한 공자의 말은 [논어] ‘헌문(憲問)’편에 나온다. 공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속일 거라 먼저 의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믿지 않을 거라 미리 억측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먼저 깨달을 수 있다면, 이것이 현명한 것이다(不逆詐 不億不信 抑亦先覺者 是賢乎)”라고 했다. 상대방에게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속일 거라 예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면 처음부터 선입견을 갖고 상대를 바라보게 되므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상대방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도움이나 기회도 차단되고 만다. 나와 상대 사이의 신뢰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종 때 윤희성은 경연석상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한나라 명제(明帝)를 예로 든다. “이른바 임금의 총명이라는 것은 사방을 다 살피고 사방의 일을 다 듣기 위하여, 언로를 넓혀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총명이 가리어지는 폐단을 없애고 상하(上下) 모든 이들의 실상과 정황이 통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논어에 ‘속이리라 먼저 의심하지 말고 믿지 않으리라 지레 억측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명제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아랫사람들이 속일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고 이를 지적하며 적발해내는 것을 총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임금이 갖추어야 할 총명이 못됩니다. 지나치게 자세하고 조급한 총명일 뿐입니다.”(중종37.2.3).

명제는 후한의 전성기를 이룩한 군주로 평가 되지만 성격이 까다롭고 작은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는 특히 속단하길 좋아했다. 신하가 실제로 그러지 않았는데도 이러저러하게 황제를 속였거나, 속일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다.

조선의 인조도 비슷하다. 해서 인조는 이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치로써 사물을 관찰하시지 않고, 오로지 억측과 미리 의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명철하다 생각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신하들이 억울하고 애매한 죄를 입지만 감히 아뢰지 못하니 이 원통함을 어찌 하겠습니까!”(인조24.10.15).

이 두 군주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먼저 의심함으로써 억울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총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춰진 속마음까지 읽어냈으며, 미리미리 문제를 파악해 리스크를 제거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살다 보면 남이 나를 속이는 일도 있고, 남이 나를 믿지 않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를 방치하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배신을 당해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그래서 공자도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깨달아야 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짐작하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하는 것은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모두 적중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실정을 넘어서는 의심을 하게 된다.”(효종7.윤5.23). 섣부른 예단은 금물인 것이다.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이 그렇게 행동할지 알 수 없는 일인데도 자신의 생각만으로 속단하고 대응하면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된다. 상대에게 원한을 남길 수도 있다. 더욱이 리더라면 매우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명종 때 퇴계 이황은 왜와 교섭하는 문제를 두고 이렇게 진언했다. “왕도(王道)란 탕탕평평한 것이어서 속일 것을 예측하지 않고 불신(不信)할 것을 억측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이 왜노를 거절하려는 것은 필시 ‘저들의 죄가 큰데 성급하게 화해하게 되면 그들의 악을 징계하기는 고사하고 수모를 받는 후회만 있을 것이다’고 여겨서 일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중략)…한나라의 여러 제왕들이 흉노의 죄가 큰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과 급히 화의를 맺은 것은 백성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때 태종은 돌궐과 화친을 체결했고, 송나라 때 진종은 거란과 화의를 맺었습니다. 태종과 진종인들 이를 경솔히 허락하면 악을 징계할 수 없고 장차 배신을 당해 수모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흉하고 위험한 전쟁을 막고 사직을 지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해서였습니다.”(명종즉위 년.7.27).

퇴계는 왜가 간사하여 늘 우리를 속여 왔기 때문에 분명 또다시 우리를 속일 것이니 화친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류 입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왜가 어떻게 행동할 지와 상관없이 국경의 안보를 빈틈없이 강화해야 하는 국가 본연의 책무를 다하면, 왜가 다시 침입해 오더라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 따라서 왜가 우리를 속일 거라 속단하여 화친을 무산시키지 말고,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수용해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퇴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묵살됐다. 이로 인해 조선은 명종 대에만 해도 을묘왜변 등 끊임없는 왜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훗날 임진왜란이야 동북아 정치구도의 변화에 따른 전쟁이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명종 대의 왜변 만큼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속일 생각하지 말라’는 위험한 리더십

요컨대 먼저 의심하지 말고 미리 억측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주관적이고 섣부른 예단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를 경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함부로 넘겨짚고 의심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요즘도 ‘나를 속일 생각을 하지 마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지적하고 의심하고 적발하길 좋아하는 이들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똑똑해서 그런 거라고 착각하곤 한다. 리더가 이런 성향을 보일 경우 문제가 심각한데, 자칫 리더 자신 뿐 아니라 조직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순진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일이 전개되어갈 수 있는 방향과 다양한 가능성을 헤아리고 대응전략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리스크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공자가 말한 참된 ‘현명함’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288호 (201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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