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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동료의 신뢰 없으면 윗사람의 신임도 없다 

조선 사대부 관직생활의 지침 … 공자의 말을 [맹자]에도 인용 

김준태 칼럼니스트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인조 8년, 당시 좌의정이었던 김류가 상소를 올렸다. ‘신이 최명길의 풍수이론을 논변하던 중 우연히 희릉(禧陵,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의 일을 인용하게 되었습니다만, 결코 김안로를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 신이 김안로와 같은 일을 의도하여 은밀히 사람을 무함(誣陷)할 계책을 품었다고 한다면 신은 억울하여 만 번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신이 음험하고 간특한 마음을 품고서 실제 다른 이를 무함하고자 했더라도 밖으로 표출한 바가 없는데, 어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미리 헤아려 신을 지레 의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맹자가 ‘친구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는 바,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동료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하여 이처럼 씻기 어려운 오명을 남기게 되었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조정의 반열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인조 8.8.17).

‘동료의 의심 샀으니 관직에서 물러나겠다’

이 상소가 있기 며칠 전, 김류는 목릉(穆陵, 선조와 선조의 비 의인왕후의 능)을 이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최명길과 논쟁을 벌이면서 희릉의 일을 거론했다. 중종 때 척신으로 전횡을 휘둘렀던 김안로는 불길한 땅에 희릉을 모신 죄를 묻겠다며 정적을 제거한 바 있는데, 최명길 또한 그럴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자 최명길이 분노하여 조정에서 당장 물러나겠다고 선언했고, 다른 신하들은 오히려 김류가 김안로의 일을 재현시키려는 것이 아니냐며 비판했다. 이에 김류가 자신의 말을 변명하고자 상소를 올린 것이다.

김류의 상소는 다소 궁색한 감이 있다. 조선에서 ‘희릉의 일’은 김안로의 음험한 계략을 의미하는 관용어처럼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안로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것으로, 김류가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여하튼 김류는 같은 반정 1등공신인 최명길이 자신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의 신임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다. 이 때 그는 ‘친구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하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을 수 없다(不信於友 弗獲於上矣)’는 맹자의 말을 인용했다. 이 구절은 [맹자] ‘이루(離婁)’ 하편뿐만 아니라 [중용] 제 20장에도 거의 비슷하게 수록되어 있다. 원래 공자가 한 말인 것이다. 중용을 기준으로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기 위한 도리가 있으니 친구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다. 친구의 믿음을 얻기 위한 도리가 있으니 어버이에게 효순(孝順)하지 않으면 친구로부터도 믿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버이에게 효순하기 위한 도리가 있으니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효순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성실하기 위한 도리가 있으니, 선(善)함에 밝지 못하면 스스로를 성실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중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성실하게 한다’는 대목을 설명하며 “예를 들어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는 것은 반드시 실제로 그러한 효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만약 겉으로는 효도의 일을 행하면서 속에서는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 성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성실함이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심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설령 부모님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드리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겉치레일 뿐 부모님을 진정으로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면 부모님께 실망을 안기게 된다.

이러한 성실한 마음은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우정은 친구에게 무조건 잘해주거나, 친구가 하자는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부모를 섬기는 그 마음처럼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뿐이다. 간혹 부모에게는 효도하지 않으면서 친구들의 믿음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를 성공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위선이다. 더욱이 어버이에게 불효하는 사람을 친구로서 신뢰할 이는 없을 것이다.

친구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한다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리가 없다. 동료들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협력을 하지 못하는 데 업무를 잘할 턱이 없고, 친구들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그들을 실망시키는 사람이 윗사람에게 필요한 인재일 리가 없다. 가식이나 아첨으로 잠시 잘 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사람의 실체는 금세 드러나기 마련이다. 요컨대, 올바르고 선한 마음을 갖고 그 마음을 실천하여 안으로는 부모를 섬기고, 밖으로는 친구의 믿음을 얻어야, 사회생활을 하며 윗사람의 인정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은 조선 사대부들이 관직생활을 하는 중요한 지침이 되기도 했다. 특히 동료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스스로를 반성하며,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신은 본래 어리석어 형세를 살피는 능력이 부족한데도 여러 번 상소를 올렸다가 곧바로 여론이 꺼리는 바에 저촉되어 선비들이 마음으로 따라주지 않습니다. 이제 신은 고립되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 한차례 소요가 일어난 것도 모두 신이 동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사람들이 신을 모함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닙니다. 신은 일찍이 붕우에게 신뢰받지 못했는데 윗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선조수정실록16.10.1). 율곡 이이의 상소다. 당시 이이에게 쏟아진 비난은 당쟁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이이는 그것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돌렸다. 자신이 더 진심을 다했다면, 자신이 보다 성실했더라면 그런 비난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밖에 우암 송시열도 자신의 취지가 친구인 박세채의 오해를 사자 이 말을 인용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숙종9.3.5).

사람 대하는 ‘진심’이 중요

그런데 사대부들이 친구의 신뢰를 얻고, 자신의 진심을 오해 받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평판을 따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다만 ‘타인으로부터의 신뢰’가 나 자신의 수양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올바름을 실천하며,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왔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해줄 것이다. 설령 당장은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그 진심을 믿고 기다려줄 것이다. 반면에 선한 일을 해도 어떤 저의가 있는지 의심받고, 바른 말을 해도 오해를 산다면 이는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이다. 스스로를 깊이 반성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297호 (201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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