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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 기자의 ‘앵그리 2030’ (19) 왜 20대 총선이 중요한가?(1)]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50~60대가 공공·민간 모든 권력 틀어쥔 ‘늙은’ 대한민국 ... 투표율 낮은 20~30대 ‘푯값’ 덜할수록 후순위 


우리나라에서 ‘청년’이 사회의 중심 어젠다가 된 건 건국 이래 처음일 겁니다. ‘X-세대’나 ‘오렌지족’, ‘밀레니엄 세대’ 등 각종 사회학적 용어를 들이대며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적은 있지만 심각한 사회 문제의 출발점으로 ‘청년’을 지목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전까지 그럭저럭 세상이 잘 굴러갔기 때문이겠죠. 그 이면엔 경제 성장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2010년대 초까지 한국 경제는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야말로 희망의 나라였죠. 외환위기, 금융위기에 잠시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경제 규모는 비약적으로 커졌습니다. 세계 어딜 가도 한국처럼 드라마틱하게 성장한 나라는 없습니다. 산동네에서 아파트로 내려왔고, 여권이 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놀러 가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 사이 올림픽·월드컵도 열었죠. 국가의 위상 또한 크게 달라졌습니다. UN 사무총장부터 한국인입니다. 아이돌 가수와 배우들은 지구촌 전체의 인기 스타가 됐고, 이젠 어딜 가도 불고기와 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프랑스식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이었죠.

이 뜨거운 성장 뒤엔 누군가의 땀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이역만리 탄광에서 석탄을 캤고, 아버지는 불타는 사막에 나가 돈을 벌었습니다. 홀로 남은 할머니는 하루 종일 밭일을 하면서 자식 너댓을 산업 역군으로 키웠고, 엄마는 봉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인형 눈깔 붙이면서 자식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고생이 당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태어나는 날에도 직장을 지켰고, 엄마는 그 상황에 대해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식이 조금이라도 편안한 세상에서 살려면, 한 시간 더 일하고, 조금 덜 자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청년 시절, 지금의 20~30대를 위해 큰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부인해서도 안 되고, 잊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부모의 부가 자식의 사주가 된 사회

그러나 좋은 것만 물려준 건 아닙니다.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분배가 잘 안 됐습니다. 빈부격차는 날로 벌어졌고, 이젠 극약처방이 아니고선 좁힐 수 없는 단계에 왔습니다. 격차는 대물림됩니다. 아버지의 ‘말빨·줄빨·돈빨’이 자식의 사주가 된 세상, 당신이 젊었던 시절보다 아파트는 10배 비싸졌는데 금리는 10배 낮아졌습니다. 사다리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사어(死語)가 됐습니다. ‘우리 반 학생의 75%는 부모님이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 또는 대기업 임원’. 한 외고 교사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25%는? ‘돈 잘 버는 자영업자’.

세상이 이렇게 바뀌는 줄도 모르고, ‘남을 짓밟고 일어서라’고 배운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몰두했습니다. 놀이터·운동장은 그냥 보는 건 줄 알고 열심히 공부만 했습니다. 성인이 됐는데 일할 곳이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은 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대학졸업장과 채용 탈락을 알리는 e-메일 뿐이었죠.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로 내몰립니다. 용돈이라도 벌어 보려 나간 그곳엔 갑(甲)과 을(乙)이 있었습니다. 온갖 구박과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손에 쥔 몇십만원을 또 다시 학원비로 씁니다. 혹시나 하며 검은색 양복을 입고, 면접장에 들어가지만 결과는 같습니다.

기성세대가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고, 물질적으로 결여된 젊은 시절을 보냈을지 모르나, 그들에겐 현재의 2030이 가지지 못한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확신’입니다. 볼펜 껍데기에 연필을 꽂아 쓰고, 무릎에 구멍 난 옷을 덧대 입을 때도 그들은 믿었습니다. 5년 뒤, 10년 뒤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란 사실을. 여기엔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인당 국민소득이 1000~2000달러였던 시절에도 아이를 너댓씩 낳았습니다. 둘째, 그들은 함께 가난했습니다. ‘동일선상’에서 출발했죠. 성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도 부자는 있었지만, 극히 적었습니다. 함께 배고팠기 때문에 사회 전체엔 ‘동료의식’이 있었습니다. 힘들어도 함께 걷자며 어깨동무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요즘 [응답하라 1988]는 그런 ‘골목 연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도 없고, 동일한 출발선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평균 연령 58세

얼마 전 영화 [인턴]이 흥행했습니다. 주인공 70세 벤은 이전 회사에서 40년 동안 근속하며 부사장을 지낸 베테랑이지만 퇴직 후 인턴으로 재취업합니다. 벤은 지혜롭죠. 마흔 살이나 어린 CEO 줄스의 재킷을 세탁하고, 커피 심부름을 합니다. 투정을 들어주고, 이해하려 애씁니다. 아는 것이 많고, 경험도 풍부하지만 결코 지시하지 않습니다. 자랑할 일이 많을텐데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문제 해결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힘들어 보이는 일엔 가장 먼저 나섭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씁쓸합니다. 벤 같은 사람이 영화에 나온다는 건, 여기에 많은 이가 공감한다는 건 그만큼 그런 어른이 드물기 때문이겠죠.

대한민국은 어른들의 나라입니다. 50대 이상이 사실상 모든 걸 지배하죠. 벤처기업이 아니면 눈을 씻고 찾아봐도 30~40대 CEO를 찾기 어렵습니다. 정치판은 말할 것도 없죠. 선거 제도는 아예 신인을 외면합니다. 여야가 20대 총선 넉 달 전까지도 선거구 획정을 못하는 바람에 새 얼굴은 명함조차 못 돌리고 있습니다. 지역구당 1명씩 뽑는 소선거구제는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싹쓸이하는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기성 세대는 세상이 얼마나 자신들의 뜻대로 굴러가는지 잘 모릅니다. 알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대로 세상을 움직이면서도 양보할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개인은 그렇지 않으나, 늘 그렇듯 집단은 이기적입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60조는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규정합니다. 국회는 민주주의의 꽃입니다. 국민은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국회로 보냅니다. 그들이 법을 만듭니다. 법이 특정 계층이나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사회의 여러 목소리를 반영하고 이를 법으로 구현하려면, 국회의원의 구성에도 최소한의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회는 너무 현저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일단 남성 독식이 유별나죠. 전체 국회의원 중 여성 의원의 비중은 고작 약 15%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 전 세계적으론 100위권입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아예 남성의 독무대. 246명 중 92%(227명)가 남성입니다. 호혜를 베풀 듯 비례대표 자리는 여성에게 양보합니다. 그래서 비례대표 54명 중 절반 이상(28명)은 여성입니다.

연령의 불균형도 심각합니다. 19대 국회의원 297명의 중간 나이는 58세입니다. 어지간한 기업이면 퇴직을 했을 나이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선 국회의원이 ‘인생 이모작’ 정도됩니다. 전체의 45.5%인 135명이 50대고, 40.4%인 120명이 60대 이상입니다. 50대 이상이 전체의 86%. 30대는 고작 5명입니다. 이 중 4명은 내년 40대가 됩니다. 20대는 아예 없습니다.

1954년보다 못합니다. 얼마 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26세의 나이로 국회에 입성한 해죠. 1970년보다도 못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42세. 그는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에 나섰습니다. 그와 경선에서 겨뤘던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의원)과 이철승 의원 역시 각각 43세와 47세였습니다. 개선돼도 뭐할 판에 19대 국회의원은 18대 국회의원보다 더 고령입니다. 60대 이상 의원은 늘고, 30~40대 의원은 줄었습니다. 19대 국회 초선 의원 151명 중 무려 52명이 60세 이상이었습니다.

아마 20대 국회 역시 ‘탄탄한 인맥과 든든한 재산을 가진 고학력 50~60대 남성’으로 가득 차게 될 겁니다. 비례대표를 줄이기로 했거든요. 지역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지역구 의원만 더 늘게 생겼습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입니다. 여기서 대표라는 말은 헌법 제7조 1항(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과 제46조 2항(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에 비춰볼 때,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헌법학자들의 의견도 ‘출신 지역구민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표하며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19대 국회, 노인 혜택 법안이 청년 혜택 법안의 4배


▎43세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최근 유례 없는 남녀 15대15 동수 내각을 구성했다. 원주민 출신, 동성애자, 장애인, 30세 장관을 포함한 열린 내각이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어떤가요? 당선 직후부터 지역구 민원 해결에 매진합니다. 의정보고서에 예산 몇 억을 땄니, 내가 힘써서 뭘 지었니 자랑하기 바쁘죠. 지역에 사무실을 열고, 믿을 만한 보좌관 한둘씩 심어둬야 합니다. 돈줄을 쥐고 있으니 구청장도 깁니다. 같은 당 구의원, 시의원은 말할 것도 없죠. 공천권을 틀어쥐고 있으니 지역에선 ‘갑 오브 더 갑’입니다. 얼마 전 만난 한 지방 국회의원은 저에게 일주일 동안 KTX와 비행기를 몇 번 탔노라고 무용담을 늘어놓았습니다. 대체 소는 누가 키우나요? 그런데도 재선·3선 해보겠다고 ‘텃밭 가꾸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국회의원 300명 중 254명이 이런 삶을 삽니다. 오죽했으면 한 의원이 회기 중 주 5일 국회의사당 상주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했을까요.

행정부 역시 상황은 같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는 2원, 17부, 5실, 5위원회, 5처, 16청의 수장(首長) 중 50세 미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30대는커녕, 40대 장관도 없습니다. MB 정부, 참여정부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죠.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1971년생)이 있지만 그는 곧 총선 출마를 위해 떠납니다. 한국보다 훨씬 보수적이라는 일본에도 40대 장관이 3명이나 있고, 미국이나 유럽엔 아주 많습니다. 30대 장관 또한 생소하지 않죠.

캐나다의 새 총리 쥐스탱 트뤼도는 올해 43세입니다. 그가 최근 특별한 관심을 받은 건 단순히 젊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취임과 함께 파격적인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일단 성비부터 남녀 15대 15 동수. 더 놀랄 만한 건 구성원의 면면입니다. 44세 여성 법무장관은 캐나다 원주민 출신입니다. 재무위원장은 의원 시절 동성애자임을 선언한 사람이고, 체육·장애인 담당 장관은 시각장애인입니다. 캐나다의 주 종교는 기독교(국교는 아님)지만, 국방장관은 인도 출신 시크교도입니다. 메리엄 몬세프 민주제도 장관 역시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 무슬림이죠. 그의 나이는 겨우 30살, 그것도 여성입니다.

얼마 전 한 매체(the 300)는 ‘19대 국회 들어 65세 이상 노인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내용으로 발의된 법안이 청년에게 도움이 되는 법안의 약 4배에 달한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19대 국회가 개원한 2012년 5월 말부터 올 9월까지 발의된 노인 또는 청년 관련 법안 540개를 전수 조사한 결과입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국회의원 중에 50대 이상이 많아서일까요? 물론 국회의원 연령과 무관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단정짓긴 어렵습니다. 꼭 남성이 남성만을, 여성이 여성만을 대변하는 건 아니죠. 부자 국회의원이라고 가난에 무관심한 건 아니고, 나이 많은 다선 국회의원이라고 청년 문제에 관심이 없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연령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연령 때문에 이렇게 행동합니다. 바로 자신들을 뽑아줄 사람입니다. 그게 누굴까요? 바로 50대 이상이죠. 우리나라 선거에선 뽑힌 사람도 50대 이상, 뽑은 사람도 50대 이상입니다.

선거에서 50, 60대가 절대적 영향력


지난 19대 총선에서 투표권을 가진 선거인수 비율은 40대가 21.9%가 가장 크고, 60세 이상(20.7%)은 30대(20.4%)와 비슷했습니다. 50대(18.9%)와 20대(16.4%)가 뒤를 이었죠. 20~30대를 묶고, 50대 이상을 묶으면 각각 36.8%, 39.6%입니다. 고작 2.8%포인트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중 실제로 투표한 사람의 비율은 어땠을까요? 60세 이상(26.1%)이 가장 높았고, 50대(21.6%)가 그 다음입니다. 합하면 약 47.7%입니다. 20~30대는 합해도 29.5% 밖에 안 됩니다. 투표인 수 비율 격차는 2.8%포인트였지만 실제 투표자 비율 격차는 무려 18.2%포인트로 벌어진다는 얘기죠. 여러분이 정치인이라면 50%의 지분을 가진 유권자와 30%의 지분을 가진 유권자 중 누구에게 더 잘 보여야 할까요? 선거 직전이든, 당선 후든 50대 이상의 입맛에 맞는 공약과 정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거죠. 여기엔 여야가 없습니다.

젊은 세대는 아직도 기성세대가 우릴 걱정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우리를 돌봐주지 않습니다(물론 본인 자식은 챙깁니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만으로도 바쁩니다. 청년 일자리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본인의 연금보다 중요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왜 ‘벤’이 돼 주지 않느냐고 말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직접 나서야 합니다. 아무도 밥그릇을 챙겨주지 않는다면 직접 해야 합니다. 욕할 시간에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힘은 ‘정치’에서 나옵니다. 정치는 법이고, 법은 일상입니다. 단언컨대 정치는 밥 먹여줍니다. 나랏돈을 쓰는 것부터, 누군가에게 유리하고, 누군가에게 불리한 제도를 만드는 것까지 모두 정치가 결정합니다. 정치는 ‘푯값’입니다. 푯값이 크면 떡고물도 많습니다. 이런 줄도 모르고 20~30대는 투표조차 안 하고 살았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이 나라의 이상한 정치에 균열을 낼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고민을 좀 더 이어가 보죠. 다음주 ‘왜 20대 총선이 중요한가?(2)’를 끝으로 1년 반 동안 이어온 ‘앵그리2030’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 장원석 기자

1316호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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