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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경의 ‘노벨경제학자의 은밀한 향기’(8)] 사무엘슨의 행복방정식 ‘조화와 절제’ 

소유가 행복의 전제 조건이지만 탐욕은 불행 불러 … 삶의 가치 높일 해법 모색해야 

조원경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관

▎일러스트:중앙포토
세계무역기구(WTO)가 2016년 세계 무역 성장률(물동량 기준) 전망치를 2.8%로 낮췄다. 이대로라면 세계 무역 성장률은 5년 연속 3% 이하의 성적을 내는 것이다. 2015년에는 달러 강세와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세계 교역액(달러 기준)이 13% 줄어 1980년 이후 최악의 수치를 기록했다.

사람은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많은 사람이 내려가거나 낮아지는 숫자만큼 세상이 각박해지고 살벌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더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과는 딴판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소득은 1988년보다 분명히 늘었는데 사람들은 왜 더 힘들어할까? 수치로 나타나는 성장에 대한 기대가 꺾여서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자리는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마음도 달라져서 그런 건 아닐까.

왜 [응답하라 1988]에 열광했을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들은 지금보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더 따뜻한 시절을 보냈다. / 사진:중앙포토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30년 전 이야기에 그냥 열광한 걸까. [응답하라 1988]에는 노을이 부른 ‘함께’란 노래가 나온다. 이 노래의 가사에는 지금은 어느 이름 모를 시인의 향수가 되어 버린 철학적 가사가 담겨있다. ‘복잡한 세상을 해결할 수 없다 해도 좋은날이 다가올 거야…(중략)…살아가는 것이 이런 게 아니겠니? 함께 숨 쉬는 마음이 있다는걸’. 가볍게 부르기에는 이 얼마나 웅장하고 멋진, 하지만 버거운 내용인가? 노래 가사를 들어 보면 그때도 세상은 쉽지 않았다. 두드러져 보이는 건 ‘함께 하자’는 메시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따스함이 아닌 ‘각자도생’이라는 살벌함으로 바뀌고 있기에 ‘함께’라는 말이 더욱 가슴 저린 것이다. 어른의 잔소리는 ‘꼰대’의 개똥철학으로, 청년의 절규는 ‘희망사항’이 아닌 ‘희망사망’으로 풍자되는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양극화, 청년실업, 저성장, 고령화 현상은 세상의 많은 나라가 겪고 있는 무기력증이다. 그것이 ‘갈등과 분노’란 처방으로 해결된다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노벨경제학상 수상 1번 후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성숙한 문제 해결의 자세가 아니다. 그래도 ‘함께’란 노래의 철학으로 서로를 생각해 주면서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향해가던 경제 수치가 주춤해졌다. 2006년 처음 2만 달러를 돌파하더니 작년에는 뒷걸음쳤다. 국민소득 감소에는 경기 침체와 원화 가치 하락이 큰 영향을 미쳤다. 성장률은 3%를 넘기 버거운 상황이다. ‘세계가 어렵다’란 말로 정당화하자는 말은 아니나 그렇다고 너무 비관만 할 수도 없다. 2015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우리보다 많고 경제성장률도 높은 나라는 스웨덴·아일랜드·아이슬란드·아랍에미리트·카타르·룩셈부르크 등 6개국에 불과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국이라는 것이다. 세계 교역액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수출의 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마이너스인데 수출로 먹고 살던 국가가 고성장을 바랄 수 있겠나? 고성장이란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면 할수록 우리는 행복에서 멀어지는 역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부탄의 국민행복지수, UN 인간개발지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더 나은 삶 이니셔티브’ 등은 양적 GDP개념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국제 논의라는 공통점이 있다. GDP가 지난 세기 동안 누린 강력한 영향력은 기로에 서있다. 국제기구와 프랑스, 미국, 캐나다를 비롯한 각국 정부는 경제적 성과를 넘어 삶의 질과 행복을 측정하고 이를 증진하기 위한 대안적인 지표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

고성장은 과거의 향수일 뿐

성장이 어려워도 국민후생이 증대될 수 있지 않을까. 햇살 가득한 하늘 아래 물질이 풍족하지 않아도 씩 웃고 있는 중남미 국가 사람들의 삶을 보면 소득과 행복 사이에 절대적 비례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이가 세상을 향해 ‘응답하라 경제학자여~’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당신은 어떤 경제학자를 데려와 세계 경제의 무기력증을 치유하고 위로받고 싶은가. 누군가 묻는다면 ‘삶에서 성숙한 조화와 절제의 향기’가 느껴지는 폴 사무엘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는 시장을 중시한 시카고대에서 공부했지만 정부의 개입을 중시한 케인즈를 한편으로 지지했다. 신고전학파 종합 이론을 집대성한 그는 어느 한쪽의 이념에 치우치지 않으며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에 늘 귀를 기울였다. 경제학자로서 국민의 후생을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역할이랄까. 지휘할 때 오른손의 역할과 왼손의 역할을 제대로 파악한 경제학자였다. 사무엘슨이 천상의 아이의 기쁨을 전하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지휘하는 광경을 그려 본다. 온갖 역경 뒤에 오는 인간 승리의 기쁨이 짜릿하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어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됐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좀 더 간절히 느끼기 위해 볼륨을 높여 본다. 어디선가 통합과 화해의 메시지가 들려온다.

시장과 국가의 온전한 역할을 강조한 사무엘슨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은 무엇일까. 방정식을 풀어가며 세상을 단순화된 해답으로 바라보는 경제학의 세계에서도 해법을 풀어가는 각기 다른 시각차가 있음을 ‘현명하게 아우르는 향기’가 그에게서 느껴진다. 세상을 들여다보면 모든 현상에 양면이 존재한다. 그걸 누군가는 명과 암이라고 한다. 세계화가 세상을 평평하게 해서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는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남미 경제도 얼마 전까지는 높은 원자재 가격과 중국 경제의 성장으로 호황을 누리고 소득 불평등도 완화됐다. 사무엘슨은 세계화의 ‘명’ 외에 ‘암’이 될 수 있는 양극화의 단면을 간파했다. 그는 세계화에 따라 미국에서도 이익과 손실이 공평하게 공유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본가나 숙련된 전문가는 세계화의 승자로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비숙련 노동자나 블루칼라 공장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실질 임금 인상이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미국은 점점 커지는 불평등을 경험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세계화와 기술 진보가 인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한편으로 일자리를 앗아가고 낮은 임금으로 양극화를 조장하는 어두운 측면을 초래하는 측면도 조명한 것이다.

사무엘슨은 ‘행복=소유/욕망’으로 간단히 정의했다. 행복을 좌우하는 두 가지 요소가 소유와 욕망인데, 욕망이 정해져 있으면 소유가 커질수록 행복해진다. 반대로 소유가 정해져 있다면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해진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경제학 교과서를 처음 접할 때 마주치는 구절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이를 충족하는 재화는 유한해서 경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면 행복은 수학적으로 0이 될 수밖에 없다. 케인즈처럼 사무엘슨은 인간의 욕망을 무한하다고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의 생리일지 모르겠다.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노력이 물질적 진보를 이룬 한 요인인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사무엘슨은 우리에게 뭘 말하고 있나. 탐욕에 대한 경고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소유가 늘어도 욕망이 도를 지나쳐 탐욕이 되면 불행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빵을 몇 개 먹으면 배가 불러 더 못 먹지만 돈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 오죽하면 돈에 대한 욕망의 무한성을 쇼펜하우어가 설파했겠나. 그는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돈이든 물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르게 된다고 했다. 미국에서 풍요와 독감의 합성어인 ‘Affluenza(부자병)’라는 말이 생겨난 것만 봐도 그렇다. 소비에 중독된 사람들, 너무 부자라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에 걸린 사람들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다.

사무엘슨의 탐욕에 대한 경고


▎사진:중앙포토
비교는 불행의 함정이다.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서로 비교하는 상대적 욕구에 지나치게 탐닉할 때 개인도 사회도 불행해질 수 있다. 정당한 부의 결과로 누리는 부에 대해서 손가락질하는 것은 보상의 원리가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옳지 못하다. 오히려 다름을 쿨하게 인정해 주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이롭다. 다만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양극화가 세계적 이슈가 되고 분배의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저해한다고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소수의 누군가가 필요 없을 만큼 많이 가지는 것은 정당성을 떠나 옛날 아담 스미스가 동경하고 추구했던 건전한 세상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일자리와 사회안전망 구축도 중요한 문제다. 소유하지 않는 삶이란 사실 어려운 이야기다. 소유가 행복의 전제 조건이라는 사무엘슨의 주장을 물신주의로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하려면 소유와 이를 지탱하게 하는 소득이 기본임은 물론이다. 일반적인 사람은 돈에 울고 돈에 웃는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제대로 살수 있도록 양질의 일자리와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삶의 기본이 된다. 런던·시카고·뉴욕에 사는 부자의 기대수명이 가난한 자의 기대수명보다 월등히 높아 부의 양극화 못지않게 기대수명의 양극화에 세계보건기구(WHO)가 주목하고 있다. 영국 국가 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부유한 계층의 아이와 빈민가에서 태어난 남자 아이의 평균 건강수명이 20년이나 차이가 났다. 중요한 것은 빈민가 남성의 평균 건강 수명의 기대치(52.2세)가 가난한 나라인 르완다(55세)보다 낮다는 대목이다. 의료비 지출 같은 정기적인 검진에 소요되는 돈의 중요성도 수명 결정과 관련해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그러나 돈이 주는 스트레스의 무게가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정신력을 갉아 먹고 자존감에 상처를 줘서 육체의 면역체계까지 무너지게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제기된다.

행복·욕구·소득 간의 관계를 논한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의 역설을 살펴보자. 소득이 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소득이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 변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스털린의 역설의 핵심이다. 이 학설에 대한 논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스털린은 지금도 자신의 입장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면서 미국에서 지난 70년간 개인소득이 늘었지만 행복은 정체되거나 심지어 낮아졌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왜 행복이 정체되었는지를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소득이 증가했을 때 이에 기인한 절대적 욕구 때문에 가지고 싶은 품목이 늘어날 수 있다. 다른 한편, 타인이 나보다 더 잘 살게 되면 비교의 늪에 빠지게 되어 상대적 욕구 역시 늘어날 수 있다. 문제는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좌절이다. 세계적으로 대도시 주거비용은 일반인이 살기에는 매우 높은 수준이다. 평생 모기지 빚에 허덕이는 일반 서민과 사회 초년생의 삶을 지치게 하고 행복이 저 멀리 달아나게 만드는 원인이란 주장도 그래서 일리가 있다.

포용적 성장 이론 각광

행복이 소득과 같은 조건에 좌우되는 부분이 크지 않다는 반론도 많다. 행복이 낙천적인 성향과 같은 유전적인 기질이나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누군가는 행복을 위해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거나, 행복은 자기만족에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그러나 괴테는 지갑이 가벼우면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돈 없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공감이 가는 말인가. 맹자 역시 말했다. 재산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없다고. 이들의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에 쪼들리는 서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최근 OECD의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 이론이 각광을 받고 있다. 포용적 성장이란 국가 간에는 개발도상국, 기업 차원에서는 중소기업, 성별로는 여성, 고용문제와 관련해서는 청년 같은 상대적 약자를 지원하고, 동반성장하자는 의미다. 성장을 중시하되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 문제 해소, 계층 간 형평성 있는 분배를 추구하는 것이다. 논의의 틀로 ‘소득, 일자리, 건강(income, jobs, health)’의 세 가지 판단 기준과 부가적으로 ‘교육, 환경(education, environment)’을 포함한다.

당연히 행복이란 이런 기준을 포함해서 삶의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논의해야 한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는 저성장·고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 잠재력을 높일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실천 방법으로 3가지 ‘I’를 제시한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다. 각 나라가 성장전략을 통해 만든 ‘구조개혁의 이행(Implementation)’에 집중하고 수요 부진에 대응한 ‘투자 활성화(Investment) 전략’을 마련하는 한편, 청년실업 해결, 중소기업 지원, 개도국 발전을 위한 ‘포용적 성장(Inclusiveness)’에 몰두하라는 것이다.

사무엘슨이 말하는 행복 방정식을 조금 변형해 보자. ‘행복=실현/기대’라고 하면 어떨까. 누군가는 저성장 시대에 저축해봤자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푸념할 것이다. 대학을 나와 봤자 취직도 되지 않아 손해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은 변화가 필요하다. 경제적 수익률이 낮아졌는데 과다한 경쟁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예컨대 대학을 가기 위해 너무 많은 경쟁을 한다면 당연히 본전 생각이 난다. 청년 자원의 낭비는 개인적·사회적·국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압축 고도성장에 걸맞은 고용 시스템은 세계화와 기술 발전에 맞물려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렵다. 과거 고용 시스템에 맞는 기대수익률은 더 이상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걸 부모도 학생도 알아야 한다. 이제는 오로지 대학 진학에 목매기보다는 기업의 수요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일자리를 찾는 방향으로 개인·기업·정부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기업은 고용에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정부는 예산과 세제를 고용 수준 증대를 위해 운영해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모두 어떤 자세로 나아갈지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좌우될 것이다.

폴 사무엘슨 (Paul Samuelson, 1915년 5월~2009년 12월): 2회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고전학파의 미시적 시장 균형 이론과 케인즈의 거시경제정책론을 접목한 신고전파 종합의 대부다. 미국 인디애나 출생으로 1935년 시카고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MIT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경제학에 미·적분 등 수학을 도입해 동태분석과 정태분석을 체계화했다. 공공재는 비배타성과 비배제성이 있으므로 민간이 아닌 정부가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의 개발에도 기여했고, 후생경제학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보다는 합리적인 규제가 동반된 시장이 훨씬 이롭다고 주장하며 밀턴 프리드먼과 학문적 갈등을 보였다.

조원경 - 연세대(경제학과)와 미국 미시간주립대(파이낸스 석사)를 졸업했다. 행시(재경직) 34회 출신으로 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관세, 물가, 복지, 소비자, 국제금융, 통상, 대외경제 분야에서 일했다. 미주개발은행 이사실에서 한국 대표로 근무했다. 현재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관(국장급)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이 있다.

1332호 (20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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