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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사의 힐링 상담 | 실직 후 정체성 혼란의 극복] ‘나→너→남’의 순서로 사랑하라 

마음속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나의 주인공으로 

후박사 이후경 정신과의사, 경영학박사, LPJ마음건강 대표

▎일러스트:중앙포토
46세, 그는 혼란스럽다. 마흔이면 불혹(不惑)이라 하지만 모든 게 의혹투성이다. 이제까지 쌓아왔던 모든 인간관·가치관·세계관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내가 누구인지, 뭘 위해 살았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뿌리째 흔들린다.

1년 전, 그는 후배들이 선망하는 잘 나가는 대기업 부장이었다. 훤칠한 키에 뛰어난 업무 능력, 아래 위를 아우르는 인간관계로 동기들 가운데 ‘회장님’이라고 통했다. 그런데 그가 맡은 사업부에 문제가 생겼다. 투자 건으로 그룹 회장님과 해외사업부 임원과의 갈등에 휘말렸다. 공공연히 회장님 편을 들었는데, 치명적인 손실이 났다. 더구나 운 나쁘게, 바로 그 임원 밑으로 부서를 옮기게 됐다. 그는 중국 파견 1달 만에 ‘해고 조치’ 당했다.

1달 전, 그는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에 공동대표로 이름을 걸었다. 부장 시절 관리했던 하청 업체다. 말만 대표지, 과거 인간관계를 활용해 계약을 따 내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는 슬럼프를 박차고 일어섰다. 두 아들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생활이 절실했다. 이제, 갑을이 바뀌었다. 회사차를 직접 몰고, 지방에서 본사까지 주 2회 들어간다. 이제, 마인드도 바꾸었다. 과거, 휘하에 있었던 후배들에게 굽신거린다. 이것저것 받아 적기 위해 서류가방도 샀다. ‘영업 사원’이 된 것이다.

잘 나가던 부장에서 해고 당해

지금, 그는 혼란스럽다. 짧은 기간 동안 모든 것이 변했다. 과거에는 오직 기업을 위해 조직의 선봉자·파수꾼·하수인으로 살았다. 정체성이 흔들린다. 이제까지 익숙했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적응할지, 뿌리째 흔들린다.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총체적 느낌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통해 접근한다. 존재론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있음’에 집중한다. ‘무엇이 존재하는가?’ 인식론은 자신을 찾아가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앎’에 집중한다. ‘어떻게 아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모두 들어있다. 부처는 이렇게 외쳤다. “우주 가운데, 나보다 더 존귀한 사람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정체성 혼란은 사춘기에 나타난다. 청소년은 급격한 신체적·심리적 변화를 경험한다. 성난 파도와 강한 바람 속을 항해한다. 무한한 충동·동경심·호기심은 수많은 좌절감·불신감·의혹감과 교차된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할까?’

정체성 혼란은 중년기에도 나타난다. 중년기는 새로운 사회적·영적 변화에 직면한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무한한 열정·경쟁심·성취감은 수많은 패배감·배신감·회의심과 교차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체성이란 변치 않는 존재의 본질이다. 일관성과 통합성을 포함한다. 일관성(consistency)은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한결같음이다. 어려서부터, 무수한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흐름이다. 통합성(integrity)은 인간관·가치관·세계관의 하나됨이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환경 가운데 형성된 온전한 태도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일흔에,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정체성 혼란은 커다란 실패에서 온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남을 원망하고, 나를 학대해 본다. 과거는 단절되었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다. 실패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잘났건 못났건 모든 게 내 탓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정체성 혼란은 커다란 성공에서도 온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깨에 힘 꽤나 주고, 돈도 집어줘 본다. 질서는 혼란을 향하고, 통합은 해체를 원한다. 여전히 바람은 불고, 구름은 흘러간다. 성공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하늘 아래 미물이다. “세상에서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체성은 내가 나의 주인공인 마음 상태다.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다. 독립을 뜻하고, 자유를 의미한다. 모든 것을 내 마음 대로 하기 때문에,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다. 매사 책임을 자각하여, 나 이외의 사람이나 힘을 탓하지 않는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의 생각에 끌리지 않는다. 나 이외의 존재나 힘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것을 부리는 주인공이 되는 마음 상태다.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한번이면서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는 여정이다.

‘자기가 되는 출구’에 서 있어

자, 그에게 돌아가자. 그는 커다란 위기를 겪고 있다. 중년기 남자의 정체성 확립은 양가성의 통합으로 이뤄진다. 그는 지금 ‘자기가 되는 출구’에 서 있다. 그에게 탁월한 대처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마음속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동안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벗 삼아 살았다. 아니, 큰 소리를 내며 살았다. 그런데 그 때도, 실패한 지금도 속이 허하다. 인생의 절반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인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괴로운 마음속 소리에 경청하라!” 이는 갈등이 맴도는 분위기에서 구토를 느끼고, 무언가를 눈치 채라는 신호다. 조직에서 굳혀진 ‘나’를 깨고, 새롭게 탄생하는 ‘자기’를 찾으라는 메시지다. 사회가 요청하는 ‘나 아닌 나’가 되는 것에서 돌이켜, 남은 인생이 가기 전에 ‘자기’가 되라는 음성이다.

둘째, 본성 대로 살자. 그동안 조직의 충견으로 살았다. 아니, 조직이 나의 전부였다. 사명·가치·비전을 공유했다. 그런데 평생 몸 바친 조직이 사라졌다. 인간관·가치관·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독수리는 하늘을 날고, 잉어는 강을 헤엄치는 본성을 가진다. 개는 짖는 본성이 있고, 벌은 쏘는 본성이 있다. 우리는 인간 본연의 성품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중용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이 명령한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한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자기를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뉘우치자. 꽃피고 열매 맺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자. 가슴으로 못 산 것에 대해 아파하자.

셋째, 나 사랑으로 살아가자. 그동안 조직·가정·나의 순서로 사랑했다. 아니, 조직에만 오로지 충성했다. 갈등에 시달리는 사람은 지배와 착취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 돌아가는 것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구세주로 나서기 쉽다.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은 독재자가 되기 쉽다. 진정한 사랑은 나·너·남 사랑의 순서로 발전하다. 남을 사랑하지 못함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너를 사랑하지 못함은 교만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함은 존재에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나 사랑’을 이뤄야 ‘너 사랑’이 가능하고, ‘너 사랑’을 해 본 자라야 ‘남 사랑’을 할 수 있다.

후박사 이후경 - 정신과의사, 경영학박사, LPJ마음건강 대표. 연세대 의과대학과 동대학원을 거쳐 정신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연세대 경영대학원과 중앙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임상집단정신치료] [후박사의 마음건강 강연시리즈 1~5권] [후박사의 힐링시대 프로젝트]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1332호 (20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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