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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20)] 인재 선발의 다양성·투명성 확보 외쳐 

정약용의 정언·지평 사직상소... 과거제 폐단과 과열 응시 지적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삼가 생각하건대, 간관(諫官)의 직분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임금을 허물이 없는 길로 인도하는 데 있으니, 간관 된 자는 그 풍채와 태도, 말과 논의가 모두 임금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이 직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은 본래 용렬한데다 오직 성인(聖人, 정조를 가리킴)의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러고서 어찌 신이 정색하고 얼굴을 들어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고 부족한 점을 채워드릴 수 있겠나이까.’(이하 인용은 모두 [다산시문집] 권9, ‘정언을 사양하고 겸하여 과거의 폐단을 진달하는 상소’와 ‘지평을 사양하고 겸하여 과거의 폐단을 진달하는 상소’가 출처임).

과거와 천거의 병행 주장

1791년(정조 15), 사헌부 정언(正言)과 지평(持平)에 차례로 제수되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임명되자마자 곧바로 사직소를 올렸다. 자신은 성균관 시절부터 규장각 생활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가르침과 격려 속에서 성장해왔고, 지금도 스승이나 다름없는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극간(極諫)하고 때로는 임금을 신랄하게 비판해야 하는 간관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에 대해 다른 관료들의 견제가 심했고, 이것이 정조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정약용은 사직소를 올리면서 과거제도(科擧制度)에 대한 간언을 함께 담는다. ‘신이 지금 비록 체임되기를 바라오나 단 하루를 맡은 간관이라도 어찌 책임이 없겠습니까. 생각건대, 과거로 인한 폐단이 날로 불어나고 달로 성행하고 있지만 그저 임시방편으로 땜질하다 보니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임명되자마자 사의를 표명하긴 했지만 사직서가 수리될 때까지는 해당 보직에 있는 머물러야 하는 이상 ‘정사(政事)의 득실’을 논하는 간관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과거시험이라는 단일 루트로만 이루어진 조선의 관리 선발 시스템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는 과거만 있고 천거하는 제도는 없습니다. 과거란 사람의 기능을 분별하여 등급을 매기는 것이며, 천거란 사람의 재능을 천거하여 발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법은 사람이 스스로 과거에 응시할 뿐, 누가 천거함이 있습니까?’

여기서 ‘과거’와 ‘천거’의 병행이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인재를 선발하여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선발평가시험과 함께, 다양한 각도에서 인재의 자질과 잠재력을 살펴 적임에 천거하는 절차가 병행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과거시험은 응시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자의든 타의든 과거시험을 응시하지 못하는 인재는 사장되어 버린다. 따라서 천거를 통해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과거’는 사람들에게 ‘시험합격을 위한 공부’에만 매달리게 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따라서 학문과 덕행에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선비들이 학문 도야와 자기 수양에 힘쓰도록 권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종 때 조광조가 ‘현량과(賢良科)’ 도입을 주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울러 정약용은 과거 시험 자체도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과거는 응시자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합격 정원의 수백 배에 이르렀다. 정조 18년 2월 21일에 이루어진 삼일제(三日製, 매년 삼월삼짇날을 맞아 이루어진 시험으로 수석은 곧바로 최종 단계 시험인 전시(殿試)를 볼 수 있었고, 상위 합격자들은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에 관한 실록기사를 보면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삼일제를 거행하였는데, 문 안에 들어온 유생의 숫자가 2만3900여 명으로 뜰에 전부 수용할 수가 없었다’고 되어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런데도 시험장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응시자에 대한 통제력은 상실되었고,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구조상 답안지 전체에 대한 세심한 채점도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선착순 300명의 답안지만 평가대상으로 삼는 일까지 벌어진다. ‘선접꾼(답안지를 제출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거벽(답안지 내용을 구상하는 사람)-사수(답안을 작성하는 사람)’라는 용어도 그래서 나왔다.

이에 정약용은 응시 인원을 대폭 줄임으로써 과거시험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여 편법과 부정을 해소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각 고을에서 수령이 응시자들을 먼저 걸러내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일종의 응시자격 시험을 신설하자는 것인데 객관성 확보 방안 등 세부적인 내용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므로 적절성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또한 정약용은 ‘병별시(丙別試, ‘丙’자가 들어가는 해에 열리는 시험), 알성과(謁聖科, 임금이 문묘를 참배 후 성균관에서 열었던 비정기 시험), 절일제(節日製, 주요 명절에 실시한 시험), 황감제(黃柑製, 제주도에서 진상한 황감을 유생들에게 내리면서 실시한 시험) 등 소소한 과거를 일체 폐지하고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정규 과거시험으로만 사람을 뽑되 점차 그 정원을 증가시켜야 한다’고 했다. 특히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여는 ‘경과(慶科)’는 전혀 근거도 없는 제도이므로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흔히 과거는 한번 열릴 때마다 전국의 수만~수십만 응시자들이 시간과 돈을 쓰며 한양으로 상경해야 한다. 응시인원 대비 합격자 수도 매우 적다. 이런 시험이 불규칙적으로 운영될 경우 이로 인해 낭비되는 국가적인 비용은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규 시험만 남기고 여타의 시험은 폐지함으로써 과거제도를 예측가능하게 운영하자는 것이다. 대신 합격자 수를 그만큼 늘린다면 응시자들은 보다 안정적으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약용의 판단이다.

‘시험 횟수, 응시생 수 대폭 제한’

이 밖에도 정약용은 소과(小科)와 대과(大科)를 통합하자고 주장했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초시(初試) 급제자들에게 ‘소과’를 실시하고 그 합격자 200명(진사100명, 생원100명)에게 ‘대과’ 응시자격을 부여하여 다시 33명을 선발하는 방식이다. 이를 하나로 만들어 ‘250명을 뽑아 50명을 급제로 삼고 나머지 200명은 진사(進士)로 삼는다면 법이 분명하고 일이 간편하기가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두 시험을 통폐합하더라도 합격자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평가방법과 규정을 제안하며 자신의 주장을 보충했다.

이상 정약용의 주장은 인재선발 제도의 다양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등급을 판정하여 합격·불합격을 결정하는 과거제도만으로는 빠짐없이 인재를 찾아내어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어렵다. 또한 그 시험조차도 반드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해야 본래의 취지를 달성할 수 있으며, 사회 전반의 낭비되고 있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다. 정약용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공무원시험열풍’ ‘취업고시’에 휩쓸려 있는 대한민국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47호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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