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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의 바둑경영] 미생마 근처에서 싸우지 마라 

자칫 대마 잃는 불상사 발생... 경영에서도 사활관리 중요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재계에서도 대마불사의 신화는 사라지고 있다. 한진해운은 8월 31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9월 5일 현재 압류를 우려한 한진해운 소속 선박 73척이 국내외 44개 항구 앞바다에서 떠돌고 있다. 사진은 부산 신항 한진컨테이너 터미널에 입항한 한진미르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세상살이에서도 그렇지만 이 말은 바둑에서 정말 실감 나게 느껴진다. 바둑은 누가 집을 많이 차지하는가를 다루는 경제전이나, 실제로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대기업의 도산을 비유하는 바둑 격언 ‘대마불사’도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비즈니스나 우리의 삶에서도 사활(死活)이 중요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둑 기술의 중요한 부문인 사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삶의 조건: 바둑에서는 ‘사활’이라는 분야가 특별하게 발전돼 왔다. 바둑 이론이 취약했던 옛날에도 사활 부문은 잘 개발돼 있었다. 옛날에 만든 [현현기경] 같은 고전 사활묘수집이 오늘날에도 판매되고 있다. 중국 북송 때 나온 [망우청락집]에는 사활문제가 수백 개 실려 있다. 프로기사가 되는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사활문제를 수천 개, 많게는 수만 개를 풀어본 경험이 있다. 이처럼 피나는 공부를 했음에도 프로들은 또 사활공부를 한다. 현재 바둑계 랭킹 1위인 박정환 9단은 고수가 된 지금도 사활문제집을 가지고 다닌다. 영토경쟁인 바둑에서는 집짓는 기술이 더 중요할 텐데, 왜 사람들은 사활을 그토록 중시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둑돌이 살아있어야 집을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재산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업 역시 삶이 전제되어야 재무구조를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업의 수명이론이 있듯이 삶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기업은 도산하게 된다. 물론 회사의 수익성이 기업의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 수익성이 악화되어 빚이 늘어나면 회사의 생명은 위협받게 된다.

바둑판에서도 수익성은 사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실리를 많이 벌어들여 수익성이 좋다면 대마를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상황이 안 좋으면 리스크를 감수하며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그만큼 대마가 잡힐 위험성이 커진다. 바둑에서 이처럼 생사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삶과 죽음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포위된 바둑돌이 살려면 독립된 두 집을 갖춰야 한다. 비유하자면 단칸방이 아닌 두칸방을 확보해야 한다.

[1도]에서 맨 왼쪽의 모양을 보자. 흑돌이 한 집을 갖고 있는데 백에게 포위되어 있다. 이 흑돌은 죽음이다. 왜냐하면 오른쪽의 a에 백이 들어가 흑돌을 모두 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쪽처럼 두 군데 집을 가진 흑돌은 잡히지 않는다. 백이 흑집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흑은 삶을 확보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은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집이 크다면 굳이 두 칸으로 나누지 않아도 된다.

[2도] 위쪽의 왼편 흑돌은 직선으로 된 4집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직사궁(直四宮)’으로 불린다. 이 흑돌은 이대로 살아 있다. 오른쪽의 판육궁도 이대로 삶이다. 그런데 5집이나 6집의 비교적 큰 집을 갖고서도 완전한 삶을 갖추지 못한 모양이 있다. 아래쪽의 흑돌은 지프차 모양을 하고 있는데 백1의 급소를 당하면 죽음이다. 이처럼 바둑돌이 살기 위해서는 삶의 집모양을 갖춰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돌은 잡혀서 포로가 되기 쉽다.

대마불사의 신화: 사활과 관련해 언론에서 많이 듣는 말은 ‘대마불사(大馬不死)’다. 이 말은 덩치가 큰 대마는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지 두칸방을 내면 살 수 있으니 거대한 조직인 대마가 사는 것은 어렵지 않음을 가리킨다. 이 말이 대기업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 것은 덩치 큰 대기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쓰러지지 않는 것이 바둑과 비슷하게 때문일 것이다. 대기업에는 딸린 식구가 많아 쓰러지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대마 즉 대기업은 도산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다’는 말이 대세인 것 같다. 덩어리가 큰 대마라고 해서 잡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도 회생 불가능으로 판정이 나면 이미 대마불사가 아니다.


[3도]처럼 대마도 쉽게 잡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를 하나 소개한다. 시니어와 여류 기사가 대결하는 지지옥션배에서 여류팀의 마지막 주자인 최정 6단이 시니어팀의 나종훈 7단과 둔 바둑이다. 왕년의 맹장 서봉수 9단이 경이적인 9연승을 거두어 여류팀이 벼랑 끝으로 몰린 상황. 여류 최강자 최정 6단이 외로운 검객처럼 홀로 시니어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다. 왼쪽에 흑대마가 있다. 흑이 백돌 세점을 잡고 있어 살아있는 줄 알았는데 최정 6단은 이 장면에서 백1로 대마를 잡으러 갔다. 흑6까지 선수하고 백7에 포위하니 흑대마가 살기 어려운 모양. 흑이 꽤 넓은 집을 갖고 있지만 앞에서 본 지프차 모양이다. 자체로는 살 수 없는 집모양인 것이다. 예상치 않은 대마공격에 아연실색한 나종훈 7단은 이후 바깥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며 삶을 찾았다. 그러나 이 대마가 사는 길은 없었다. 이 대마가 잡힌다면 승부는 더 이상 해볼 수가 없다. 결국 이 바둑은 대마를 잡은 최정 6단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바둑처럼 덩치가 큰 대마라고 해도 삶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잡히게 된다. 이보다 훨씬 더 큰 무리의 대마가 잡히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니까 ‘대마불사’는 유명한 바둑격언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관리가 최우선: 바둑에서 이처럼 생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고수들은 누구나 자기 돌의 안전관리를 한다. 무엇보다도 상황 변화에 따라 아직 살아있지 않은 돌에 어떤 영향이 올지를 면밀히 살핀다. 현재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주변 상황이 변하면서 위기가 찾아오는 수도 있다. 잘 나가던 기업이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 악영향을 피하기 위해 고수들은 “미생마 근처에서 싸우지 마라”고 충고한다. 미생마란 아직 삶을 확보하지 못한 돌이다. 아직 살아있지 않은 미생마 부근에서 싸움을 벌이다 보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어느 틈에 대마가 잡혀버리는 일도 일어난다. 물론 이것은 하수들의 바둑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대마의 안전관리에서 기본적인 것은 꺼진 불도 다시 살펴보는 자세로 사활을 확인하는 일이다. 혹시 무슨 변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는지 미생인 돌을 수시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고수들은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본능적으로 자기 돌의 사활을 점검한다. 만일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적절한 기회를 보아 보강을 한다. 직접 보강을 할 여유가 없다면 간접적인 보강책을 쓰기도 한다. 물론 고수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착각이나 방심 등으로 인해 실수를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삶이 확보되지 않은 돌인데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 있다. 또한 집 속에 수가 있는데도 방심하여 보지 못하는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결과는 치명적이다.

정수현 -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1352호 (201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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