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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가&혁신가 | 세계 2위 원자현미경 제조사 파크시스템스 박상일 대표]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소리 꽤 들었죠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세계적 석학의 애제자로 교수직 마다하고 창업... 나노 계측 분야 최고 기술력 자신

▎파크시스템스는 세계 2위 원자현미경 제조 업체다. 박상일 대표는 실리콘밸리에서 벤처 창업 후 한국으로 돌아와 파크시스템즈를 설립했다. / 사진: 장진영 기자
희끗희끗하지만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머리에 금테 안경. 다소 딱딱한 듯 진지한 표정. 첫인상이 영락없는 학자다. 인터뷰 시작부터 “좋은 질문이다” “그건 잘못된 표현이다”와 같은 답이 수시로 돌아온다.

대개 살아온 경력은 얼굴에 묻어나게 마련이다. 경기도 수원 광교테크노밸리 한국나노기술원에서 파크시스템스를 운영하는 박상일 대표는 진짜 학자 사장님이다. 미국 명문 스탠퍼드대에서 표면 물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파크시스템스는 지난해 연매출 200억원 정도의 중소기업이지만, 세계 2위, 국내 유일의 원자현미경(AFM:Atomic Force Micros copy) 제작 업체다. 원자현미경이란 물체 사이에 상호작용하는 힘을 기록하는 원리를 통해 대상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이다. 0.1 나노(1 나노는 10억분의 1m) 크기의 원자까지 볼 수 있어 원자현미경이라 부른다. 현대 과학은 주사터널링현미경(STM)과 AFM 덕분에 개별 원자와 분자를 관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게 됐다.

매출의 80% 수출로 올려

파크시스템스는 전형적인 강소기업이다. 전체 매출의 80%가 수출에서 나온다. 올해도 최근까지 마이크론·인피니온·씨게이트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뿐 아니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네덜란드 아인트호벤공대 등에도 납품을 했다. 국내에는 LG화학·포항공대·KAIST·서울대·성균관대 등에 AFM을 보냈다. 지난해 12월에는 회사가 코스닥에 상장되는 결실도 맺었다. 이쯤 들으니, 파크시스템스가 한국나노기술원 건물에 입주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파크시스템스는 1000평 규모인 나노기술원 4층 전 층을 모두 쓰고 있다. 사무실·연구실·공장이 1000평 안에 다 들어있다. AFM은 대부분 소량 주문 생산이기 때문에 큰 면적이 필요 없다. 대신 대당 가격은 비싸다. 연구용도 대당 1억원, 반도체 공정 등에 필요한 산업용은 20억 원이 넘는다.

스탠퍼드 물리학 박사님이 어떻게 한국 중소기업의 사장이 됐을까. 박 대표는 지난 9월 AFM의 아이디어를 창안하고 발전시킨 공로로 ‘제2의 노벨상’이라는 카블리상을 받은 스탠퍼드대 물리학과 켈빈 퀘이트(93) 명예교수의 애제자이기도 하다. 퀘이트 교수와 같이 연구한 스위스 취리히 IBM연구소의 게르트 비니히(69) 박사는 1986년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의 발명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STM과 AFM은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개발된 STM이 탐침(바늘)으로 관찰 대상의 표면에 전자를 쏘아준 후 전자가 터널링을 일으키는 현상을 통해 시료의 구조를 알아내는 현미경이라면, AFM은 탐침과 물체 사이에 상호작용하는 힘을 대상 측정에 이용하는 원리다.

박 대표의 스탠퍼드 박사학위 졸업논문(1987년) 제목이 ‘표면물리를 위한 주사터널링현미경(STM for surface science)’이다. 세계적인 교수 아래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분야의 최신 이론을 공부했으면, 으레 미국이나 아니면 한국에서 교수의 길을 가야 할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는 창업의 길을 선택했다. 왜 창업을 택했느냐고 물었다. 한국적 사고방식의 우문(愚問)이었다. 그는 “내가 연구한 기술은 과학은 물론 산업계에도 유용한 장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창업을 선택했다”며 “퀘이트 교수님도 흔쾌히 찬성하셨고, 당시 대학 분위기도 실리콘밸리 창업 붐에 한창 빠져들 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창업하겠다니 정작 고국에서 난리가 났다. 1987년 학위를 마치자 모교인 서울대에서 물리학과 교수로 오라는 소식이 왔다. 서울대 교수직을 거부하고 회사를 차리겠다고 하자, 한국 지인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라며 당장 마음을 고쳐 먹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박 대표는 “졸업 후 한국에 잠시 들어와서 고민에 빠졌다가 미국에 다시 돌아갔더니 마음이 정리됐다”며 “‘서울대 교수가 되려는 사람은 줄을 섰으니 굳이 나까지 나서서 남의 기회를 뺏을 필요가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장비를 공급해주는 사업을 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고 말했다. 물론 만약 사업이 잘 안되더라도 그때 가서 귀국해 교수로 활동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박 대표는 졸업하고 1년 후인 88년 단돈 4만 달러로 팔로알토의 한 차고에서 AFM 제작 업체 PSIA(Park Scientific Instruments)를 차렸다. 첫 매출처는 창업 1년 후인 89년 독일의 대표적 연구기관 막스플랑크였다. 퀘이트 교수의 제자가 AFM을 만든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 과학계에서는 논문으로 발표된 AFM이 언제 실현될 수 있을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막스플랑크에서는 6개월 안에 현미경을 납품해 달라고 했다. 연구소 회계처리 때문에 그 해 안에 연구장비를 구입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박 대표가 “6개월은 너무 촉박해서 안 된다”고 답하자, 막스플랑크측에서는 “89년 12월 안으로 빈 박스만 보내고, 제품은 ‘사후 수리’ 명분으로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첫 AFM 한 대를 10만 달러에 수출했다.

그렇게 9년을 미국에서 사업하다가 회사를 매각하고 9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회사는 지금 시장점유율 세계 1위인 미국 과학장비 히사 브루커의 일원이 돼 있다. 미국도 좋지만, 고국에서 첨단 현미경 제작 업체를 키워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첫 5년 간은 서울 서초동에서 AFM 완제품을 수입하거나, 핵심 모듈을 조립해서 판매했다. 직접 AFM을 제작해 판매한 것은 2002년부터였다.

실리콘밸리에선 인재 줄 섰지만…

한국에서의 사업은 쉽지 않았다. AFM 제작은 고도의 과학기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갓 시작한 중소기업에 박사급 전문 인력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당시에는 ‘벤처’라는 근사한 이름도 인식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대기업처럼 명문대 박사 인력에 맞는 월급을 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박 대표의 서울대 후배 등 개인 인맥을 통해 겨우겨우 사람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박 대표는 “10명을 설득하면 2~3명이 공감하고, 그중 한 명이 입사할 마음을 먹었다”며 “그 한 명도 나중에 가족이 반대해서 결국 퇴사했다”고 말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창업 당시 스탠퍼드 동문 후배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참여하겠다고 해서 인력 걱정을 할 필요가 없던 것과는 너무도 비교되는 현실이었다. 국내에서 창업 후 2~3년 간은 같이 일할 사람이 없어 헛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는 “벤처기업을 도와주어야 할 관청과 금융권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갑질을 하고 군림하려 들었다”며 “한국에 돌아와 창업한 것이 후회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때쯤 고민의 물꼬를 튼 게 병역 특례였다. KAIST와 서울대 등에서 석·박사과정 중인 고급 두뇌들을 병역특례로 받아들여 AFM 제작에 참여시켰다.

파크시스템스의 명성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져 있다. 회사 이름에 자신의 성(姓)을 넣어 파크시스템스(Park Systems)라 지은 것도 스탠퍼드 퀘이트 교수의 제자 박 박사가 만드는 AFM은 믿을 수 있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박 대표는 “원자현미경은 그간 나노기술 발전을 주도해왔고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나노산업 시대에 나노 계측 분야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파크시스템스가 과거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강소기업의 진면목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1355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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