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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25)] 조세 감경, 균등 과세 주장했지만…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송상기의 대사헌 사직 상소... 양역제도 개혁 적극 주장

‘돌아갈거나!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니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티끌세상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되나니, 항상 답답하고 슬프구나! 옛적엔 내 뜻이 크고도 당당했었지. 하지만 슬프게도 옛 사람 따를 수가 없네.’([옥오재집]).

세상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학문을 벗 삼으며 은일의 삶을 살고 싶었으나 정쟁 속에 귀양을 가고 결국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3). 관직에서 벗어나고 싶어 매번 사직상소를 올리던 그였지만 사대부로서의 책임감은 국정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함께 남겼다. 사직을 요청하며 양역(良役) 변통을 논한 상소가 대표적이다.

백골징포·황구첨정 … 양역의 폐단 잇따라

1715년 9월 25일, 송상기는 맡고 있던 대사헌과 겸직하고 있던 대제학에서 모두 해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병세가 더해지기만 하고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어서 자리에 누워 밤낮으로 신음하며 괴로워하고 있으니, 업무에 힘을 쏟을 가망이 전혀 없나이다. 지금 소패(召牌,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패)가 내려왔는데도 끝내 달려 나가지 못하니 참으로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이하 인용의 출처는 모두 [옥오재집]). 그런데 사실 이때 그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실록에 보면 며칠 지나지 않아 멀쩡하게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나온다. 칭병은 의례적인 핑계이고, 요직인 대제학과 대사헌을 겸임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덜고 지지부진한 양역 개혁 작업에 대해 임금의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 의도로 판단된다. ‘또한 신이 품은 생각이 있어서 감히 여기에 덧붙여 말씀드리니 성스럽고 명철한 전하께옵서 살펴 처리해주시기를 바랍니다…(중략)…얼마 전 전하께서 양역의 고질적인 폐단을 깊이 염려하는 비망기를 내리시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감격한 바 있습니다. 진실로 이 기회를 통해 그 법을 잘 바꾼다면 수백 년 동안 누적된 폐단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 것이고, 팔도의 백성들도 편안해질 것입니다.’

양역(良役)은 양인(良人, 천민을 제외한 백성)이 부담하는 부역(賦役)이라는 뜻으로 16세에서 60세 사이의 성인 남자가 졌던 각종 신역(身役)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일정 기간 군대에서 복무하는 ‘군역’이 주된 형태였는데, 직접 군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대신 국방 경비를 부담하는 차원에서 군포 2필을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대기근 등을 거치면서 17세기의 조선 인구는 급감했고, 이에 비해 전후 복구와 국방력 확충 등 재정 수요는 오히려 크게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백성들이 짊어지는 부담이 몇 배로 가중된 것이다. 고을수령들도 할당량을 채우고자 무리하게 군포를 거둬들였는데,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더욱이 양반이나 부유한 평민들은 징세대상에서 빠져나가면서 백성들의 원성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진다. 조정에서 양역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 이유이다.

하지만 양역을 개혁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징수대상을 확대하는 것, 즉 양반에 대한 면세를 폐지하는 것이었지만 반발이 워낙 거셌던 탓이다. 송상기 역시 이 부분을 거론한다. ‘지금 각 고을에는 역호(役戶)가 있고 유호(遊戶)가 있습니다. 유호는 곧 사대부, 유생(儒生) 등 신역의 의무를 지지 않고 한가롭게 노니는 자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양역을 부담하는 사람의 숫자는 사대부 이하 이들 한가롭게 노니는 자들의 숫자에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 양역을 담당하는 가호(家戶)를 한가롭게 노니는 자들의 가호에 비교해 본다면 각 고을의 상황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반드시 유호가 역호보다 많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 해 경기와 호남에서 바쳐야 하는 군포의 수와 각 고을별 가구 수를 비교해 보니, 가구 수가 군액(軍額)보다 두 세배나 많았습니다. 물론 경기와 호남, 충청, 영남 등은 양반이라 불리는 자들이 다른 도에 비해 많은 편이니, 서북 지역 도의 경우도 모두 이와 같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본래 군포 2필을 바치던 자들에게 1필을 감면해주고자 한다면 그 나머지 1필은 유호(遊戶)에게 분담시키소서.’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대신 그 부족분을 양반에게 청구하자는 것이다. 조세 감경과 조세 균등 과세를 함께 구현하자는 주장이었다. 송상기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먼저 각 고을에서 바치는 모든 종류의 납포를 파악하고 몇 사람이 바치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또 그 고을의 호적을 살펴보아 역호와 유호를 구별하여 많고 적음을 비교해야 합니다. 만약 역호가 적고 유호가 많다면 1필로 낮추더라도 납부하는 숫자는 예전에 비해 증가할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혹 유호가 적고 역호가 많아 납부량이 전보다 줄어들지라도 다른 지역의 초과량을 덜어 더해준다면 국가에서 쓰는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실제 호적과 군적 장부를 면밀히 조사하고 시스템을 새로이 정비해 이를 뒷받침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신하들은 이를 동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백성들의 원성을 못 이겨 개인에게 부과된 군포를 줄여주자고 주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결손분을 양반에게 부담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가 우세했다. 송상기는 답답함을 표시한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기에 힘쓰시는데 있어 대신들이 그저 신포(身布)를 줄이자고만 하는 것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합니다.’ 국가 재정은 생각하지 않고 포퓰리즘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양반의 부담은 반대하는 포퓰리즘적 행태 비판

그러면서 송상기는 이렇게 상소의 끝을 맺는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도(道)를 의논할 때는 자신이 깨우친 것에서부터 해야 하고, 법(法)을 만들 때는 백성의 처지를 고려해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법이 비록 좋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법이 제대로 행해지게 됩니다. 이른바 도에는 수많은 것이 있지만, 공자께서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한 말과 [주역]의 ‘제도로써 절약하여 재물을 낭비하지 않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지금 개인이나 나라나 창고가 텅 비어있고, 저축해 놓았던 것도 모두 써 버렸습니다. 진실로 위에서 덜어 아래에 더해 주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되 불필요한 낭비를 막음으로써 실질적인 은혜가 아래 백성에게까지 고루 미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굶주리고 쇠약해진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설령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가 있더라도 신은 한갓 헛된 문장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백성을 위한 제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위에서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설령 자신들이 손해를 입을지라도 먼저 나서서 책임을 더 져야 나라가 고르게 발전할 수 있다. 백성의 부담을 덜어준다면서 그 부담을 함께 짊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 송상기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60호 (201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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