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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일 새한㈜ 대표] 직원들과 똘똘 뭉쳐 회사 되살렸죠 

 

충주 =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옛 새한그룹 계열사 지분 인수해 변신... 국내 가구용 나사못 시장점유율 1위

▎사진:김성태 기자
6평(약 19.8㎡) 남짓한 방 한쪽 벽 앞엔 1998년 수상한 ‘5백만불 수출의 탑’이, 앞쪽에는 80~90년대에 흔히 봤던 비디오·오디오 테이프가 전시돼 있다. 충북 충주 남한강변 충주 제1일반산업단지에 자리잡은 중소기업 새한전자의 정순일(61) 대표의 방은 추억의 공간처럼 보였다. 비디오·오디오 테이프는 일반인의 삶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젠 컴퓨터 본체에서 CD롬마저 보기가 쉽지 않다. 음성이나 영상 기록은 모두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손톱만한 반도체에 들어가버렸다.

정 대표는 현대사 속 추억에서 회사를 이끌고 헤쳐나온 경영인이다. 새한은 11월 30일 대한상공회의소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하는 2016 기업혁신대상에서 중소기업부분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그룹의 해체와 비디오 사업의 급감에 따른 경영위기를 극복하고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 부품 업체로 제2 도약 중

새한전자는 한때 범(凡) 삼성가인 새한그룹의 계열사였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2남 고(故) 이창희 회장이 이끌었던 그룹이다. 주력 계열사인 새한미디어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비디오 테이프 시장의 27%를 차지해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새한그룹은 당시 매출이 1조원을 넘었고, 재계 순위 20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새한전자는 옛 새한미디어의 자회사였다. 새한미디어가 전 세계에 비디오·오디오 테이프를 팔 때, 자기 테이프를 제외한 플라스틱 새시와 나사 등 각종 부품을 공급했다. 정 대표의 방에 남아있는 1998년 오백만불 수출의 탑도 그 흔적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정보기술(IT) 산업의 발달로 비디오테이프가 외면받으면서 새한그룹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시대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해 변신에 실패한 결과였다.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 모기업 새한미디어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이후 새한그룹이 공중분해되면서 새한전자도 부도위기에 처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을 뛰어넘은 2016년, 새한전자는 가구용 나사못과 경첩·전력기기 등을 생산·판매하는 전문 부품 업체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가구용 나사못 하나로 국내 시장의 55%를 차지하고 있는 강소기업이다. 못의 끝을 쐐기처럼 만들고 머리 부분을 변형한 기술로 한국은 물론 미국·일본·중국 등지에 실용신안등록을 했다. 톱밥을 압축해 만든 가구용 합판에 나사못을 넣으려면, 기존에는 드릴로 먼저 못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새한전자의 나사못은 가구 조립작업을 기존 2단계에서 1단계로 줄여 시간과 비용을 모두 줄여줬다. 덕분에 지난해 매출은 270억원. 영업이익도 12억원을 올렸다.

새한그룹 해체 이후 지금까지 새한전자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 대표는 새한그룹의 주력 새한미디어 입사 1기생이다. 정 대표의 직장생활을 기록하면 새한그룹의 역사가 된다. 그는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75년 새한미디어에 생산직으로 입사했다. 당시 국내 최초로 생산에 들어간 비디오·오디오 테이프의 플라스틱 틀을 만드는 사출 파트에서부터 일을 배웠다. 국내 최초·유일의 비디오테이프 생산 업체였던 새한미디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갔다. 그는 “입사 후 3년 간은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회사에서 먹고 자며 미친 듯 일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입사 1기생이었던 정 대표는 고졸 사원이었지만, 회장의 신임을 한 몸으로 받았다. 1988년 대형 화재로 공장이 전소됐지만, 생산부 차장이었던 박 대표가 실무작업을 주도해 공장을 이전의 두 배로 확장했다. 회사는 8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91년 위기가 찾아왔다. 창업주 이창희 회장이 백혈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구심점을 잃은 회사는 휘청댈 수밖에 없었다. 1992년에는 정 대표도 자회사인 당시 새한전자의 생산·관리담당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듬해 정 대표도 백혈병에 걸렸다. 희한한 우연이었다. 그는 “어느날 아침 일어났는데 피곤하고 어지럽더니 양치질을 하는데 이 사이에서 피가 나오고 지혈도 안 됐다”며 “병원에 갔더니 백혈병이라는 청전벽력같은 진단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그 전에도 후에도 새한에서 백혈병에 걸린 사람은 오너인 이창희 회장과 정 대표뿐이었다.

정 대표는“돌아가신 회장님의 부인인 이영자 회장님과 회사 직원들이 나를 살렸다”며 “병원 입원·수술 비용을 모두 회사에서 지원해준 것뿐 아니라 후배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130번 넘게 나에게 헌혈을 해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 대표는 투병 3년 만에 기적같이 회복해 새한전자로 복귀했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됐다. 비디오 테이프 시장이 급속하게 위축되기 시작한데다 수년 후에는 외환위기까지 닥쳤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었다. 그는 부장 신분으로 대표이사로 올라 회사 살리기에 나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영은 악화됐다. 한때 70명이 넘던 직원은 15명으로 줄었다. 2007년 결국 대표직을 사임하고 회사를 떠나야 했다. 모기업인 새한미디어도 2010년 GS그룹 계열인 코스모화학으로 넘어가 이제는 코스모신소재라는 전혀 다른 회사가 됐다.

2009년 초, 집에서 쉬고 있던 정 대표에게 뜻하지 않는 제안이 들어왔다. 오너인 이영자 회장이 정 대표에게 회사를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남아있는 직원들도 “새한전자를 살릴 사람은 사장님 밖에 없다”고 매달렸다. 고민 끝에 은행빚과 지인들에게 빌린 돈은 긁어모아 회사 지분의 60%를 인수했다. 그리고 한계에 이른 기존 사업을 과감히 접었다. 대신 기존 기술과 설비를 이용해 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찾았다. 지금은 국내 시장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구용 나사못은 그렇게 시작됐다. 정 대표는 “생산과 관리만 하던 직원들이 영업사원이 돼 전국의 가구공장과 유통 업체를 찾아다니며 새한 나사못의 우수성을 알렸다”며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회사와 직원이 한가족처럼 신뢰를 나누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옛 오너 부인 “회사 맡아 살려달라”

최근 새한전자는 30년 이상 써오던 회사명을 새한주식회사로 바꿨다. 회사의 새로운 주력 상품이 된 가구용 나사못과 경첩, 부엌가구용 플라스틱 제품 사출 등이 전자회사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한이라는 그룹 모태의 이름도 지키면서 어울리는 사명을 찾다 보니 다소 평범할 수 있는 새한으로 귀결됐다.

새한㈜는 올해부터 도약기에 들어섰다. 지금까지 내수기업이었지만, 내년부터는 일본 수출도 시작한다. 한샘 등 가구전문 업체들과 공급계약도 확대될 전망이다. 올해 매출은 연말까지 4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각종 공급처와 중장기 계약을 바탕으로 예측한 2020년 매출은 1000억원대다. 물론 모든 조건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을 전제로 한 계산이긴 하다. 정 대표는“이제 새한이라는 옛 이름과 직원들을 품고 남아있는 회사는 우리 밖에 없다”며 “죽어가던 회사를 직원들과 함께 살려 낸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1364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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