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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찬 칼럼] 기업이 저축왕 돼서야 

 

한국외대 겸임교수(경제저널리즘 박사)

▎한국외대 겸임교수(경제저널리즘 박사)
2016년은 한국 금융의 역사를 새로 쓴 시기로 기록된다.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려 쓰는 주체인 기업 부문의 연간 자금부족 규모가 1조원으로 사상 최저를 기록해서다. 경제개발이 본격화한 1973년 이래 가장 적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자금부족 비율(-0.1%)로는 한국은행이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63년 이래 가장 낮다. 특히 지난해 3분기에는 4조5000억원 순잉여가 발생했다. 비록 한 분기이지만 한국 기업 전체적으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 남아돌아 저축하거나 회사 금고에 보관했다는 의미다.

가계야 은행 대출이나 개인 돈을 꾸지 않고 저축할 여유가 있다면 박수받을 일이지만 기업은 그렇지 않다. 경제가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선 기업들이 생산설비를 늘리기 위한 투자 지출이 많아서 자체 조달한 자금 외에 추가로 돈을 빌어다 쓰는 구조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 기업 부문의 자금부족 규모가 줄어들다 못해 자금잉여 현상까지 빚은 것은 상당수 기업의 투자가 감소하고 저축은 증가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확실성이 커지자 보수적 투자 성향을 보이며 내부유보를 늘렸다. 지난해 말 기준 3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807조원으로 추산된다.

기업경영의 글로벌화로 해외투자를 늘리고 국내 투자를 줄인 점도 영향을 미쳤다. 넓은 시장과 싼 인건비를 좇아 해외 자회사가 벌어들인 이익 또한 국내로 송금되면서 모기업의 자금부족 규모를 줄이거나 저축을 늘렸다.

저금리 상황에서 기업들의 차입금 이자 부담이 그전보다 적고, 비정규직이 늘어남에 따라 근로자에 지급되는 임금 비중이 줄어든 점도 기업 부문 자금잉여를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계가 저축한 돈을 기업이 빌려 투자와 고용을 해야 정상인데 작금의 한국 경제는 기업이 은행에 저축한 돈을 가계가 빌려 아파트를 사고 전세금을 내는 비정상 상황이다. 경제의 혈액인 돈이 거꾸로 돌아가니 기업투자와 가계소비가 부진의 늪에 빠지며 경제성장률도 낮아질 수밖에. 기업 부문 자금부족 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든 것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다. 1990년 이후 지난해까지 27년 동안 연평균 자금부족 규모는 44조원이다. 이것이 2013년과 2014년에 각각 28조원으로 줄더니만 2015년 11조원으로 감소했고, 지난해엔 1조원에 그쳤다. 이 시기 성장률은 2014년만 빼곤 2%대를 맴돌았다.

요컨대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거나, 투자를 하지 않아 현금 유동성이 쌓인다. 세금이 예상보다 더 걷혀 정부 재정수지도 잉여다. 3대 경제주체 가운데 유독 가계만 부채가 늘어나는 구조다. 해법은 경제주체들 간 자금 선순환, 기업과 정부의 자금잉여를 가계 쪽으로 돌리는 데서 찾아야 한다. 5월 9일 대선으로 선출될 새 대통령과 정부가 새겨야 할 정책의 골간이다. 기업들이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를 만들도록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게끔 세제 인센티브도 주고, 기업들로서도 기업가정신을 회복해 ‘투자왕’ ‘고용왕’이 되어야지 가계처럼 ‘저축왕’으로 뽑혀서야 되겠는가. 정부도 재정을 확대 집행하는 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실업급여 등 사회안전망 강화와 복지 확대, 무상보육 등을 통해 가계소득을 간접적으로 보전하는 효과가 나도록 해야 한다.

1383호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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