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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의 디지털 인문학]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 

 

김경준 딜로이트 경영연구원장

인간은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나는 특별하다’는 감정은 세상을 살아가는 에너지로도 기능한다. 평범한 집안의 가장이라도 조상 중에서 훌륭한 사람을 찾아 모범으로 삼고 구성원의 자부심으로 삼는다. 인간은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소속감과 자부심의 원천이 될 신화와 전설도 만들었다. 고대 세계의 생활환경의 특징을 반영해 형성된 신화와 전설은 공동체의 경험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면서 특유의 세계관·가치관으로 연결됐다. 이런 배경에서 신화에는 상상력의 산물뿐만 아니라 집단 형성 과정의 정수도 압축돼 있다. 10만장의 기록을 역사로 정리하면 1000장으로 요약되고, 1000장의 역사를 다시 1장으로 압축하면 신화가 된다.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 접하는 단군신화(檀君神話)는 판타지의 세계다. ‘하늘의 신(天神)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3000명을 거느리고 땅으로 내려왔다.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여러 신과 세상을 다스리는데,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하여 환웅은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 100일 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참을성 많은 곰은 삼칠일(三七日)을 견뎌 사람이 됐고(熊女), 환웅과 결혼해 아들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했다. 이후 아사달로 천도해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를 실제 사건의 묘사가 아니라 고대 국가 성립의 역사를 신화 형태로 압축했다는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시베리아 북방계와 동남아시아 남방계의 두 갈래로 보고 북방원류가 시베리아 바이칼호 근방에서 발원했다는 입장을 수용하면 초기 이동과 건국의 경로가 신화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바이칼 근방에서 하늘을 숭배하는 부족의 한 갈래가 남방으로 이동해 태백산 근방에 나라를 세웠다. 유입된 이민족에 대해 기존 세력을 대표하는 2개의 부족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호랑이를 부족의 상징물, 토템으로 삼던 부족은 도래한 이민족에 저항했지만, 곰을 부족의 상징물, 토템으로 삼던 부족은 협력해 신생 국가에 참여하고,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는 주요 부족으로 자리잡았다는 해석이다. 신과 인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기록물을 남기기 어려웠던 고대에서 수백년에 걸친 이동과 정착의 역사가 신화로 압축된 상징의 형태로 후대에 전해졌다는 관점의 해석이다.

서양의 대표적 신화인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도 그리스 형성의 과정을 읽을 수 있다. BC 25세기경 크레타 문명에서 시작돼 트로이·미케네를 거쳐 BC 4세기 아테네를 중심으로 만개한 그리스 문명의 태동기를 신화를 통해서 접근해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개념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서 유래한다. BC 8세기 헤시오도스는 [신통기(神統記)]에서 우주의 생성, 제우스의 최고신 등극, 기타 신과 영웅의 탄생을 계보적으로 정리해 산발적이던 그리스의 신화군을 조직화했다.

동시대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도 성립됐다. 신통기에 따르면 세상은 공허인 카오스에서 출발해 가이아(대지)와 우라노스(하늘)가 출현해 둘이 결합해 거인족 티탄이 생겨났다. 티탄족은 아버지 세대인 우라노스를 거세시키고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아들인 제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사라지고, 최고신 제우스와 형제자매가 올림포스산에서 세계를 지배하게 됐다.

이 시기에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해 신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이어지는 영웅시대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인 헤라클레스·아킬레우스 등이 나타나 활약하는 시대다. 신과 영웅의 시대 이후 BC 6세기 무렵 최초의 서양 철학자인 탈레스가 등장하고, BC 5세기 아테네 민주정 시대에 소피스트가 나타나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전환하면서 인간과 이성의 시대가 열린다.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가 유적과 유물의 발견으로 실제 역사로 편입된 유명한 사례가 ‘트로이 전쟁’이다. 일리아드에 따르면 트로이가 그리스 미녀 헬렌을 납치하면서 그리스 연합군과 전쟁이 발발하고, 트로이 영웅 아이네아스, 헥토르, 파리스와 그리스 영웅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등이 참전했다. 10년 동안 승부를 내지 못하던 중 그리스가 위장철수하면서 목마를 만들어 병사를 숨겨놓았고, 승리로 착각한 트로이 군대가 목마를 성 안에 들여놓는 바람에 패전하게 됐다는 줄거리다.

지금도 소설·영화·드라마로 수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의 원천이지만 당초 신화시대의 허구로 인식됐다. 그러나 1871년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면서 실체가 확인되고 트로이의 존재와 그리스의 전쟁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았다. 역사적 실체는 현재 터키 서쪽 다르다넬스 해협 근방 흑해 입구에 위치해 당시 선진 지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와의 중개무역으로 번성하던 트로이를 그리스 지역에 근거지를 둔 미케네 세력이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고, 트로이가 멸망하면서 에게 문명은 소멸하고 그리스 반도로 주도권이 이전됐다는 해석이다.

신화 형태로 압축된 2000년에 걸친 고대 그리스 세계의 태동기는 신과 영웅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이 세상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이다. 신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가 특징이다. 신화에서 신과 인간은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서 태어난 형제로서 신들도 인간처럼 불완전하고 갈등하고 질투한다.

신과 영웅은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노력하는 인간을 도와주는 수호신의 개념이었다. 그리스 종교에서는 신화만 있을 뿐 경전이 없고 신탁을 주관하는 무녀 외에는 별다른 사제도 없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종속적으로 보지 않고 독립적으로 보았기에 인간의 이성과 지식이 중심이 되는 철학이 태동했고,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민주정이라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발전시키는 토대가 됐다.

지역별 신화와 전설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옥수수와 코요테, 중앙아시아는 늑대와 곰, 아프리카는 사자와 표범이 흔하다. 선사시대 인간들은 주변 자연계와 연계시켜 세상의 창조, 부족의 형성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성립시키고 공동체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근원으로 삼았다. 이런 초기 신화의 특성은 이후 문명시대 공동체의 사회·문화적 특성으로 연결되고, 오늘날 각국에 특유한 기업문화에까지 맥락이 이어진다.

※ 필자는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1세기 글로벌 기업과 산업의 변화를 이해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융합형 경영전문가로 평가받는다.

1405호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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