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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김광균 作 와사등의 ‘이스털린의 역설’ 

 

박병률 경향신문기자
소득이 일정 수준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도 더 행복해지지 않는 현상

초겨울 저녁, 일찍 해 저문 스산한 퇴근길에 문득 고개 들다 껌뻑거리는 가로등과 눈이 마주치면 불현듯 시 한편이 떠오른다. 김광균의 ‘와사등’. 와사등(瓦斯燈)이란 석탄가스로 불을 밝히던 가스등이다. 1930년대에는 거리를 비추던 가로등이었다.

쓸쓸하고 서글픈 밤 풍경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있다’. 김광균은 시 ‘와사등’을 이렇게 시작한다. 첫 단어인 ‘차단한’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차단한’이란 ‘차디찬’이라는 뜻. 사전에는 없는 용어. 그러니까 시적 허용이다. 풀이하자면 ‘차가운 등불이 텅빈 하늘에 걸려있다’는 뜻이다. 이보다 더 쓸쓸하고 서글픈 밤이 있을까. 김광균은 덧붙인다. ‘내 호올로 어데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김광균은 정지용·김기림과 함께 1930년대를 대표한 모더니즘 시인이다. 모더니즘이란 개인주의와 도시문명이 가져온 인간성 상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던 문예사조를 통틀어 말한다. 표현적으로는 시각적 요소를 강조해 주지주의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래서 김기림은 “시는 회화다”라고 말했다. ‘와사등’은 도시적 감수성이 모더니즘에 제대로 녹아 든 작품이다. 시를 읖조리다 보면 저녁길 정경이 떠오르면서 마치 회화 한편을 보는 착각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긴-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황혼에 젖어/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어떤가. ‘언어를 갖고 그린 그림’이라는 평가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김기림은 김광균의 작품에 대해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조(才藻:시적 문장에 대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찬사했다. 와사등은 1930년대 일본 강점기에 조국을 잃고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조선 지성인의 상실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시대를 옮겨 21세기 도시문명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에 접목해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

‘공허한 군중의 형렬에 섞이어/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만석이 된 버스에, 지하철에 몸을 싣고 퇴근하는 직장인의 모습이 딱 이 짝이다. ‘와사등’은 1938년 조선일보에 실린 작품이다. 얼추 80년이 지났지만 도시의 공허한 그림자는 갈수록 길게 드리워진다. 1930년대는 아직 발아 중이었던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 내리면서 비애는 더 무거워졌다. 무한경쟁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자본주의는 한국인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일하는 일개미로 만들었다. 주머니는 과거보다 훨씬 두둑해졌다지만 한국인이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은 2000년 초반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됐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9위(2017년)지만 유엔의 세계행복리포트에 공개된 행복순위는 56위(2014~2016년 평균)에 그친다. 돈을 가진 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과도한 경쟁, 많은 노동시간, 공동체에 대한 낮은 신뢰, 국가에 대한 불신, 집단주의 성향의 문화 등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결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행복도가 낮아지는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스털린의 역설로 설명된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미국 경제사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이 1972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의 사례를 조사해보니 개인소득이 이전보다 33%나 늘어났지만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은 감소했다. 한국 노동연구원 조사를 보면 한국인은 연소득 1억800만원까지는 행복도가 오르지만 이후는 감소한다고 한다.

김광균의 시가 시각적으로 변하는 데는 인상파의 작품이 큰 영향을 미쳤다. 김광균은 고흐의 ‘수차가 있는 가교’를 처음 본 후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김광균은 낭만적 감수성이 넘쳐나는 천상 시인이었지만 세상은 그를 그 자리에 두지 않았다. 김광균은 어릴 때부터 시를 쓰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 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김광균은 송도상고에 진학했고, 졸업 후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에 취직했다. 김광균은 퇴근한 후 명동 일대의 다방과 대폿집을 서성이며 시인과 화가들과 교유했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의 시 ‘설야’가 당선됐다. 그는 사표를 던지고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1939년 첫 시집 [와사등]이 발간됐고, 1947년에는 두 번째 시집 [기항지]가 발표됐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합리적 경영자가 되기를 바랬다. 한국전쟁 당시던 1952년 동생이 납북됐다. 김광균은 동생이 운영하던 무역업체인 ‘건설상회(훗날 ‘건설실업’으로 개명)’를 이어 받는다. 그는 건설실업을 중견기업으로 키우며 1960~1970년 경제개발 시기 경영인으로서의 수완을 발휘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이사, 국제상사중재위원회 한국위원회 감사, 무역협회 부회장, 한·일경제협력특별위원회 상임위원 등 맡은 직책도 굵직했다. 구상은 “현대시의 ‘맏형’인 T.S. 엘리엇이 은행원으로서도 훌륭했다더니 기업가로 일가를 이룬 김광균 이야말로 한국의 엘리엇이 아닌가?”라고 김광균을 평했다. 김광균의 기업가적 성공 이면에는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시적 감수성이 한몫했을 가능성이 크다.

방황하는 현대인의 자화상과 닮아

김광균의 기업가 핏줄은 GS그룹으로 이어지고 있다. 딸 김영자 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는 GS창업주의 5남인 고 허완구 승산회장의 부인이다. 허용수 GS EPS대표, 허인영 승산 대표가 그의 자녀로 김광균의 손주다. 허용수 대표는 지난해 말 GS그룹의 지주회사인 GS의 지분 4.82%를 확보해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허창수 회장(4.75%)보다 지분이 많은데 허 회장이 2대주주로 밀린 것은 GS그룹 출범 이후 처음이다. 지난 1년 새 허용수 대표의 담보 주식가치가 GS오너일가 49명 중 가장 많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향후 그룹 승계작업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내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와사등의 마지막 싯구다. 화자는 끝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다. 어디 화자뿐이랴. ‘차단한’ LED 가로등 밑에 선 현대인 중 내 갈 길을 제대로 아는 사람, 몇이나 될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저성장 시대는 종종 가장의 어깨를 짓누른다.

1419호 (201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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