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반기업 정서의 실체와 기업인의 책임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공유경제(共有經濟)는 어딘지 부적절하고 불편한 느낌을 주는 용어다. 공유(共有)의 사전적 의미는 두 사람 이상이 같은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공유경제는? 알다시피 공유경제는 에어비앤비(Airbnb, 2008)와 우버(Uber, 2009)가 주도하는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일컫는 영어의 ‘sharing economy’를 우리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공유의 사전적 의미와는 무관하다. 소유권이 분명한 집이나 자동차 또는 어떤 물건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고 여럿이 번갈아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굳이 따지면 공동 소비에 방점이 있다.

우리는 이름만 듣고도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선입견을 갖는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름은 프레이밍 효과가 세다. 모든 이름은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과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 소유를 연상케 하는 공유경제라는 한국식 표현은 ‘sharing economy’의 경제 트렌드를 제대로 짚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자칫하면 오해마저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마르크스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그리고 하딘(Garrett Hardin)이 사이언스에 게재했던 유명한 논문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 1968)’을 알았다면 아마도 공유경제라는 표현을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sharing economy’를 공향경제(共享經濟)로 표현한다. 소유의 측면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소비의 측면을 부각한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짓는 태도부터가 다르기 때문일까? 중국의 공향경제는 날개를 달고 발전하는 반면에 한국의 공유경제는 규제와 기득권의 늪에 갇힌 채 지지부진하고 있다.

이보다는 덜하지만 반기업 정서라는 표현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우리는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국민 일반의 부정적 인식과 비판적 태도를 반기업 정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인식(認識)의 문제를 마치 정서(情緖)의 문제인양 오독하게 만든다.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하느냐는 직관적인 감정 작용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지식과 반복적인 경험에 기초한 합리적 추론의 결과일 수 있다. 반기업 정서의 본질은 정서 외에도 지식, 가치관과 문화, 신뢰의 문제가 결합된 복합적 현상이다.

이름 탓인지 당사자인 기업인들이 반기업 정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이대로 방치하면 시장경제질서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는 위태위태한 상황임에도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 큰 기업들은 회사 안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담당하는 CSR 팀을 두고 반기업 정서에 대응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속 내용을 보면 반기업 정서의 실체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정서에 기대어 환심을 사려는 사회공헌 활동 중심이 대부분이다. 반기업 정서를 정말로 100% 정서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효과적 대처를 가로막고 있는 모양새이다.

최근에는 반기업 정서가 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개인적 일탈 사건에서부터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장 과정의 의혹에 이르기까지 이러다 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게 반기업 정서 확산에 기여하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있다. 다음 차례의 불미스러운 주인공으로 우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회사도 있을 법하다. 그런 일은 없더라도 반기업 정서를 빌미로 정부 통제와 규제가 한층 더 강화될 수 있음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6월 개헌 논의는 물 건너갔지만 헌법 개정도 논의되고 있는 즈음이라 반기업 정서에 편승해 기업의 경제활동을 더 옥죄는 내용을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의 반기업 정서는 맑은 날에 갑작스런 먹구름과 함께 소나기 지나가듯 하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길게 그리고 멀리 보고 대응해야 한다. 그러자면 반기업 정서의 실체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기업인의 역할 또는 책임과 관련해서 몇 가지 부연하면 첫째, 반기업 정서는 감정 작용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기업 규제를 키우는 온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반기업 정서는 17세기 초 유럽에서 탄생한 주식회사 제도와 함께 해왔다. 애덤 스미스조차도 [국부론]에서 ‘개인 사업자와 달리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하는 주식회사는 나태와 방만함을 피할 수 없다’며 부정적 인식을 표명한 바 있다.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대기업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귀족 강도(robber baron)'로 희화했다. 20세기 중반에 복합대기업 제도가 확산되자, 미국의 경쟁당국은 마치 우리나라 공정위가 기업집단에 대해 하듯이 경제력 독점을 우려삼아 복합대기업을 규제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10년 전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 속에서 영국의 금융당국은 기관투자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도입했다.

둘째, 반기업 정서를 개선하지 않으면 규제개혁은 요원하다. 규제의 원형은 정치인이 만들고 정치인은 여론이 옳든 그르든 여론을 추종한다. 정치인에게 기회비용의 개념은 무용하다. 우리나라 반기업 정서의 문제는 단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높은 수준이 추세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반기업 정서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도 액센추어(Accenture) 보고서 탓이다. 여기에서 한국의 반기업 정서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그리고 최근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비롯해 여러 국제기관에서 조사한 결과를 비교해 봐도 한국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을 구가한다. 반기업 정서와 규제 부담은 궤를 같이 한다. 역대 정권에서 규제개혁을 그렇게 주창했어도 규제는 오히려 늘고 규제의 품질이 개선되지 않은 것은 높은 반기업 정서의 탓이 크다.

끝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반기업 정서는 변덕스러운 정서의 문제 이전에 지식의 문제이다. 시장원리와 기업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높은 사람일수록 기업과 기업인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교환가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들은 가격은 사용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투입 원가에 연동해서 결정되는 것이 정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에 비해 반기업 정서가 체계적으로 낮다. 기업의 사회공헌을 정리한 백서를 보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공헌 용도에 지출한 금액이 적지 않고 CSR 활동은 해마다 증가해왔다. 그런데도 반기업 정서는 개선되기는커녕 그 수위가 턱 밑까지 차오르며 자본주의 시스템을 위협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반기업 정서의 실체와 원인을 올바로 이해하고 CSR 활동의 비전과 목표, 전략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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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호 (201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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