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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걸테크가 로펌 대체할까?] 미국에서는 이미 ‘AI 검사’도 등장 

 

한정연 기자 han.jeongyeon@joongang.co.kr
한국은 아직 걸음마 수준…법률 서비스 비용 줄여주는 스타트업 속속 나와

▎사진:© gettyimagesbank
리걸테크 스타트업이 로펌을 대체할 수 있을까? 국내 법조계에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복잡하고 합리적인 판단은 판사·검사·변호사의 손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법률신문이 2017년 4월 연 ‘AI와 4차 산업혁명’ 좌담회 중 이기리 판사는 AI가 하지 못 하는 일들로 “고차원적인, 판례변경을 시도한다든지 전체 사건의 맥락을 짚어 전략을 세운다든지 하는 것”을 꼽았다. 같은 좌담회에서 신영식 부장 검사는 “양쪽 모두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자료가 있을 때는 아무리 고도로 발전한 AI라 하더라도 법조인을 대신해 합리적 의사결정을 하기는 어렵다”고 단언했다. 국내 리걸테크 스타트업의 시각도 비슷하다. 변호사 전화상담 서비스 등을 하는 로톡 정재성 부대표는 “(리걸테크가) 변호사를 대신하기보단 변호사 업무를 표준화해 사용자들의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위스콘신주 대법원은 2017년 5월 인공지능(AI) 시스템 ‘컴퍼스’ 알고리즘의 결과가 증거로 채택돼 중형을 선고받은 것이 부당하다는 피고측 항소를 기각했다. 위스콘신주 대법원은 “알고리즘의 한계와 그 비밀을 고려해야 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양형 법원에 활용 가능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컴퍼스는 노스포인트라는 스타트업이 만든 일종의 ‘AI 검사’다. AI 검사는 총격 사건에 쓰인 차량을 운전한 혐의를 받은 피고가 ‘폭력적이고 재범 가능성이 큰 위험 인물’이라는 보고서를 냈고 법원은 이를 채택했다.

미국 대법원, AI 보고서 증거로 채택


한국 검찰도 빅데이터 기반의 증거 분석 시스템을 실제로 쓰고 있다. 이 시스템은 대기업 압수수색 등에서 디지털 증거자료가 테라바이트(TB) 이상씩 나올 경우 문서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데 쓰인다. 복잡한 금융거래에서 차명계좌, 공범 관계 등을 찾아내는 데 효과가 좋다. 컴퍼스와는 달리 단순 분류·분석 작업이기 때문에 AI 검사 컴퍼스처럼 능동적인 역할은 아니다.

영미권에선 AI 변호사, AI 검사에 그치지 않고 AI 판사에까지 도전하는 리걸테크 기업이 늘고 있다. 지난해 1월 영국에서는 보험금 지급과 관련된 판결 결과를 유명 로펌 소속 변호사 100명과 리걸테크 스타트업의 판결 예측 AI 서비스가 각각 예측해 보는 대회가 열렸다. BBC는 AI 변호사가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고 보도했다. 775건의 판결을 예측한 결과 AI 변호사는 86.6%를 맞췄고, 유명 로펌 소속 변호사 100명은 66.3%의 적중률을 보여줬다. 당시 캠브리지대 로스쿨 학생들이 만든 이 프로그램은 ‘케이스 크런쳐’다. 이들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들과 함께 이 AI 프로그램을 상용화해 서비스하고 있다. 판결을 예측하거나 적당한 형량을 산출해내는 프로그램들은 더 있지만 아직까지는 법정에서 쓰이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없어질 일자리로 변호사를 꼽는 사람이 많다. 4차 산업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역시 빅데이터와 AI다. 2016년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을 처음 쓴 클라우스 슈밥은 “유비쿼터스 모바일 인터넷, 저렴하면서 작고 강력해진 센서,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이 디지털·생물학 등 거대한 분야의 기술이 융합해 교류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산업의 측면에서 보면 4차 산업혁명의 스타는 자율주행차, 머신러닝, AI, 로봇, 사물인터넷, 3D 프린터와 같은 익숙한 부문들이다. 이 부문들을 관통하는 건 데이터다. 빅데이터라는 말은 2006년 오라일리 미디어의 부사장 로저 마굴라스가 사용했다. 구글의 서비스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도구를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무척 많은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데, 이런 데이터를 다루는 데이터 사이언스라는 말이 처음 나온 건 2008년이다. 소셜미디어 링크드인과 페이스북의 직원들이 자신의 직업을 설명하면서 썼다. 구글에서 자율주행차를 연구했던 세바스찬 스런 유다시티 CEO는 “난 과거에 가능한 모든 경우에 대한 규칙을 프로그래밍 했지만, 이젠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입력한 다음 내가 원하는 것을 프로그램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머신러닝을 설명했다. 형량을 제안하고, 판결을 예측하며, 피의자의 죄질을 판단하는 일이 대체되는 게 법조계 생각처럼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 리걸테크 스타트업들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일단 시장 규모가 작다. 미국의 경우 법률시장 전체 규모는 GDP의 2% 수준이다. 리걸테크에 투자를 하고 있는 캐털리스트 인베스트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미국 법률 서비스 시장 규모는 4370억 달러이고, 이 중 리걸테크 시장의 규모는 160억 달러 수준이다. 로펌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규모가 94억 달러, 기업 법무부서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65억 달러다. 미국 로펌들의 53%가 지난해 리걸테크 서비스 예산을 상향 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법원 등 데이터 확보하기 어려운 한국

국내 대표적인 리걸테크 스타트업은 온라인 계약 서비스인 모두싸인을 개발한 로아팩토리, 고소장 소장 작성 및 변호사 검색과 전화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로톡, 법률 규정을 찾아보는 시간을 절약해주는 프로그램인 유렉스를 개발한 인텔리콘, 법인등기 지급명령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헬프미 등이 있다. 이들은 비싼 비용과 심적 부담으로 국내 법률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다는 점을 기회로 삼고 있다.

국내 리걸테크 시장이 확장하고 발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인으로 한국이 판례 중심의 영미식 불문법이 아니라 대륙법인 성문법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많다. 인텔리콘 메타연구소의 임영익 대표는 “판례를 중심으로 하는 영미법 계열 국가는 리걸테크가 변호사 자체를 조금씩 대체할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영미법 생태계와 달라 변호사 대체 현상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공 데이터 공개 범위가 한정돼 있고, 변호사 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점 등도 국내 리걸테크 산업에 불리한 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영준 로아팩토리 대표는 “AI로 어떤 서비스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데이터인데, 본안사건 중에서 법원이 운영하는 종합 법률정보 사이트에 판례가 공개된 비율이 0.19%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로스쿨 도입 이후 변호사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변호사 광고는 법적으로 제약이 많고 사건 소개 수수료도 법으로 제한돼 있다”며 “각종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내 대부분의 리걸테크 스타트업은 번호사 업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서류 작성 자동화 등으로 법률서비스 비용을 낮추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박효연 헬프미 대표는 “지급 명령의 경우 온라인으로 하게 되면 일반적인 로펌의 비용보다 80% 저렴하고, 등기나 상속 등은 25% 정도 싸다”며 “가격 차이는 서비스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됐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개발이 완료되면 비용은 더 싸질 것”이라고 말했다.

1437호 (201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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