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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지는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간섭] 4차 산업? 신기술? 국내 기업은 경영권 방어가 더 급해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반기업 정서에 경영권 방어막 약해…재계 “차등의결권·포이즌 필 등의 장치 필요”

국내 기업의 경영권이 위협받고 있다. 일부 헤지펀드를 비롯한 해외 투기자본이 틈만 나면 국내 기업을 공격하고 있다. 유력 기업일수록 특히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데다 반기업 정서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어 투기자본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기업은 투기자본의 공격을 막을 마땅한 방패가 없어 속수무책이다. 유일한 방법은 자사주를 늘려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인데, 그러기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이 때문에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과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다만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에 앞서 재벌 개혁이 급하다는 여론도 만만찮다.


▎사진:© gettyimagesbank
중국의 최대 전자상거래회사인 알리바바를 창업한 마윈 회장. 그는 회사를 창업한 이듬해인 2000년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을 만나 투자를 요청했다. 손 사장은 마 회장의 아이디어에 설득돼 알리바바에 당시로서는 거액인 2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알리바바는 2014년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손 사장은 지분율 34.4%로 알리바바의 최대주주가 됐다. 마 회장의 지분율은 손 사장의 3분의 1도 안 되는 8.9%. 하지만 알리바바는 ‘손정의의 회사’가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마윈의 회사’다. 차등의결권 덕에 창업주인 마 회장은 적은 지분으로도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리바바와는 달리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는 경영권 위협에 노출돼 있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은 52%가 넘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지분율은 20.1%다. 만에 하나 외국인 주주들이 이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이 부회장은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 놓인 국내 유력 기업이 상당수다. 이런 기업들은 우호지분 확보 등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쓰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기술 개발보다는 경영권 방어가 더 급한 곳도 적지 않다.

알리바바가 손정의 아닌 마윈 회사인 까닭은

최근 한국상장회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가 호소문을 통해 “일부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 간섭과 경영권 위협이 반복되고 있다”며 “경영권을 지킬 수 있는 방패를 달라”고 요구한 것도 그래서다. 단 1%대 지분으로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안을 무산시킨 미국 엘리엇매니지먼트(Elliot management, 이하 엘리엇)와 같은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 간섭이나 더 나아가 경영권 위협을 막기 위한 ‘방패’를 달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주 1의결권’이 원칙이어서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이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을 방어하려면 우호지분 확보 등 자사주 매입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 외에 몇 가지 간접적인 방어 수단이 있지만 실효성은 떨어진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서지원 연구원은 “2008년 법무부도 인정했듯 우리나라의 경영권 방어 수단은 자사주를 늘려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2003년 영국계 자산운용사인 소버린의 공격을 받았던 SK그룹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1조원이 넘는 돈을 써야 했다. 기업 유보자금을 경영권 방어에 쓰면 당연히 주주에게 환원될 이익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엘리엇이나 소버린이 국내 기업 경영진에 불만을 표출하거나 의견에 반대하는 것 자체는 사실 문제될 게 없다. 지분율이 단 1%라도 지분을 갖고 있는 주주이고, 주주로서 기업 경영진이 주주 이익 극대화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한다고 판단하면 주주총회를 통해 얼마든지 반대표를 던질 수 있다. 지분을 더 모은다면 경영 활동을 직접 간섭하거나 참여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기업 활동에 대한 감시 강화로 이어져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도 한다. 미국의 마켓워치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미국 상장사 244곳의 7년치 최고경영자(CEO) 보수를 분석한 결과 행동주의 펀드 개입 후 CEO 보수가 약 35만 달러 낮아졌다. 마켓워치는 이에 대해 “행동주의 펀드가 이사회에 진출해 CEO를 감시하면서 임원진의 과도한 성과급 등을 감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문제는 상당수 행동주의 펀드가 주주 이익 극대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에만 초점을 맞춘 투기자본이라는 점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엘리엇은 앞선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하면서 삼성전자에 분사와 특별배당을 요구했는데, 요구 자체는 주주로서 정당한 권리”라며 “그러나 주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여론전 등을 통해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에만 열중한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 간섭 지난해 662건


엘리엇과 같은 해외 투기자본은 처음에는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접근해 마치 주가 상승을 바라는 소액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겉으로는 기업의 이사회 선진화 등을 내걸고 있지만 속으로는 단기 이익 창출에만 관심이 있고, 회사의 장기적 경쟁력 강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언론을 통한 여론전으로 주주 흔들기는 물론 기업 이미지에도 상당한 훼손을 입힌다. 엘리엇이 1.6%의 지분으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중단시킨 것도 결국 여론전을 통해 동조 세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의 주장보다는 엘리엇의 주장이 시장에 더 먹혔던 셈이다. 하지만 이 같은 투기자본은 목표로 했던 수익을 내면 곧바로 주식을 팔고 떠나버린다. 소버린의 경우 주가가 오르자 2005년 7월 SK 주식을 전량 처분해 9000억원 이상의 차익을 얻고 나갔다. 미국의 투자은행 JP모건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같은 해외 투기자본이 기업 의결권을 확보해 기업 경영에 적극 개입한 사례는 지난해에만 662건이었다. 6년 만에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인데, 662건 중 106건이 아시아를 무대로 한 것이었다. 이 중 한국에서 벌인 활동은 24건이었다. 보고서는 “아시아는 정부가 소액 주주 보호 차원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며 “행동주의 펀드 등 투기자본이 변화를 요구할 더 큰 힘이 생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은 적대적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수익을 능동적으로 창출해가기 때문에 지분율이 낮더라도 국내 기업이 느끼는 경영권 위협 정도는 더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은 특히 반기업 정서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어 투기자본이 여론을 등에 업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안성맞춤이다. 정부의 순환출자 고리 해소 등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기업들에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고 지주회사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보험업법 개정 등을 통해 금산분리 원칙 확립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삼성·현대차그룹 등은 이러한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지배구조를 개편해도 아직 지주회사 형태가 아닌 지배회사 형태이고, 금융회사가 다른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금산분리 원칙에도 어긋난다. 이 같은 취약한 지배구조는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을 편안하게 하고 있다.

더구나 국내 기업은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없어 이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그나마 국내 기업의 방어막 역할을 하던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찬성표를 던졌다가 곤욕을 치른 후부터 민감한 기업 이슈에 대해서는 발을 빼는 모습이다.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는 대신 민간으로 구성된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에 위임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지배구조 개편안을 유보한 것도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발을 뺀게 결정적이었다. 정몽구 회장(6.9%)과 기아차(16.8%) 등 오너 일가의 우호지분을 모두 합쳐도 30.1%에 불과한 지배구조에서 2대 주주의 찬성을 확신하지 못하자 개편안 자체를 미뤘다는 분석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사태에서도 확인했듯 국민연금마저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에 나서지 않으면 사실상 국내 기업은 경영권을 방어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창업자나 최대주주에게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기업이 적대적 M&A 위협에 처했을 때 기존 주주가 저가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포이즌 필(Poison Pill) 등 적극적인 경영권 방어 수단을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경영권 방어 장치는 전무


차등의결권은 주요 선진국이 활용하고 있는 제도다.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은 차등의결권을 이용해 M&A 걱정 없이 버크셔해서웨이를 경영하고 있다. 버핏은 이 회사 주식 21%를 갖고 있는데,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34%에 이른다. 1주에 200표가 부여된 이른바 ‘수퍼 차등의결권 주식’을 다량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정보통신(IT) 기업도 차등의결권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구글이 대표적이다.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의 발행 주식은 1주당 1개의 의결권이 있는 A형 주식과 1주당 10개의 의결권이 있는 B형 주식으로 나뉜다.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A형 주식 지분율은 각각 5.8%, 5.6%에 그친다. 하지만 페이지와 브린은 B형 주식 83.3%를 갖고 있다. 이 덕에 두 공동창업자의 의결권은 총 51.1%로 절반이 넘는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다. 마크 저커버그가 갖고 있는 페이스북 주식은 14.3% 밖에 안 되지만, 의결권은 59.7%를 갖고 있다. 1주당 10개의 의결권을 가진 B형 주식의 77%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액주주 보호 등 사회적 공감대 형성해야

포이즌 필은 적대적 M&A나 경영권을 침해당하면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 매수가 가능한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기존 주주들이 새 주식을 싼값에 사들이게 되면 공격을 시도하는 측은 확보해야 하는 주식이 늘어나게 된다. 기업을 뺏으려는 입장에서 ‘독약’이 되는 주식발행권을 회사의 정관에 명시한다는 의미에서 ‘독약 처방’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포이즌 필은 기업의 추가 비용 부담을 최소화해 빠르게 발동할 수 있고, 실행하지 않더라도 기업 이사회의 협상력을 제고시키는 등 기업 가치 유지와 일반 주주의 이익 극대화에 효과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퀄컴 등 정보통신(IT) 기업과 골드만삭스·무디스 등 금융그룹 등이 포이즌 필을 채택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일찍이 도입을 검토했던 제도이기도 하다. 법무부는 2008년 경영권방어법제 개선위원회를 구성한 후 이듬해인 2009년 포이즌 필 도입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 하기도 했다.

최근 일부 야당 의원이 차등의결권과 포이즌 필 도입을 골자로 한 관련 법안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실제 도입까지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시민단체와 여당이 ‘주주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며 재벌 기업이 경영권을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들 제도의 도입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제도가 경영권 방어가 아닌 재벌의 경영권 독점이나 편법 승계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가 필요하다는 입장과 재벌 기업의 경영권 상속을 위해 주주 가치를 훼손할 것이라는 입장이 대립하는 양상이다. 특히 최근 조양호 회장 등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논란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가족 승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현대차그룹 사태도 이면에는 경영권 승계 문제가 깔려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선택한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안은 당초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반면 대주주 일가의 승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현대모비스의 알짜 사업분야인 모듈과 AS 부문을 전체의 40%로 과소 책정해 떼어낸 후 현대글로비스에 갖다 붙이는 안 자체가 모비스 주주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현대차를 향해 “분할 비율이 합당하지 않고, 논리도 부족하다”고 지적했고,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도 모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의 차등의결권제 도입 등은 재벌 특혜라는 것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없으면 외국인 주주 비율이 높은 대기업이 또 당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들 제도를 도입할 경우 소액주주는 어떻게 보호할지 등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1437호 (201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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