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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몰락이 주는 교훈] 본업 탄탄할 때 다각화에 힘써야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높은 석유 수출 의존도, 저유가에 치명상 … ‘반도체 착시’ 한국도 산업구조 개편 시급

1만3779%. 베네수엘라가 기록한 최근 1년간 물가상승률이다. 단연 세계 최고치였다. 지난 5월 7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의회가 이 같은 사실을 발표했다고 AFP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의회 산하 재정경제개발위원회의 라파엘 구즈만 위원장은 “새로운 재정·환율 정책을 통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안정화하는 게 시급한 시점”이라고 전했다. 앞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필두로 한 베네수엘라 정부는 물가 통제가 어려워지자 지난해부터 공식적인 물가상승률 발표마저 중단한 상태였다. 이미 국가적으로 채무 불이행 상태일 뿐 아니라, 세계 상위의 원유 보유국임에도 국민들은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고통 속에 살고 있다.

불과 7~10년 전쯤만 해도 베네수엘라는 ‘중남미의 희망’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제시한 나라’ 같은 호평 속에 세계가 주목할 만한 경제개혁 성적표를 자랑하고 있었다. 2013년 숨진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집권 때의 일이다. 당시 차베스는 사회적 소외 계층의 전면 무상복지,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통한 경제 개발, 중남미 경제의 통합 추진 등 파격적인 정책으로 베네수엘라를 이끌었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그의 정책은 효과를 보는 듯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3년 62.1%였던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2007년 33.6%, 2011년 31.9%로 뚝 떨어졌다. 1인당 국민총소득도 2003년 3482달러에서 2011년 1만2000달러로 급증했다. 50%를 넘던 실업률이 32%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속가능한 개혁이 되진 못했다.

포퓰리즘보다 치명적이었던 차베스의 실책

이쯤에서 많이 나오는 얘기가 ‘포퓰리즘의 실패’다. 차베스가 눈앞의 인기에 급급한 나머지 미래를 못 보고 무상복지 같은 선심성 정책 남발로 재정 건전성을 크게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또 무상복지가 베네수엘라의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리면서 차베스 집권 후기 연평균 수십%의 높은 물가상승률과 높은 범죄율, 부정부패 확산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베네수엘라 몰락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고, 가장 핵심적인 원인도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보다 중요한 원인 하나를 지적한다. 바로 ‘산업 다각화의 실패’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차베스가 (집권) 초기에 거둔 성공은 석유 자원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뒷받침됐는데 석유로 인한 수입의 급격한 감소가 그런 성공을 결국엔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석유산업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의존도가 화를 키웠다는 얘기다. 베네수엘라는 2013년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석유 부문이 차지하고, 전체 외화 수입의 95%가 석유 수출과 관련해서 발생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후 수년 간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장기 저유가 추세로 직격탄을 맞은 데 있었다. 미국의 셰일혁명으로 원유 공급이 극적으로 증가했고, 산유국들도 이에 대응해 증산하는 등 과잉 공급 상태가 심화되면서 유가는 추락을 거듭했다.

그 사이 베네수엘라의 무역수지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2015년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입액은 전년 대비 3분의 2 수준으로 급감했다. 외환보유액이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급한 불을 끄고자 차입 규모를 늘려갔지만 역부족이었다. 화폐 가치는 추락을 거듭해 오늘날의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까지 이어졌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드는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어도 2000년대 중반 고유가로 잘나갔던 때의 분위기가 유지됐더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매장량은 2013년 기준 2976억 배럴로 세계 1위다. 세계 매장량의 17.8%에 달한다. 결국 중장기 관점에서 변변한 제조업 기반 하나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게 결정적 패인이었다.

이 무렵 다른 중동 산유국들의 사례를 보면 베네수엘라의 실패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우디아라비아, 탈석유 산업 다각화로 정보기술(IT) 프로젝트 발주 확대.’ 2011년 코트라가 낸 보고서 제목이다. 사우디가 GDP의 50%, 전체 수출의 90%를 차지할 만큼 절대적인 석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산업 다각화에 공을 들이고 있어 한국이 새로운 수주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다. 이에 따르면 사우디는 ▶사회 인프라 확충 ▶제조업(석유화학·철강·금속가공 등) 육성 ▶금융·의료·관광업 육성 ▶IT 산업 육성 ▶인적자원 개발과 같은 5대 전략 부문을 선정하고 각 부문 맞춤형 정책들을 추진해나간다. 특히 원유 생산에서 정제와 석유화학 제품 생산으로 투자를 확대해 기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노리기도 했다. 신성장 분야인 IT에도 눈을 돌렸다.

사우디는 2016년에도 탈석유 개혁을 위한 ‘비전 2030’을 발표,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의 일부 지분을 매각해 국부 펀드를 조성한 후 석유 의존도를 줄이는 데 투입하기로 했다. 사우디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를 주도 중인 가운데 이르면 올해 말까지 아람코 지분 5%를 매각할 계획이다. 사우디나 베네수엘라보다 GDP 규모가 크지 않지만 저유가 직격탄에서 자유롭지 못한 카타르·쿠웨이트·바레인 등의 다른 중동 산유국들도 일찌감치 산업 다각화 노력을 기울여왔다. 카타르는 2008년부터 비에너지 산업 육성에 나섰고 지난해부터는 의약품 시장을 집중 육성하기로 했다. 쿠웨이트는 2014년부터 5년 간의 중장기 개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비철금속·식품 등의 제조업 육성에 나섰다. 바레인은 금융업에 눈을 돌렸다. 그 결과 2000년 GDP의 44%를 차지하던 에너지산업 비중이 2012년엔 19%까지 작아졌다.

비록 이들 산유국 역시 저유가로 타격을 받고 최근 경제성장률이 둔화됐지만, 베네수엘라처럼 두 해 연속 마이너스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2016~2017년)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하진 않은 배경이다. 물론 베네수엘라가 산업 다각화에 마냥 신경을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중동 산유국들처럼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호주 출신의 라이언 말렛 아우트림 독립저널리스트는 미국 매체 카운터펀치 기고에서 “차베스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산업을 다각화하려 노력해 농업이나 제조업이 베네수엘라 경제에서 점점 부각됐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 때문인지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분석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의 식료품 수입은 2008년에서 2014년 사이 3배로 급증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높은 석유 의존도였지만 차베스를 포함한 어떤 정권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중동 산유국들, 산업 다각화 적극 나서

베네수엘라의 이런 몰락은 멀리 한국 경제에도 일정 부분 시사점을 준다. ‘반도체 착시’, 최근 1년 간 국내 경제계에 수없이 회자됐던 말이다. 글로벌 반도체산업이 유례없는 호황을 맞으면서 한국 경제에 보탬이 됐지만 이면에선 다른 산업이 부진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5월 24일 언론 인터뷰에서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어 이른바 반도체 착시가 있는 점, 제조업 가동률이 굉장히 오랫동안 낮아진 점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를 앞세운 2개 기업의 영업이익을 더했더니 20조95억원으로 코스피시장 상장기업 전체 영업이익의 46.7%나 될 만큼 반도체 의존도가 높았다. 전년 동기(31.8%) 대비 비중이 한층 커진 것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과 같은 대외적 우려 요인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산업 다각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각계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조선업과 건설업의 쇠락, 지금은 호황이어도 경기 민감성이 커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반도체에 대한 높은 의존도 등 대내 불안 요소도 많은 상황”이라며 “물론 석유 외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던 베네수엘라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보다 미래 지향적인 산업 구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때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1437호 (201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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