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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5) | 진나라 문공의 사람들] 주군의 19년 방랑 견디며 버팀목 역할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허벅지살을 베어 바친 개자추…벗이자 스승이자 충성스러운 신하

풍몽룡이 정리한 [열국지(列國志)]는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그만큼 방대한 시기에 걸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특히 ‘동양의 그리스 신화’라 불릴 만큼 이야기의 보고이며 철학과 사유의 원형이 담겨있다. 작품의 배경은 불확실성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다. 문명이 전환하고,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가들은 부국과 혁신의 길을 모색했고, 사상가들은 인간과 공동체의 좀 더 나은 삶에 대해 고심했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지금 다시 [열국지]를 펼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신하가 주군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주군의 자질이나 군신 간의 신뢰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신하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느냐다. 물질적인 이익이든 정치적인 이상(理想)이든 간에, 주군이 신하의 꿈을 이뤄줄 수 있어야 신하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런데, 목적을 이루기까지 기다림이 지나치게 길다면 어떨까? 주군이라는 사람은 도망자 신세고 설상가상 나이까지 많이 들어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주군을 보좌하는 생활 또한 고되고 힘들다. 굶주리거나 죽을 고비까지 넘겨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고생한다고 해도 성공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이 매우 힘겹더라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면, 결국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약이 없다면, 그냥 이 상태로 모든 것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면, 그 때에도 신하들은 흔들림 없이 주군을 따를 수 있을까?

춘추시대의 2번째 패자

일반적인 답은 ‘힘들다’이겠지만, 여기 이와는 다른 사례가 있다. 무려 19년이나 주군과 함께 천하를 떠돌아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함께 했던 사람들. 유혹과 위협 앞에서도 지조를 꺾지 않았으며, 게을러지고 포기하려 드는 주군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들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꿈꾸며 버텨냈기에, 이들의 주군은 마침내 대업을 이루었고, 천하에 명성을 드날리게 된다. 진(晉)나라의 군주로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霸者)가 된 문공(文公), 그리고 그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진 문공의 이름은 중이(重耳)로, 마흔이 될 때까지만 해도 파란만장한 운명의 주인공이 될 줄은 자기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복형이자 훌륭한 인품을 가진 태자 신생(申生)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저 안락한 삶을 누리면 됐다. 하지만 신생이 보위를 노린 계모 여희의 모함으로 자결하고, 여희의 마수가 자신과 동생 이오에게까지 미쳐오면서 중이는 외가인 적(翟)나라로 피신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중이가 진나라를 떠나자 수많은 호걸이 그의 뒤를 따랐다. 호모와 호언 형제, 조쇠, 개자추, 선진, 위주, 전힐 등 문무(文武)의 인재들이 함께 짐을 쌌다. 중이의 명성이 원래 높기도 했지만, 신생이 죽은 상황에서 임금이 될 만한 사람은 중이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중이와 함께한 망명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여희의 꾐에 넘어간 아버지 헌공이 중이를 제거하려 한 데 이어, 형을 제치고 보위를 차지하고자 했던 동생 이오도 그에게 자객을 보냈다. 머지않아 귀국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무너졌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수중에 재물이 하나도 없어 배를 곯고, 구걸하며 연명한 날도 많았다. 그러길 어느덧 19년, 주군 중이는 환갑을 넘겼고 신하들도 중늙은이가 됐다.

남편의 장래를 위해 정을 끊어낸 아내

보통 이와 같다면 신하들은 지쳐 떨어져나갔을 것이다. 주군이 자신들의 꿈을 이뤄줄 가망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중이의 신하들은 대부분 흔들리지 않았다. 개자추는 주군을 위해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바쳤고, 호언 형제는 주군을 보호하고자 동분서주했다. 중이를 따른다는 이유로 아버지 호돌이 처형당하는 비극까지 겪었지만, 그들은 몸과 마음을 바쳐 주군을 보필했다.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이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중이가 잘못하면 꾸짖어주었으며, 중이가 움츠러들면 격려하는 등 그들은 주군의 벗이자 스승, 충성스러운 신하가 됐다.

여기에 더해 중이는 현명한 아내를 만난다. 제나라에 머물던 시절, 제나라 군주의 딸과 결혼한 그는 이내 평온한 삶에 젖어들었다. 대업 따위는 필요 없다며 날마다 술상을 차려놓고 환락에 빠졌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본 그의 아내가 어느 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을 따라온 선비들의 운명은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당신께서는 하루 빨리 진나라로 되돌아가 저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노고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당신께서 떠나온 이래 진나라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진나라 군주가 무도하여 백성이나 이웃나라나 모두 그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늘이 당신께 기회를 주시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떠나십시오. 안락함과 게으름은 대장부의 일이 아닙니다.”

아내의 말을 들은 중이는 고개를 저었다. “인생이란 한바탕 덧없는 꿈과도 같소. 나도 이제 늙었으니 그대와 함께 이곳에서 생을 마칠 것이오.” 중이는 지쳤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내까지 얻었으니 기약 없는 망명자 생활은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자 아내는 중이를 취하여 잠들게 한 후, 호언을 불렀다. 그러고는 중이를 이불 채로 마차에 태워 제나라를 떠나게 했다. 남편의 장래를 위해 정을 끊어내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중이가 분노해 호언을 창으로 찌르려 하자,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간언했다. “신들을 죽여서 공자께서 성공할 수 있다면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신들이 부모형제와 처자를 버리고, 고국 땅을 떠나 만리타국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이렇게 함께 공자를 모시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주소서.” “대장부라면 마땅히 노력하여 공을 이루기 위해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내와 신하들의 진심이 닿았기 때문일까? 중이는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갖은 고생하며 백성의 고충 통달

이와 같은 아내와 신하들의 헌신 속에서 중이는 19년을 버텼다. 천하를 방랑하며 각 나라의 내부 사정과 인재 현황, 나라들 간에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파악했다. 풍찬노숙을 하며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도 이해했다. 이 경험이 후일 군주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큰 자산이 된다. 이는 다른 나라의 군주들은 갖지 못했던 것으로 “진나라 군주는 19년이나 천하를 방랑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해본 사람이다. 그리하여 백성의 사정에 통달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수 없다”라는 초나라 성왕의 말이 잘 설명해준다.

만약 중이에게 이와 같은 훌륭한 신하들이 없었다면, 중이가 저런 현명한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망명객 중이’를 ‘패자 진문공’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중이의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줄 수 있는 군주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군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최선을 다해 오랜 시간을 견뎌내면서 말이다. 중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보위에 오른 후 고생을 함께 한 신하들을 포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의(仁義)로써 나를 지도하고 잘못을 일깨워주었기에 최고 등급의 상을 내린다.”

epilogue 1

중이의 망명생활을 함께 했던 대다수 신하들은 주군을 배신하지 않았지만, 유독 두수라는 사람이 재물을 들고 도망간 적이 있었다. 중이가 왕이 된 직후, 이 두수가 찾아온다. 중이는 화를 내며 말했다. “네놈이 돈을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과인이 조나라와 위나라에서 구걸하며 끼니를 이었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냐? 천하에 뻔뻔스러운 놈이다. 죽기 싫으면 당장 물러가라.” 그러자 두수는 지난날의 잘못을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조정에는 전하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알기에 전하를 두려워하고, 전하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조정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지난날 신이 주군의 재물을 훔쳐 달아났기 때문에 전하께선 무척 고생하셨습니다. 이 나라 백성으로서 신이 저지른 죄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신을 용서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신으로 하여금 전하의 수레를 몰게 하소서. 그러면 나라 안 사람들은 전하가 지난날의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중이는 두수에게 수레를 몰게 했고, 이 모습을 본 조정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epilogue 2

중이가 걸식하던 시절, 개자추는 굶주려 힘들어하는 주군을 위해 자신의 허벅다리 살로 국을 끓여 올렸다. 하지만 중이가 보위에 오른 후 그는 은거를 택한다. 원래부터 입신양명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부귀를 탐하는 동료들이 마뜩잖았기 때문이다. 개자추가 조정에 나오지 않아 깜빡 잊었던 것일까? 중이는 함께 유랑한 신하들에게 작위와 봉읍을 내리면서 개자추만 빼놓는다.

그의 어머니가 왜 가만히 있느냐고, 자신의 공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개자추는 이렇게 말했다. “주군이 보위를 이은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이를 모르고 자기 공만 내세우며 부귀를 다투고 있습니다. 저는 저들과 함께 하기 싫습니다. 평생 짚신을 삼으며 지낼지언정 하늘의 공을 제 공인양 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으로 들어갔다.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여생을 마칠 작정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중이는 부랴부랴 개자추를 찾았다. 중이는 직접 면산으로 갔지만 개자추의 종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에 중이는 산에 불을 지르도록 한다. 불이 나면 개자추가 어머니를 모시고 산을 내려올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 불이 잦아들 때까지 개자추는 나오지 않았고, 모자가 서로 안고 타죽은 채로 발견됐다. 이후 진나라 사람들은 개자추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식(寒食)의 유래다(사마천의 [사기]에는 개자추가 불타 죽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개자추가 은거를 택해 면산으로 들어갔고, 중이는 그 일대를 개자추의 산, 즉 ‘개산(介山)’이라고 이름을 바꿔 그의 봉토로 주었다고 한다).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 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36호 (20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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