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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10%가 떠난 베네수엘라 왜?] “차 고장 나면 버리고 먹을 것 찾아 쓰레기통 뒤져” 

 

베네수엘라= 글·사진 류승훈 플랫클 대표
차베스 통치 기간 중 시장 기능 왜곡으로 산업 생산성 추락…유가 상승에도 혜택 미미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중심부에 있는 자라 매장에 상품이 없어 텅 비어 있다.
지난 1월,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이 연상될 정도로 세련된 시설, 그러나 이윽고 다른 공항과는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 큰 공항에 현재 착륙 수속을 밟고 있는 항공기는 내가 타고 왔던 1대뿐, 공항이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대부분 항공사가 운항을 중단한 탓이다. 공항 안쪽에 흥미로운 표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차베스에 대해서 좋은 말만 합니다.’ 이 장면이 함의하는 진짜 의미를 알게 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베스의 등장은 놀라움이었다. 언행은 거침없었고 신념이 가득한 연설에 민중은 감동했다. 밝은 피부색이 상류층의 표식이나 다름없던 나라에서 짙은 피부색의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빈민층에 처음으로 손을 내민 국가 지도자였다. 그는 빈민가에 식량을 나눠주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자신의 TV쇼를 만들어 국민과 소탈하게 소통했다. 차베스는 우상이 됐다. 그리고 이윽고 독재자가 됐다.

차베스의 시혜는 낮은 환율과 가격 통제 두 가지 메커니즘으로 움직였다. 베네수엘라는 수출의 96%를 차지하는 석유에서 얻은 이익으로 필요한 물건을 수입하는 경제다. 차베스는 석유에서 얻은 이익을 사회에 나누고자 의도적으로 환율을 낮게 고정한다. 석유에서 나는 이익을 줄이는 대신 수입 업자들이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달러에 접근할 수 있게 한 방법이었다. 싼 가격에 들어온 수입품은 정부 가격 통제를 따라 낮은 가격에 팔아도 한동안은 적정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상적으로 작동하면 수입 물량은 시장을 통해 자율적으로 배분되는 한편 인플레이션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는 체제였다. 하지만 차베스는 외환에 대한 접근권을 국가에 맡겼다. 반 차베스 성향의 기업은 외화 배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환율·상품가격 왜곡해 빈민들 인기 얻어


▎카라카스의 겉모습은 서울과 닮았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전기와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고, 도로 정비가 되지 않고 있으며, 다른 중남미 도시와 달리 생계형 범죄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반대파는 차베스에 동맹 파업과 쿠데타 등으로 맞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승리로 동력을 얻은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대지주들이 가진 농장을 단계적으로 수용해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농업에 필요한 종자·비료·기계 등을 제공하는 거대 민간 농업 독점 기업은 국유화해서 국가가 관리했다. 국영 석유기업 근로자들이 파업하자 숙련 근로자를 절반 가까이 해고하고, 통신, 전기, 철강 및 기타 전략 산업을 차례로 국유화했다. 생활에 필요한 기본 비용을 정부가 부담하는 과감한 정책을 밀어붙였다. 21세기 사회주의 탄생에 모두 환호했다.

그러나 차베스 통치 기간 베네수엘라 거의 모든 산업 생산성이 악화했다. 차베스 이전에도 생산성이 낮았던 석유 외 기타 산업은 환율이라는 보조금을 받은 수입품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고, 엄격한 가격 통제는 이들이 사업을 계속할 유인을 꺾었다. 대부분의 국내 산업이 몰락했고 베네수엘라 내부의 값싼 달러를 노린 수입 소비만이 성장했다. 이 기간 베네수엘라 유일한 수출 산업인 석유 생산량도 하락 일로를 걷는다. 미국 셰일가스 개발 등 석유산업에서 혁신이 일어났지만, 베네수엘라 석유산업 이익은 혁신과 확장이 아닌, 정부가 필요로 한 다른 생산성 낮은 산업을 위한 보조금으로 쓰였다. 풍족한 오일 달러로 일반 국민도 해외여행시 최대 5000 달러를 국가가 지정한 낮은 환율에 교환할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 빈민가 주민이 마이애미 해변으로 휴가를 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국가 지정 환율과 암시장 환율과의 격차가 크고 가격 통제로 시장이 왜곡되자 경제 주체들은 딴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커피 수입을 위해 국가로부터 외환을 배정받은 수입업자는 커피 대신 돌을 수입해 커피라고 신고한다. 그리고 국가에서 받은 외환을 암시장에 팔아 이득을 챙긴다. 2014년 베네수엘라 커피 수입액은 8200% 증가했지만, 시장에서는 커피 품귀 현상이 일었다. 육류도 마찬가지로 2013년까지 10년 간 수입액이 1만7000% 늘었지만, 같은 기간 실제 국내 소비는 22% 감소한다. 다른 분야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외에서 신고한 대 베네수엘라 수출액과 베네수엘라에 신고된 수입액의 차이는 40%에 육박했다. 수입을 위해 배정받은 달러는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이는 부패한 기업가, 군인, 관료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커피에서 기름까지 정부 보조금으로 싸게 살 수 있는 재화를 들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국경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2014년, 차베스 신화를 지탱하던 석유 가격이 75% 폭락한다. 석유 가격이 폭락하자 국가가 외화를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국가가 외화를 공급하지 못하자 암시장 환율이 급등했고, 베네수엘라 화폐가치가 폭락했으며, 물가가 급등했다. 비누·밀가루·우유·기저귀와 같이 가격 통제를 받는 주요 생필품은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국유화와 가격통제로 국내 생산 역시 마비된 상황이었다. 텅 빈 수퍼마켓 선반, 그 앞에 길게 늘어선 줄, 국가에서 보급하는 아이들 가방인 작은 삼색 가방을 메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은 어느덧 이 나라의 수도, 카라카스 거리의 상징이 됐다. 유명 안데스 국립대학 교수 로돌포 수모사는 말한다. “내 월급은 7000원이 됐고 이 돈으로는 3일치 양식 밖에 살 수가 없다.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가 물려준 가구를 팔고, 집을 팔았다.”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 국가 미래에 희망을 잃은 청년들은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2018년 4월까지 인구의 10%가 넘는 400만 명이 조국을 떠났다. 시몬 볼리바르 공항을 거대하게 수놓은 예술품을 설치한 크루즈 디에즈는 “내 작품으로 장식된 공간이 이별의 상징처럼 되어 슬프다”고 말했다. 현재 베네수엘라 국민 중 절반이 나라를 떠날 의향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다.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를 물으면 모두가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라는 같은 대답을 듣는다.

정부 보조금 받아 암시장에 팔아 치워


▎차베스 집권 초기 이 지폐 한 뭉치의 가치는 우리 돈 5000만원 수준이었다. 현재는 사진 속 지폐 뭉치 전부를 다 합쳐도 1000원 가치가 되지 않는다.
2016년 석유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며 어쩌면 이 불행이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석유산업은 지난 15년 간 석유 숙련 인력을 대거 해고하고 재취업까지 금지하며 해외로 내몰았던, 그리고 경쟁력 있는 산업의 생산성 향상을 등한시한 채 경쟁력 없는 분야에 퍼주기를 했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유가 상승에도 2008년 대비 현재 베네수엘라 석유생산량은 절반 미만이다. 올해 인플레이션은 이미 3만%를 넘었다. 이곳에 온 지 4개월, 모든 물건 가격이 10배가 됐다.

2018년 5월 20일 베네수엘라의 조기 대선이 치러졌다. 야당 측이 불법 선거로 규정하고 시위를 예고하자 정부는 정부 보조 물품을 국영 수퍼마켓에 풀었다. 시위가 예고된 장소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 당장 굶지 않으려면 수퍼마켓에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여전히 미 제국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의 사보타주에 맞서 ‘경제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제 저항조차하지 않는다.

전염병이 돌고 많은 사람이 죽은 후, 남은 사람들이 생존 이야기를 그리는 인류 종말에 관한 유명 드라마가 있다. 베네수엘라 현장은 그 드라마 모습과 유사하다. 차가 고장 나면 버려야 하고, 아프면 죽어야 한다.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고, 먹고 살기 위해서 살인을 한다. 번듯한 건물, 도로, 병원, 모든 것을 갖췄지만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없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나라가 이렇게까지 나빠질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 필자는 현재 베네수엘라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한국 스타트업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1440호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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