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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26) |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할까?] 원시적 사냥이 현대적인 경기로 변신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협력해 달리며 먹잇감 쫓던 모습과 닮아 … 사냥 무리 북돋우는 공동체 의식도 응원과 비슷해

▎6월 27일(한국시간) 열린 러시아 월드컵 한국과 독일의 예선전. / 사진:연합뉴스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은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다. 단 한 종목인데 올림픽 이상의 열기를 만들어 낸다. 축구는 왜 사람들을 열광시킬까? 많은 스포츠가 있지만 축구만큼 집단 흥분을 자아내는 종목이 있을까 싶다. 다른 스포츠도 그렇지만, 축구는 유난히 여럿이 같이 볼수록 재미 있고, 넓은 광장에 모여 ‘떼’ 지어 볼수록 흥이 나다 못해 온 몸에 아드레날린이 넘쳐 흐른다.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카타르시스가 몰려온다. 대도시 큰 길에서 악을 써도 된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일단 같이 모이면 열광의 도가니에 빨려 들어간다. 사람이 달라진다. 분명 스포츠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일 텐데, 뭘까?

진화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보이는 게 있다. 축구엔 우리 인류가 지금의 인류로 살아온 핵심 역량이 들어있다. 한마디로 인류의 원형이 축구에 살아있다. 무슨 말일까? 지금으로부터 600만년 전 급격한 기후변화로 숲이 줄어들고 초원이 늘어났을 때, 인류는 초원으로 근거지를 옮겼지만 이후 400만년 동안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사자 같은 덩치는 물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없었고 표범 같은 민첩함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듯이 초원에는 수백만 마리의 초식동물이 있어 이들이 자연사한 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이들 맹수들에게 밀려 차례는 언제나 3순위, 4순위였다.

이렇게 살던 인류가 드디어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개발한 게 200만년 전쯤이다. 그 전부터 조금씩 용도를 늘려 오던 손으로 사자와 표범의 이빨과 발톱에 필적하는 무기를 만들어 낸 데다 달리는 능력까지 개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생존방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달리기를 하는 게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이건 우리 인류가 초원으로 이주한 후 진화를 통해 만들어낸 독특한 능력이다. 200만년 이상 된 인류 화석에서는 어디서도 달리기를 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1984년 아프리카 동부 투르카나 호수 서쪽에서 발견한 ‘투르카나의 소년’의 몸에는 이전 화석과 다른 게 많았다. 160~150만년 전, 상처를 입어 사망한 11~15세 정도 되는 소년의 뼈는 이전 인류의 뼈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무엇보다 팔보다 다리가 길었다. 또 이전 인류 화석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달리는 다리에 필요한 신체 구조를 갖추고 있었고, 덕분에 영양상태가 좋아져서 그런지 그대로 성인이 되었으면 170~180cm의 키에 70kg쯤 되는 체중이 되는 몸을 갖고 있었다. 이전 인류의 키가 평균 150cm 정도였으니 엄청나게 큰, 좀 더 정확하게는 현재 인류와 비슷한 키를 갖게 된 것이다. 뇌 크기도 급격하게 커져 900cc나 됐다. 우리의 직접 조상으로 여겨지는 호모 에렉투스(또는 호모 에스가스테르)다.

이전 화석과 딴판인 ‘투르카나의 소년’

인류 진화사에서 이들이 중요한 건, 이때 개발한 새로운 생존 전략이 이후 인류가 살아가는 기본 방식이 됐기 때문이다. 여럿이 힘을 합치는 협력을 기반으로, 누구보다 오래 달리며 사냥을 성공시키는 방식 말이다. 우리가 열광하는 축구는 바로 이런 인류의 핵심 역량을 그대로 현대의 경기장에 옮겨 놓은 것이다. 여럿이 힘을 합쳐 푸르고 넓은 초원을 달리며 골(goal, 목표)을 만들어 낸다. 푸른 초원에서 이루어지는 사냥의 원형을 그대로 구현한다. 사상자가 나지 않게끔 무기를 들지 않았을 뿐 팀을 이뤄 사냥감을 쫓는 사냥의 모든 것이 축구에 들어 있다. 축구를 원시성 가득한 스포츠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원시성은 ‘낙후된’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본적 본성, 문명 이전의 본성, 그러니까 원초적 욕망을 채워주는 스포츠라는 뜻이다.

골 사냥에 성공한 선수가 먹잇감 사냥에 성공한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그렇다. 가장 강렬한 표정으로 포효한다. 포효는 맹수들에게만 허락되는 표현이다. 그래서 [축구 부족(The soccer trib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데스몬드 모리스는 ‘원시적인 사냥이 현대적인 경기로 변한 것’이 바로 축구이기에 ‘강렬한 열정을 불러 일으키고,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우리 안에 깊숙하게 자리잡은 이런 오래된 본성과 맞닿아 있어 세계적인 스포츠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18년 현재 유엔 회원국은 193개국이지만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국이 211개국이나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축구의 원시성은 엠블럼에 그대로 살아있다. 엠블럼이란 팀들이 자신의 상징처럼 여기는 문양인데, 독수리·사자·호랑이가 가득하다. 이번 월드컵에 참가한 32개 나라 중 14개 나라가 동물이 들어간 엠블럼을 쓰고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는 호랑이를, 주최국 러시아와 독일, 폴란드, 나이지리아, 튀니지와 멕시코 등 6개국은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독수리를 엠블럼으로 하고 있다. 잉글랜드와 스페인, 세네갈은 사자를,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를, 일본은 삼족오다. 말이 엠블럼이지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판 토테미즘 아닌가. 각 나라의 축구 리그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도 이 연장선 상에 있다. 사냥이란 한 집단의 생존이 걸려 있는 것이기에 집단에게 사냥은 중요했다. 중요한 사냥을 떠나기 전 날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를 통해 떠나는 사냥꾼들에게 힘을 불어 넣는 의식이 세계 어느 문화권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치맥을 먹어야 힘 있는 응원이 되는 것 같은 것도 이런 축제의 흔적일 지 모른다!). 이 의식은 또 떠나는 사냥꾼들의 단합을 위한 시간이기도 했으니, 사냥은 그 자체로 집단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지금은 TV를 보며 응원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이런 의식을 통해 사냥꾼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고유한 기능은 여전하다. 이런 DNA가 우리 안에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집단의 문화가 녹아 있는 건 당연한 일. 가령, 남미에서 화려한 개인기가 발달한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축구가 스포츠로 발달하던 19~20세 초, 축구는 남미 백인 중산층의 전유물이었다. 노예의 후손들은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나중에는 허용이 됐지만, 몸을 부딪치면 백인이 아닌 선수에게 반칙을 선언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니 백인이 아닌 선수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무조건 몸싸움을 피해야 했다. 몸싸움을 피하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겠는가. 현란한 몸놀림 밖에 없었다. 남미 선수들의 멋진 드리블은 이런 절박함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절박함은 또 남미 선수들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동기이기도 했다. 가난을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공동체를 하나로 만드는 집단주의적 기능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우리’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그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적의를 표출한다. 축구만큼 난동꾼이 흔한 종목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더 나아가 국가 간 대리전 양상까지 띤다. 서로 관계가 좋지 않은 프랑스와 독일,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그렇고 멀리 갈 것도 없이 한·일전이 그렇다.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지낸 선수들이 하는 말이 있다. “다른 경기에는 져도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지면 안 된다.” 한·일전에 출전한 선수들에게 그 경기는 거의 전쟁이다. 이기면 승전군처럼 환호하고, 지면 다들 패잔병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축구 경기를 보도하는 기사들도 거의 전쟁 중계하듯 한다. 승리 사냥, 전사, 전략과 전술, 제압, 격파, 일사불란 같은 전쟁 용어를 일상적으로 쓴다.

축구에 오프사이트 규칙이 있는 것도 이런 공동체 정신을 함양하는 데 방해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중세시대 영국에서는 매년 부활절을 앞두고 마을 축제가 열렸고, 그중에서 ‘매스 풋볼(mass football)’은 축제의 핵심이었다. ‘매스’라는 말답게 수백 명,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4, 5km나 떨어진 거리에 골대를 세워 두고 하루 종일, 일진 일퇴하며 경기를 벌였다. 당시 경기는 지금처럼 여러 골을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쪽에서 점수를 내면 그걸로 끝이었는데, 하루 종일 싸우며 즐겨야 할 축제를, 더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치고 박고 해야(실제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데, 격렬한 몸싸움을 하지도 않고, 얌체처럼 골대 앞에 서 있다가 1시간 만에 골을 넣어 축제를 싱겁게 끝내 버리면 어떨까? 공공의 적이었을 것이다. 처벌 받아 마땅한, 치사하고도 바람직하지 않는 ‘죄’였을 것이다.

중세시대 영국 마을 축제의 핵심 ‘매스 풋볼’


▎호모 에렉투스는 팔보다 다리가 길었고 뇌 크기도 이전 인류보다 컸다.
이렇듯 조직력으로 원하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축구는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에게 시사하는 점들이 많다. 일단 이기는 팀들의 공통점은 경기장을 넓게 쓴다는 점이다. 시야가 넓다. 그리고 이 시야는 대체로 선수들 간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에서 나온다. TV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실력 좋은 팀들은 선수들끼리 끊임없이 대화한다. 선수 출신 TV 해설자들이 “지고 있을 때 소통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좋은 공을 주었으면 잘 했다는 의미로 엄지 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이고,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의도가 좋았을 때는 박수를 쳐준다. 말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호와 몸짓으로 커뮤니케이션 한다. 서로 마음이 연결될 때 패스도 잘 되는 까닭이다. 지는 팀에는 이런 게 많지 않다.

두 번째, 승리는 어떤 선수로 팀을 구성하고, 어떻게 적절한 동기부여를 하며, 각각의 선수들이 가진 잠재력을 어떻게 끌어 내느냐에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능력에 기반한 공정한 평가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히딩크가 잘 했던 게 바로 이것이었고, 얼마 전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가 최고의 리그가 된 건 자국 선수를 우대하지 않고 인종과 국적을 넘어 능력을 우선한 것이다.

한 때 유럽을 평정했던 나폴레옹은 휘하에 최고 계급인 육군 원수 26명을 두었는데, 귀족 출신은 2명 밖에 없었다. 이전까지 장군은 모두 귀족 출신들 만 할 수 있었지만 나폴레옹이 능력에 기반해 승진시킨 덕분이다. 그러면 나머지 24명은 어디서 나타났을까? 고아, 막노동, 술집 아들 출신이었다. 다른 때라면 아무리 열심히 능력 발휘를 해도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을 텐데 좋은 리더를 만난 덕분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본 수많은 나폴레옹의 부하들이 어떤 비전을 세웠을까? 아마 살살 싸우라고 해도 죽어라고 싸웠을 것이다.

이와 달리 왜군이 쳐들어오자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가기 바빴고, 신하들이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명나라에 망명까지 하려 했던 조선의 선조는 반대였다. 사기 죽이기의 명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한 논공행상이 대표적이다. 선조는 호성공신과 선무공신 두 가지로 포상했는데, 호성공신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지 않고 임금인 자신을 호위하고 수행한 이들에게 내린 상이다. 전쟁이 나고 임금이 피난을 간다고 하자 신하들이 모두 자기 살겠다고 도망쳤기 때문에 그들이 소중했던 모양이다. 모두 86명에게 주었는데 그중에는 내시(24명)와 심부름꾼, 마부(6명)들이 포함됐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싸운 선무공신에 오른 이는 고작 18명에 불과했다. 특히 스스로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의병장은 한 명도 없었다. 민심을 얻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시와 마부들을 선정한 게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당연히 평가해 주어야 할 공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누가 충성하고 싶었겠는가?

리더는 이성뿐만 아니라 조직의 원시성도 자극해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2013년, 같은 선수들이 뛰었음에도 전반기와 후반기 성적이 극과 극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은 많은 승리를 일궈냈지만, 후임인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은 바닥을 기었다.
조직은 어떤 리더가 이끄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진다. 박지성이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2013년, 같은 선수들이 뛰었음에도 전반기와 후반기 성적이 극과 극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은 많은 승리를 일궈냈지만, 후임인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은 바닥을 기었다. 단지 감독만 바뀌었을 뿐인데 말이다.

영국의 정치인이자 평생 영원한 축구팬이라는 데릭 해튼이 이걸 보고 한 말이 있다. “사람들이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 퍼거슨은 매우 엄격한 규율주의자이긴 하지만 동시에 팔을 벌려 선수들을 안아주는 데도 세계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다. 어떤 직업에서건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때 소리를 질러야 할 때가 있고, 당황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고 화를 내야 할 때가 있는데, 이 때를 잘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따뜻하게 키스를 해줘야 할 때도 알아야 한다.”

리더는 이성만이 아니라 조직의 원시성(원초적 욕망)을 잘 건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활기를 불어 넣어 주어야 비로소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게 조직인 까닭이다. 축구를 보는 건 재미 있지만, 재미 있게 축구를 하는 건 어렵다. 조직을 이끄는 것도 마찬가지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441호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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