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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7) 도공(悼公)의 리더십] 적재적소에 인재 쓰고 스스로 모범 보여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신하들의 자발적 충성 이끌어내…쇠락해가던 진나라 다시 일으켜 세워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 문공이 죽고 진(晉)나라는 평균 이하의 군주들이 보위를 이어갔다. 아들 양공은 아버지가 남긴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 그나마 괜찮은 정치를 펼쳤지만, 손자 영공은 폭정을 휘두르다 신하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영공의 뒤는 숙부인 성공이 계승했는데 정사를 모두 실권자 조돈(趙盾)에게 위임한 채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성공의 아들 경공은 간신의 꾐에 넘어가 공신의 가문을 몰살시켰고 초나라에 대패하는 과오를 저지른다. 그는 귀신에게 맞아 병석에 누웠으며 변소에 빠져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경공의 아들 여공은 교만하여 사치가 심했고 신하들을 의심하여 세 명의 대신을 한꺼번에 주살했다. 그는 결국 신하에게 시해 당한다.

이처럼 역량이 부족한 임금들이 이어지자 진나라의 국력은 점점 쇠약해갔다. 국정은 혼란에 빠졌고 뜻있는 인재들은 다른 나라로 떠나버렸다. 다시 천하를 재패하리라는 희망은 사라지는 듯했다. 바로 이때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이 나타난다. 보위를 승계할 사람이 없어 겨우 찾아낸 종친 공손주다. 양공의 손자인 그는 당시 14살로 주나라 왕성(천자가 다스리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타국 떠도는 신세

공손주는 자신을 영접하러 온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과인은 타국을 떠도는 나그네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조차 가진 적이 없소. 그러니 어찌 감히 임금이 되길 바랐겠소? 만약 임금이라는 이름만 받들면서 그의 명령에는 따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임금이 없는 것만 못하오. 경들은 앞으로 과인의 명령을 기꺼이 따를 것인지 지금 바로 결정하시오. 그렇지 않겠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기기 바라오.” 신하들은 놀라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공손주는 그렇게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진나라를 번영으로 이끈 도공이다.

도공은 즉위하자마자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전 임금 여공을 타락하게 만든 이양오와 청비퇴를 처단하고, 여공을 시해한 정활을 사형에 처했다. 여러 대에 걸쳐 국정을 농단한 간신 도안가(屠岸賈)와 그 일파도 모두 제거한다. 도안가에 의해 참화를 입은 조씨 가문도 복권시켰다. 그리고 폭정을 피해 은거해있던 명장 한궐을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어진 신하를 높이 예우하고 능력 있는 신하를 대거 발탁했다. 덕분에 순앵·난염·조무·위강·한무기·사악탁 등 훌륭한 인재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될 수 있었다. 도공은 “자리를 비워두고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기다려야지, 사람을 위해 자리를 함부로 남발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적임자인지의 여부를 가장 중시하며 인사를 운영한 것이다.

도공이 이처럼 인재를 소중히 여기자 신하들도 본받는다. 기해라는 신하는 은퇴하면서 자신의 원수를 후임자로 천거하기까지 했다. 도공이 의아해서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상께서는 신의 직위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으셨지, 신의 원수가 누군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공평무사하게 적임자를 추천한다는 뜻의 ‘기해천수(祁奚薦讎)’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비롯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도공은 신하들의 지난 과오를 덮어주었고 상벌을 엄격히 시행하였다. 밀린 세금을 면제하고 세율을 낮췄으며 빈민 구제에 힘썼다. 홀아비와 과부를 지원하는 복지정책도 시행한다. 폐지되었던 좋은 제도를 다시 복원했으며 통상을 진흥시켜 경제적인 부를 일궜다. 북방의 산융과 평화협정을 맺고 남방의 초나라를 굴복시켰다. 나라들 간의 분쟁을 앞장서 해결하는 등 외치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도공의 통치 아래 진나라는 금방 전성기 때의 모습을 되찾는다.

더욱이 도공은 공명정대했다. 잘못을 반성하고 고칠 줄 알았다. 한 번은 도공의 친동생 양간이 군법을 어겨 처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화가 난 양간은 자신에게 벌을 준 위강을 모함했다. 동생을 끔찍이 사랑했던 도공은 위강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는데 위강의 상소문이 올라온다. “신이 주상의 아우를 범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명령을 내렸는데도 따르지 않고 명령을 내렸는데도 시행하지 않는다면 필시 패배를 자초하게 됩니다. 신이 명령에 따르지 않은 자를 처벌한 것은 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도공은 즉시 위강에게 사과했다. “과인은 형제의 사사로움을 행했고 경은 군대의 공무를 행했소. 과인이 아우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군법을 범하게 만든 것이니, 그 죄는 과인에게 있소.” 그리고 양간을 크게 질책한다. “네놈 때문에 과인이 오늘 사랑하는 장수를 죽일 뻔했다.” 도공은 양간을 체포하여 연금하고 3개월 동안 법과 예절을 교육시켰다. 지위를 막론하고 규칙을 지키도록 함으로써 기강을 확립한 것이다.

이 외에도 도공은 인의(仁義)를 중시했다.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감동하게 하고 사람을 기꺼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인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랜 기간 문제를 일으켜온 정나라를 정벌한 후, 관대하게 포용함으로써 정나라의 진심 어린 복속을 이끌어냈다.

29세의 나이에 요절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공은 스물아홉 살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는다. 도공이 죽은 후 진나라는 쇠퇴의 길을 걸었고 한(漢)·위(魏)·조(趙) 세 나라로 갈라졌다. 진나라가 몰락한 것은 도공의 시대에 비해 국력이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다. 도공의 앞시대나 뒷시대 모두 영토나 군사력, 인재풀의 깊이는 충분했다. 다만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최고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없었고, 군주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원칙을 지키고 공명정대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번영과 쇠락을 가른 것이다.

[박스기사] 경공(景公)은 누구인가

[열국지]에서 경공(景公)은 실제보다 어리석게 묘사된다. 이는 그가 [조씨고아(趙氏孤兒)]라는 작품과 관련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 4대 비극의 하나로 꼽히는 [조씨고아]는 간신 도안가에 의해 조씨 집안이 멸문될 때 문객 정영과 공손저구의 희생으로 어린아이 한 명이 살아남았고, 그 아이(도공 때의 명장 조무)가 장성하여 도안가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충성·희생·가족애·의리·정의 등 보편의 가치가 잘 녹아있어 오래 전부터 중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볼테르가 각색하여 유럽에서 상연했을 정도고 얼마 전 한국에서도 연극으로 공연되어 화재를 모은 바 있다. 경공은 바로 도안가에게 조씨 가문을 몰살하도록 허락한 임금이다. 조씨집 고아에게 애정을 갖는 사람들로서는 경공을 안 좋게 볼 수밖에 없었다. [열국지]는 [조씨고아]가 이미 인기를 끈 이후에 정리된 소설이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가 반영되었으리라고 본다(이에 비해 도공은 조씨 가문을 복권하여 복수를 이루도록 도와줌으로써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아울러 경공은 ‘병입고황(病入膏肓)’이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진나라의 명의 고완이 경공을 진맥하고 병이 고황(심장과 횡격막 사이)에 들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40호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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