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헤이세이 30년 격변의 일본 경제 

 

타마키 타다시 법무법인 광장 고문(전 니혼게이자이신문 서울지국장)
올해 4월 30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퇴위하고, 아키히토 일왕의 장남 나루히토(仁) 왕세자가 5월 1일 새 일왕으로 즉위한다. 일본은 일왕이 바뀌면 연호가 달라진다. 지금의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의미다. 쇼와(昭和) 일왕의 사망으로 1989년 1월 8일 막을 연 헤이세이 시대는 30년 간 지속됐다. 헤이세이의 일본은 어떤 시대였나. 이전 쇼와 일본은 전후 경제부흥을 완수하고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그러나 헤이세이 들어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분출했고, 문제 해결에 악전고투한 30년이었다.

헤이세이가 시작한 1989년은 일본 경제 고도성장의 정점인 시기였다. 당시 글로벌 기업 시가총액 순위는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상위 50개 기업 중 32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시가총액이 가장 높았던 NTT를 비롯해 금융·자동차·전기 등 업종의 기업이 시가총액 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1989년 말 닛케이 평균지수는 3만8915로 역사적 최고점을 기록했고,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헤이세이의 시작과 함께 일본 경제는 길고 깊은 나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20년’을 맞이한 것이다.

1990년 1월부터 주가는 급락하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닛케이지수는 7054까지 떨어졌다. 헤이세이 20년 간 주가는 5분의 1 아래로 폭락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던 일본 부동산 가격도 롤러코스터마냥 추락했다. 버블 경제 붕괴로 도쿄 부동산 가격은 일제히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주가와 부동산 가격의 급락으로 보유 자산은 급감했고, 절대 파산하지 않을 것 같았던 금융회사도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잇따라 도산했다. 고용 여건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여기에 엔고까지 더해져 기업들의 실적은 더욱 악화됐다. 한때 세계 시장을 석권했던 ‘메이드 인 재팬’ 제품은 한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패해 줄도산했다. 필자도 버블 붕괴의 직격탄을 맞았다. 1991년 도쿄 교외의 아파트를 5400만엔에 구입했는데, 1995년 미국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더니 가격이 2800만엔으로 주저앉았다. 결국 1998년 구입가보다 60% 이상 떨어진 2100만엔에 팔았다.

헤이세이 초반에는 일본 경제를 ‘일시적 경기 후퇴’라고 생각한 일본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달리 일본 경기는 점점 악화돼 갔다. 주가와 부동산 가격 하락과 더불어 기업 경쟁력은 떨어졌다. 여기에 디플레이션과 급속한 고령화가 겹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1995년 130엔이던 대형 프렌차이즈의 햄버거 가격은 불과 5년 후인 2000년에 65엔으로 반값이 됐다. 햄버거뿐만 아니라 수많은 식음료·공산품에 ‘가격 인하 붐’이 일었다. 경기가 악화돼 소비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고령자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았다. 기업들로서는 가격 인하 말고는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디플레이션은 일시적으로 소비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지만, 경기 침체 장기화의 원인이 됐다. 정부도, 기업도 경기 침체에 대응할 뾰족한 대책을 내지 못했다. 총리대신은 자주 교체됐지만 어느 누가 와도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헤이세이 일본은 ‘리더십 부족’과 ‘위기의 만성화’를 앓고 있는 합병증 환자와도 같았다.

일본 경제가 바닥을 친 것은 언제인가. 전문가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적지 않은 일본인은 2011년 3월 11일이 아니었겠느냐는 얘기를 많이 한다. ‘동일본 대지진’이 열도를 휩쓴 날이다. 지진과 쓰나미로 동북 지방을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일어났다. 많은 일본인 사이에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비장감이 감돌았다. 헤이세이 23년의 일이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돌이켜 보면 일본 경제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쯤부터 서서히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일본의 거시경제 성장률은 높지는 않다. 그러나 기업 실적은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으며, 닛케이지수는 2만을 넘어섰으며, 오랜 기간 침체됐던 부동산 가격도 일부 상승세로 돌아섰다. 고용은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로, 일손 부족 현상까지 심화되고 있다. 헤이세이 30년은 크게 침체가 이어진 20년과 회복세가 나타난 10년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지난 30년 간 일본 경제의 구조는 크게 변했다. 2018년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약 20조엔에 달했다. 헤이세이가 시작된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내용 측면에서는 크게 바뀌었다. 흑자의 내용을 보면, 무역흑자는 1조엔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흑자를 소득수지가 차지하고 있다. 큰 폭의 흑자를 벌어들인 소득수지는, 해외로부터의 배당금과 기술료, 여행수지, 증권투자 등으로 구성됐다. 30년 전은 어땠을까. 일본의 경상수지는 막대한 무역흑자로 소득수지 적자를 메꾸는 구조였다. 헤이세이 30년 간 일본은 물건을 수출해 돈을 버는 나라에서 기술과 서비스, 배당수익을 창출하는 나라로 크게 바뀐 것이다.

기업도 달라졌다. 헤이세이가 시작됐을 무렵 일본의 주력 산업이던 가전과 반도체는 현재는 대부분 철수했거나 매각을 통해 사라졌다. 워크맨과 텔레비전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했던 소니의 경우 2018년 역대 가장 많은 8700억엔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돈을 벌어들인 주력 사업은 이미지센서, 영화·음악 등 엔터테인먼트·금융 등이다. 후지필름도 극적으로 변화했다. 헤이세이 30년 간 일반 카메라용 필름 시장은 사라졌다. 현재 회사 주력 사업은 의료기기, 디지털 인쇄기, 복사기, 의약품 등이다. ‘시장의 소멸’이라는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 히타치도 파나소닉도 30년 간 완전히 다른 기업이 됐다. 이와 동시에 소프트뱅크·라쿠텐·패스트리테일링 등도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기업의 경쟁력 회복을 지탱하는 것은 기술력이다. 헤이세이 30년 간 일본에서는 18명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쇼와 시대에 5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경기 침체기에도 치밀하게 투자를 펼친 것이 주효했다. 헤이세이 시대엔 여성의 사회 진출도 순식간에 증가했다. 30년 전 일본 여성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은 15% 수준으로 남성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현재는 50%를 넘어 남녀의 대학 진학률은 거의 차이가 없다. 여성들은 이제 사회 각계각층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고 있다.

고령사회는 이제 본격화됐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90세까지 생존 비율은 남성 12%, 여성 26%였는데, 2017년에는 각각 26%, 50%로 2배가량으로 늘었다. 여성의 7%는 100세까지 생존하는 고령사회다. 기업은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한 것도 모자라, 70세까지 올리는 안도 검토 중이다. 과거 기업에게 정년 연장은 비용 증가 요인이었지만, 현재는 노인 인력 확보를 통해 노하우를 배우고 인력 부족을 해소하는 등 발상의 전환에 나섰다. 헤이세이 30년 간 외국인도 크게 늘었다. 외국인 노동자 수는 2.5배 늘어난 130만 명이 됐다. 일본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는 250만 명을 넘어 전체 인구의 2%를 차지한다.

1473호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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