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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국적항공사 영욕의 30년] 난기류에 흔들리는 ‘88년 체제’ 

 

함승민 기자 sham@joongang.co.kr
88년 제2민항사 선정, 89년 해외 여행 자유화… LCC 등장으로 과점구조에 균열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난기류에 흔들리고 있다. 두 항공사를 이끌던 경영자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4월 8일 새벽 미국에서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이보다 앞서 3월 28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거래정지 등 아시아나항공의 회계 파문의 책임을 지고 퇴진을 발표했다. 두 회사의 수장이 물러나면서 30년 간 유지된 항공 업계 투톱 체제는 전환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두 회사의 과거를 돌아보면, 경영권 문제뿐 아니라 항공정책과 저비용항공사(LCC)의 성장 등 시장환경 변화도 두 대형 항공사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년 간 유지된 ‘1국 1항공사’ 체제


▎1969년 3월 김포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에서 조중훈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내 항공운송산업의 양강체제는 1988년 제2민항인 아시아나항공의 출범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1969년 출범한 대한항공이 약 20년간 독점체제를 유지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창업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적자가 지속되던 국영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이후 1972년 보잉747과 에어버스의 A300 등 당시의 최신 기종을 구매하면서 규모를 키웠고, 미국·유럽의 취항지도 서서히 늘리면서 성장했다. 특히 1970년대 대한항공은 1·2차 오일쇼크라는 산을 넘으면서 크게 성장했다. 조 회장이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 즈음이다. 당시 연료비 부담으로 미국 최대 항공사였던 팬암과 유나이티드항공이 수천 명의 직원을 감원하는 와중에도 시설과 장비 가동률을 오히려 높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항공기 구매도 계획대로 진행했다. 불황 넘어 호황을 대비한 것이다. 이 결단은 오일쇼크 이후 새로운 기회로 떠오른 중동 수요 확보와 노선 진출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운수권 독점을 무기로 자국 항공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한 정부의 역할도 컸다.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막대한 규모의 항공기 도입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고, 공직자는 의무적으로 대한항공 항공편을 이용했다. 자국 산업 육성과 국위선양 등 외교적 목적을 위해 철저한 규제를 통해 보호를 해준 셈이다.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1국 1항공사’라는 자국기 보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자국기 보호를 통해 운송수입을 높이는 데 주력해온 각국의 항공정책이 항공산업 규제 완화 조치로 항공수요가 급증하면서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해 관광수지를 극대화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먼저 국가가 항공산업을 보호한다는 것이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경쟁을 통한 서비스 강화 등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1978년부터 자유화 정책을 채택했다. 이어 일본·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도 복수항공 취항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서비스 미흡과 항공료 인상 문제로 복수민항 허용

국내에서도 복수민항 허용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대한항공을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대형항공사로 키우는 데는 성공했으나 서비스 미흡과 항공료 인상, 외국과의 항공협상에서 복수항공사 취항 요구에 대응할 수 없는 문제점 등이 지속적으로 지적됐다. 더구나 88서울올림픽 등 폭발적인 항공수요 급증 요인을 목전에 두고 대한항공에만 공급을 의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1987년 국내선 승객은 507만 2000명으로 전년에 비해 무려 24%가 늘었다. 국제선도 같은 기간 10%가 증가했다.

결국 1988년 2월 12일 정부는 국내 항공 업계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며 제2민항사로 금호그룹을 선정했다. 전격 발표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하기 13일 전이었고, 실제로 인가를 내준 것은 퇴임 하루 전이다. 교통부가 공식발표에 앞서 통고하면서 경제부처들도 당일에야 알았다. 당정협의와 노태우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인가까지 극비리에 이뤄졌다. 당시 재무부의 한 고위 관계자가 “신문을 보고 처음 알았다”며 섭섭한 기색을 나타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당시 재계 20위권인 금호그룹에 특혜를 주었다는 시비가 뒤따랐다. 박성용 회장이 그룹을 이끌 때다. 교통부는 “▶자본력이 건실하고 ▶운송사업 경영능력이 풍부한 업체로 하되 ▶대재벌은 제외한다는 선정 기준을 세웠으며 이에 따라 지난해 9월 민항 설립을 희망한 금호그룹에 허가를 내줬다”고만 밝혔을 뿐 금호가 선정되기까지 과정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회피했다. 이에 시장에서는 전 대통령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의식해 호남을 근거지로 커온 금호그룹에 특혜를 준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투톱 체제 이후 양사 서비스 질 높아져


▎지난해 창립 30주년을 맞아 아시아나항공 각 본부별 직원들이 인천 제2격납고에 모여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
약 20년 동안 항공운송을 독점해온 대한항공은 독재정권 시절이라 대놓고 반발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우려했던 일”이라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시기상조다” “금호가 과연 해낼 수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대한항공은 그전까지 제2민항 얘기가 나올 때마다 “국적 항공사는 하나로 충분하다”며 항공사업의 전문성과 안전성 등을 들어 제2민항 허가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후에도 정부에서 단행한 복수민항화 조치에 대해 “시대의 변화에 역행하는 근시안적인 항공정책으로 자국 항공기업의 경쟁력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라며 비판을 이어갔다.

어쨌든 금호그룹은 그 해 12월 23일 국내 제2민항의 첫 비행기를 띄웠다. 2월 17일 출범 당시 사명은 ‘서울항공’이었지만, 취항 직전 아시아나항공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두 기업은 조종사 스카우트, 노선 배분 등을 놓고 다투기도 했지만 나란히 세계적인 규모와 노선망을 갖춘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했다. 아시아나항공이 적극적으로 신형 기종을 도입하고 공항 외투 보관, 기내 금연 등 참신한 서비스를 제공하자 대한항공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항공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기내식, 공항서비스, 항공요금 등 항공 서비스의 질도 높아졌다.

정책 변화에 따른 호재도 있었다. 1989년 1월 1일부터 내국인의 해외 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로 항공수요가 크게 확대됐다. 해외 여행 전면 자유화 첫해인 1989년 내국인 출국자수는 전년 대비 약 53% 증가했다. 해외 여행 자유화 조치 이전에는 수요가 부족한 국제선은 일본을 비롯한 해외발 국내 입국 수요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마저도 국내 항공사는 저가 정책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어 이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여행 자유화 조치로 아웃바운드 수요를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두 항공사는 승승장구했다. 이렇게 두 회사가 본격 성장궤도에 오르던 1991년, 박삼구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렇게 자리 잡은 두 항공사는 안정적인 운수권 확보로 성장을 이어갔다. 운수권은 특정 국가의 영공을 이용하거나 착륙하기 위한 허가다. 따라서 어떤 노선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항공사의 생사를 좌우한다. 신규 운수권은 정량평가의 점수가 높은 순서대로 항공사를 선정한다. 때문에 대형항공사가 운수권을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LCC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운항을 시작한 2006년까지 운수권을 사실상 과점했다.

물론 두 회사에게도 외환위기는 힘든 시기였다. 당시 대한항공은 자체 소유 항공기를 매각 후 재임차하면서 유동성 위기에 대처했다. 또 힘든 시기에 오히려 항공기를 대량 구입하면서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의 신뢰를 얻었다. 이 관계는 이후 대한항공의 안정적인 항공기 수급에 큰 도움이 됐다. 한편 아시아나항공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체질 개선에 주력했다. 기내식사업부를 매각하는 등 수익성이 나쁜 한계 사업과 비주력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 시기 글로벌 항공 업계에는 ‘동맹체’ 바람이 불었다. 1997년 ‘스타얼라이언스’’가 설립됐고, 2년 후 ‘원월드’가, 2000년엔 ‘스카이팀’이 등장했다. 항공사 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좌석 공유, 코드쉐어(공동운항), 공동 마일리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동맹체별 전용 라운지·체크인카운터 등의 혜택으로 고객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대한항공은 2000년 델타·에어프랑스 등과 스카이팀 창설을 주도했고, 아시아나는 2003년 스타얼라이언스에 15번째 회원사로 합류하면서 글로벌 항공사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중장거리 노선 경쟁력 여전하지만…


▎3월 4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본사 격납고에서 열린 대한항공 창립 50주년 기념식.
업계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온 건 2000년대 중반이다. 세계적인 항공자유화 확산과 주요국과의 항공협정을 통한 운수권 확대가 이뤄진 시기다. 특히 국내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2000년대 중국 노선의 운수권 확대와 2011년 시행된 일본의 항공자유화다. 또 한국을 동북아 허브로 만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태국·베트남·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를 연결하는 하늘길이 이 과정에서 두 대형항공사 외에 LCC가 운수권을 확보해 단거리 국제선에 안정적으로 진출하면서 양대 항공사의 과점체제에 균열이 갔다. 2006년 각각 37.7%, 23.9%였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점유율은 지난해 20.5%, 14.6%로 낮아졌다. 이를 기반으로 2010년대 들어 LCC 업계의 비약적인 성장에 따라 두 대형항공사의 실적은 급감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영업이익은 2010년부터 줄어들어 2013년엔 나란히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아시아나항공은 2010년 채권은행단과 자율 협약을 체결하고 재무구조 건전성 확보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두 회사의 실적은 2014년부터 반등해 다시 상승세를 탔다. 미주·유럽·중동 등 여전히 두 회사가 대다수 운수권을 갖고 있는 중장거리 경쟁력을 유지한 효과로 분석된다. 입·출국하는 승객수가 많고, 비례해 운항편도 많은 이른바 ‘황금알’ 노선이다. 그러나 두 항공사가 예전처럼 이들 운수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할지는 미지수다. LCC들이 최근 장거리 노선 확대와 대형기 도입에 과거보다 적극적인 데다, 두 회사의 총수 일가가 연이어 ‘갑질’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정부가 항공산업의 진입 규제를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다. 각각 정부의 제안과 허가로 시작된 항공 투톱의 미래는 결국 얼마나 정부의 비호에 의존하지 않고 있느냐에 달린 셈이다.

1480호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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