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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가려는 학생에게 장학금 주선대학 무용론까지 나오는 시대 왜 유학을 떠나야 할까. “전 세계 인터넷 서버에 담긴 정보의 80%가 영어로 된 것들입니다. 사물인터넷(IoT)·자율주행차·가상현실(VR)·증강현실(AR)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어느 한 곳에서도 3위권에 들지 못합니다. 전 세계 대학 랭킹 자료 어느 것을 봐도 우리 대학들은 1류가 아니에요. 유학 후 취업이 안 된다고 하는데 취업 경쟁력이 있는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을 전공하는 우리 유학생은 21% 밖에 안 돼요. 중국 유학생은 41%, 인도 학생은 83%가 STEM을 전공합니다.”그는 해외 유학 컨설팅을 하는 한편 유학 가는 학생들이 진학하는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한다. 그가 주선해 유학생들이 받는 장학금은 연간 10억원에 이른다(다수가 복수의 대학에 합격해 이들 대학에서 주선할 수 있는 장학금은 연간 40억원 규모이다). 그는 지금까지 총 150억원가량의 장학금을 주선했다고 말했다.그의 도움으로 두 딸을 미 휘트먼대와 터프츠대에 유학 보낸 라원기 별처럼빛나는교회 목사는 그가 지난해 말에 낸 책[가난한 아빠, 세계 명문대 학부모 되기]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중략)…저의 두 아이를 4년 간 미국 대학에 유학 보내는데 드는 돈이 총 5억원입니다. 제가 미래교육연구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목사로서 사례금을 많이 못 받는 저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아이들의 꿈을 이루어줄 수 없었습니다.”미래교육연구소의 영문 이름은 내일을 위한 교육 계획 연구소(Tomorrow’s Education Plan Institute)이다. “저널리스트로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 플래너로서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향한 꿈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실력과 의지만 있으면 가정 형편을 떠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해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추구하면 길이 열려요.”그는 매일 보타이를 맨다. 집에 보타이가 20여 개 있다고 했다. “신문사에 다니는 동안 배까지 내려오는 긴 타이가 불편했어요.” 향수도 뿌린다. 그는 나이 들면 옷차림도 정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도 이제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시니어)지만, 출퇴근 시간에 산에 간다고 배낭 메고 지하철 타는 거 가급적 피해야 합니다.”70세에 은퇴하면 아내와 남유럽으로 떠나 이탈리아 피렌체, 남프랑스의 어느 이국적인 도시에서 각각 한 달씩 살아보는 게 그의 버킷 리스트다. “맛집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로마의 뒷골목을 거닐다 눈길을 끄는 커피숍에도 들어가 보려 합니다. 딸 부부가 사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도 한 달 간 살아보고 싶어요.”미 아이오와대 유학 후 오슬로대 대학원을 마친 딸은 거기서 취업을 했고 거기 사람과 국제결혼을 했다. 사위와는 영어로 대화한다. 불편을 느낀 그의 아내는 어느 날 사위에게 “내가 영어회화 공부를 하든지 네가 한국말을 배워야겠다”고 말했다.그는 중학교 입시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대학에 갈 땐 재수를 했다. 대학 2학년 때 유신반대 데모에 참여했다 제적 당해 한때 낚시 등으로 소일하기도 했다. 그 시절 다시 대입 시험 준비를 하기도 했다. 명문대 제적생이 다른 대학에 수석 합격하자 대학 측이 어쩔 수 없이 입학을 시킨 일을 접하고서다. 1987년 개헌 후 복교했다. 그해 1월 타고 있던 버스가 한강에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신입 기자 시절엔 앞만 보고 독주를 하다 동기들에게서 “너는 우리 친구 아니다”란 소리를 들었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남들과 어우러져야 하고 때로는 셀프 컨트롤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영재성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노력하는 범생이 중 범생이였거든요.”49세, 이른 나이에 그는 기자의 꽃인 편집국장이 됐다. 교육 분야에서 부대사업을 해 보자고 회사에 제안했지만 수용이 안됐다. 그 무렵 미국 고교에 유학 보낸 두 아이를 미 대학에 보내야 하는 문제와 씨름하게 됐다. 이때 미국의 사립대학은 부모가 소득이 낮은 국제 학생에게도 장학금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후 아이들을 장학생으로 유학 보낸 경험을 살려 무료 유학 컨설팅을 시작했다. 퇴직 후 미래교육연구소를 차렸다. “저도 아들을 연간 총 300만원 들여 유학을 시켰습니다. 그동안 내가 축적한 정보와 직접 실천해 쌓은 경험을 유학을 가려는 사람들과 나누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사업의 외형도 상당히 커졌어요.”
아내는 미래교육연구소 공동대표그는 사후 시신기증 절차를 곧 밟을 생각이다. 아내에게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빈소를 차리지 말라고 당부했고, 해외에 있는 두 아이에게는 3년 후 유골을 받아 선산에 수목장을 지낸 후에나 찾아오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펄쩍 뛰기는 했지만, 죽은 후에 제 눈으로 자식들을 보겠어요? 아이들이 저를 보겠어요? 저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문상을 하고 돌아서면 3분 만에 고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납니다.”그는 기자 출신은 기본적으로 글을 쓸 수 있고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힘을 갖췄는데 이런 능력을 인생 2막 설계에 활용해 보라고 권했다. “저도 편집국장을 그만둔 후 햇수로 10년간 준비했습니다. 그 덕에 젊은이들 못지않게 인터넷을 다루고 워드, PPT, 엑셀 등에도 능하죠. 아내가 미래교육연구소 공동대표입니다. 연구소 살림을 맡고 있죠. 얼마 전 아내가 운전해 출퇴근하는 차에서 넌지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나지만, 여성으로서 그 나이에 고액 연봉을 받는 당신도 행복한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