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경로를 다시 요청합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내비게이션을 켜고 운전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면 ‘땡’하는 경고음이 나온다. 그리고 여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경로를 다시 요청합니다.” 조금 후에 새로운 경로가 제시되고 화면의 도착 예정 시각도 바뀐다. 자신이 잘 아는 동네길이면 경로이탈이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처음 가는 길인 경우 내비게이션을 무시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한국 경제에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됐다. 2년 전 경제정책의 운전대를 잡은 운전자가 갑자기 여태까지 가보지 않은 길로 차를 몰고 가기 시작했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아무리 보내도 운전자는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경제가 좋지 않은데 최저임금이 오르고 아무리 비용이 들어도 근로시간을 줄이느라 버스요금을 올리는 식의 정책이 이어졌다. 경고음을 아무리 날려도 꿈쩍도 하지 않고 마이웨이로 갔는데 알고 보니 그 길은 지도에도 잘 나와 있지 않고 길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수준의 길이었다. 그리고 이제 차창 밖에는 갈수록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황량하고 메말라 물도 없는 황무지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 조금 있으면 본격적으로 사막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2년여를 경고음을 무시한 채 달린 상황에서 돌아가는 길도 마땅치 않다. 그러고 보면 처음 가보는 길인데 경고음을 무시하고 달린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익숙한 길에서는 실수 정도가 나오지만 처음 가는 길에서는 대형 사고가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목표는 분명했다. ‘경제 내에 비즈니스가 잘 되어 일자리가 늘어나고 실업률은 떨어지고 소득도 늘어나면서 주식시장도 활황세를 보이고 소득격차도 줄어들고 해외 기업들이 우리 경제 내로 투자를 증가시키는’ 상황, 한마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족보가 불분명한 소득주도성장, 주 52시간 근무제 등이 우리 경제를 힘들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당장 금융시장에 이상이 발생하고 있다. 우선 주가가 하락하고 있다. 특히 원화가치는 연일 추락 중이다. 이런 가운데 자영업자 대출연체율이 상승하고 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들린다. 올 것이 오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경제에 약 550만 명에 이르는 자영업자들은 힘들게 영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보유한 부채가 대략 600조원 수준이다. 대략 1인당 1억원가량의 부채를 보유한 셈이다. 물론 부채가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실제로 부채를 보유한 경우 1억원을 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으로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가 1년 전 대비 7만 명 줄어들었다. 단순하게 계산해 1인당 1억원을 곱하면 7조원의 부채에 문제가 생긴 셈이다. 물론 이 부채가 모두 부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는 자영업자도 있다. 문제는 현재 경기가 부진하고 장사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폐업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빚을 다 갚고 충분한 자산을 챙긴 후 은퇴하는 게 아니라 버티고 버티다 도저히 힘들어서 문을 닫을 가능성이 크다.

서민금융기관(상호금융·저축은행·여신전문회사)의 자영업자 대출 규모는 2016년 말 약 45조원에서 2017년 말 65조원, 그리고 2018년 말 약 84조원까지 연간 20조원씩 총 40조원 정도 증가했다. 2년 사이에 거의 두 배로 된 셈이다. 우리 경제가 경기순환 사이클상 정점을 찍은 것이 2017년 중반, 즉 이 정부 출범 시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정부는 자영업자들의 비즈니스가 내리막을 보이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 정책을 추진하고 시행한 셈이다. 자영업자 대출은 그래서 안쓰럽다. 장사가 잘 되어 사업 확장을 위해 자금을 조달한 경우보다는 장사가 안 되는데 월급을 더 주라고 국가가 정책을 추진하니 이에 부응하면서 버티느라 자금을 추가로 조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담하다. 지난해 말 기준 서민금융기관의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이 2.93%였는데 불과 3개월이 지난 올해 1분기 말 연체율은 4.4%로 치솟았다. 증가분이 1.47%포인트이다. 이를 규모로 환산하면 50%(=1.47/2.93) 증가한 셈이다. 부산과 경남 지역만 보면 저축은행의 자영업대출 연체율은 5.8%대를 기록하고 있다. 전통 제조업 경기 부진을 온몸으로 견디어 내는 지역이다 보니 연체율이 엄청나다. 그런가 하면 일부 지방은행의 자영업대출 연체율이 1%를 넘어서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2금융권이 가장 취약하고 1금융권 중에서 지방은행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취약 부문부터 서서히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지금 우리 경제에서는 실물경기 부진이 금융 쪽으로 전이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위험이 금융 부문으로 전이되는 경우 금융회사가 대손충당금과 자기자본을 통해 이를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일부 저축은행 등 취약한 기관이 부실 대출 증가를 못 견디고 무너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실물경기 부진이 금융회사의 부실로 이어지면 대출회수 등의 조치를 통해 경제 전반으로 위험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금융회사들이 잘 버텨주기를 기대하지만 역부족인 기관이 나타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최근 두드러지는 원화가치 하락세도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반영하고 있다. 북한핵 문제 해결이 난항을 보이는 가운데 미중 무역갈등 문제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한 해 우리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55조원에 달했다. 기업의 엑소더스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증권투자자들이 해외 주식 직접 구매 규모를 늘리고 있다. 한달에 1조원이 넘는 돈이 해외 주식 구매를 위해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또 은행의 PB들은 달러표시 채권 투자를 권유하고 있다. 주식도 해외 주식, 채권도 해외 채권을 사들이고 있는 데다 기업 투자도 해외로 집중되다 보니 달러 수요가 급증하면서 원화가치 급락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 엑소더스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노동 경직성이다. 이 정부 들어서 노동의 경직성은 극에 달하고 있다. 노조는 일자리를 보유한 근로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줄을 선 취업희망자들의 입장과 상치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면 이미 일자리를 가진 비정규직들에게는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해당 기업의 인건비 부담은 급격히 증가하고 결국 기업은 신규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 정부 들어 공기업들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됐다. 수익성이 악화되는 경우 신규 인력 채용은 줄이거나 연기할 수밖에 없다.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줄을 선 취업희망자들의 기회는 박탈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진실의 순간이 오고 있다. 실물경제 부진이 지속되면서 금융 분야로 전이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당’과 ‘청’은 ‘정’을 원망하고 있다. 최근 ‘당’의 원내대표와 ‘청’의 정책실장이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나눈 대화는 속내를 훤히 드러내고 있다. 공무원을 원망할 뿐 방향이 잘못됐다는 점은 외면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 경제 내에서 수많은 내비게이션이 차분하게(?) 외치고 있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경로를 다시 요청합니다.” 현 정부는 이제야말로 이런 외침을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경청하는 척하면서 경로 수정을 미루면 차창 밖 풍경은 더욱 황량해질 것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우리 모두를 울리게 될 것이다.

1485호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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