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한·일 대화의 물꼬부터 빨리 터야 

 

불안하던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6월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양국의 정상회담이 불발되더니 결국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규제라는 강경 보복조치로 이어졌다. 정치 갈등이 경제 문제로까지 번졌다. 최근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파기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면서 안보 문제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이다.

사실 한·일 갈등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난 2년 간 양국은 정치·외교적으로 수많은 갈등을 빚어왔다. 2017년에 ‘평화의 소녀상’ 설치 문제로 일본이 한국과 통화스와프 논의를 중단한 데 이어 2018년 10월에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책임 인정 판결로 일본의 반한(反韓) 감정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올 1월에는 자민당 국방부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야마모토 도모히로 의원이 레이더·저공비행 갈등과 관련해 한국을 ‘도둑’이라고 부르는 등 망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이전의 정치·외교 갈등과는 결을 달리한다. 과거 한·일 양국은 정치·외교 갈등이 아무리 깊어도 경제만큼은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갈등이 이처럼 확대된 원인은 정치 갈등을 경제 보복으로 응수한 일본의 태도에 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은 한·일 관계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별 다른 일이 있겠냐’는 식으로 안일했던 탓도 크다. 하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경고가 있었던가.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4월 15일 긴급좌담회를 열고 양국의 경제협력이 얼어붙고 있다면서 민간 차원에서라도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윤 한일경제협회 회장은 지난 6월 한·일 간 첨예한 현안으로 경제인 교류마저 악영향을 받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사실상 손 놓고 있었다.

우리 정부와는 달리 일본 정부는 철저한 준비로 한국 산업의 급소를 찔렀다. 우리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을 통제해 공급망을 붕괴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2018년 이들 품목의 대일본 수입금액은 3억8000만 달러로 매우 적은 규모지만, 한국의 대일의존도는 리지스트 93.2%,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84.5%, 에칭가스 41.9%로 매우 높다. 에칭가스와 리지스트의 공급 차질이 생기면 대체 여력이 적은 한국은 1267억 달러의 반도체 수출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한·일 무역 분쟁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경제연구원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일본의 무역 규제로 반도체소재가 30%만 부족해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손실은 2.2%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여기에 한국의 보복조치가 시행된다면 0.9%에 달하는 추가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의 경우는 수출규제로 인한 GDP 감소폭이 0.04%에 불과하며, 한국이 보복을 한다고 해도 1.8% 감소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복잡한 분석 없이 단순히 전체 GDP에서 한·일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만 봐도 한국은 5.3%인데 반해 일본은 1.7%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찰과상, 한국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지난 7월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태세다. 이미 일본은 한국을 백색국가 대상에서 제외하겠고 밝혔다. 이 조치가 시행되면 한국의 피해는 전 산업으로 확산된다. 전략물자관리원에 따르면 첨단소재, 전자, 통신, 센서, 항법 장치 등 1100여개 품목이 규제 대상이 된다고 하니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 같다.

여러 대책들이 논의되고 있으나 뾰족한 방안은 없는 듯하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새계무역기구(WTO) 제소만 해도 실효성이 떨어진다. WTO 제소의 승패 여부를 떠나 최종 결정까진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리기 때문에, 당장의 해결책으로 보긴 어렵다. 부품·소재 수입처를 다변화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수십년간 구축해온 글로벌 부품·소재 공급 체인망을 하루아침에 변경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이번에 부품·소재를 국산화하자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국산화에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모든 부품·소재를 다 국산화 하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더라도 가격경쟁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부품·소재 국산화는 30년 넘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모든 정권마다 외쳐왔던 주장이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걱정이다.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일본 제품을 불매한다면 일본 제품 관련 기업들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주고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도 풀릴 수 있다. 만일 일본의 한국 제품 불매운동으로 이어진다면 우리의 출혈이 더 커진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대일본 소비재 수출금액은 360억 달러로 중국, 미국에 이어 3번째로 높다. 반면 소비재 수입금액은 292억 달러다. 만성적인 대일 무역적자에 허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흑자를 내고 있는 분야가 소비재다. 누구에게 피해가 더 큰지는 자명하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우선 한·일 양국 정부가 상대를 자극할 수 있는 표현부터 자제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감정적인 강경 대응으로 한·일 갈등이 더 깊어진다면 지난 반세기 동안 공생해온 경제 협력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양국 미래의 발전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가슴이 아무리 뜨거워도 냉철한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다음으로 정부가 하루 빨리 나서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전쟁 중에도 물밑 대화는 있다. 여기에 정치인은 물론 기업인, 경제단체, 지식인 등의 모든 대화채널을 가동해 문제 해결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 특히 기업인과 경제단체의 역할이 중요해 보인다. 한·일 수교 54주년 동안 수없는 정치적 갈등에도 흔들림 없이 경제교류가 이어지지 않았던가. 한편 대화 중에는 모든 비방과 보복조치를 중지하고 현상유지(Standstill) 원칙을 지키며 상호간 건설적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일본도 새롭게 맞이한 레이와(令和) 시대를 갈등과 반목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아무리 빈틈없이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일본 경제의 피해도 분명하다. 레이와(令和)의 의미처럼 평화(平和)와 조화(調和)의 정신이 필요하다.

1998년 10월 8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前) 일본 총리는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에는 일본 총리가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하고, 한·일 정상이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키자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일본 내 한류열풍 등으로 민간 교류가 활발해지며 두 나라 간의 간극을 좁히는 계기가 됐다.

지금 세상은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산업의 판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 시기를 놓치는 나라는 영영 따라잡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국과 일본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긴밀한 경제 교류로 양국이 함께 발전해왔가. 사생관두(死生關頭)의 시기에 승자 없는 치킨게임을 지속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일 관계가 좋았을 때 우리 경제도 좋았다”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의 말을 다시 새겨본다.

-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

1495호 (20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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