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비결정의 결정’에도 타이밍은 있다 

 

서울 남대문 시장통에 ‘묻지마 식당’이 있었다. 손님이 들어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비빔냉면을 가져다준다. 냉면을 다 먹을 때쯤에는 칼국수를 내온다. 메뉴를 알고 찾는 단골 손님들이라서 쓰다 달다 말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는다. 뭘 먹을까 하는 선택의 고민은 없다. 한국인이 개발한 ‘결정장애’ 치료요법 중의 하나가 뭐니 뭐니 해도 ‘짬짜면’이리라.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놓고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릇에 칸막이를 만들어 짜장면과 짬뽕을 따로 담아 한꺼번에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켜주니 말이다.

“결정, 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가.”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온갖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세수하고 밥을 먹을 것인가, 밥을 먹고 샤워를 할 것인가 등 크고 작은 고민에 빠진다. 현대인의 결정장애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한쪽을 고르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리를 뜻한다. 교통수단, 음식점 메뉴에서부터 한잔의 커피까지 실로 선택의 어려움은 끝이 없다. 선택의 기회가 오래 주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린다는 보장도 없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더 많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 결정장애가 심해질 수 있다. 다양한 상품이 즐비한 대형 상점이나 재래시장에서의 쇼핑시간은 길어진다. 비슷비슷한 상품을 들었다 놨다 하며 때론 스트레스에 빠진다. 그래서 쇼핑을 혼자 못 가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자신감이 생긴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사간 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바꿔주거나 구매를 취소할 수 있는 반품제도가 생겼고, 고객을 편안하게 해준다.

“우리 부부는 이따금 소소한 일로 다툰다. 특히 가장 많이 다투는 일 중의 하나가 ‘저녁에 무얼 먹을까’를 고민하다가 결정을 못하고 다툰다. 그러다가 밥을 먹으면서 서로의 화를 풀곤 한다. 어디 밥 먹는 일뿐이랴.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등등 둘 중에 누구 하나 결정을 못 내린다. 우리는 결정장애인들이다.”

2011년 독일의 젊은 저널리스트 올리버 예게스(Oliver Jeges)는 한 일간지에 미국의 담배회사 말보로의 선전 문구 “뭘 망설이세요(Don’t be May be)”에서 착안해 쓴 수필 ‘메이비(May-be) 세대’로 시선을 끌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단어 중에 “썸 탄다”는 표현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결정장애를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신조어 ‘메이비족’도 그래서 생겼다. 1980년대 이후 탄생해서 컴퓨터와 태블릿, 스마트폰과 친숙해진 세대를 일컫는다. 결정장애 세대들은 홍수처럼 밀려오는 정보와 선택의 여지가 많은 환경 속에서 ‘예’ 또는 ‘아니요’ 대신에 ‘~한 것 같아요’나 ‘글쎄요’라는 애매한 대답을 일삼는 특징을 가진다. 이들 메이비족의 성향은 단순히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특성으로까지 자리 잡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낳는다.

이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저것도 좋은 것 같고, 이걸 선택하자니 저것이 아쉽다. 당장에 최선의 선택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결국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옳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선택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단은 다양하다. TV, 신문, 라디오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은 인터넷 등 미디어가 홍수를 이룬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악독한 운명의 화살을 맞아도 참는가.
아니면 성노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액운에
창검을 들고 맞서 싸워야 하는가?
어떤 쪽이 더 거룩한(Nobler) 것일까.


실제로 주도적인 선택을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진다. 그 모습이 마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로 고민하는 햄릿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결정장애는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이라고도 부른다. 햄릿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하나. 아버지를 독살한 삼촌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던 대사 중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유명하다.

요즘 사람들은 햄릿처럼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못하고 주저하는 현상을 두고 ‘결정장애증후군’ 또는 ‘햄릿증후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수동적인 생활 습관이나 과도하게 넘쳐 나는 정보 탓에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증세를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시험을 볼 때도 마찬가지. 선다형(Multiple choice)보다 둘 중의 하나인 양자택일(One of the two)이 더 어려울 때가 많다. 햄릿증후군은 기본적으로 선택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전제를 안고 출발한다. 특히 현대사회 소비자 앞에 놓인 수많은 정보는 그들이 하나의 선택을 망설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비결정의 결정’으로 넘기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논란이 ‘뜨거운 감자’로 이슈화되고 있을 때 한 일간신문이 사설을 통해 전문가가 제시한 해법이다. “‘비결정의 결정(Decision of non-decision)’이라는 외교적 지혜가 필요하다. 사드 배치 여부를 결정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전략적 모호성은 미중 사이에 끼어 있는 소극적 눈치 보기로 비친다. 비결정은 미중의 요구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이고 단호한 결정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햄릿증후군’을 한국 소비 트렌드의 첫 번째 키워드로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선택 과잉 시대에 자발적 의사결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추천하는 한정된 상품만 선보이는 큐레이션 커머스(Curation commerce) 등 다양한 서비스의 등장을 예측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병적으로 모든 결정을 미룬다.” 독일의 예게스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은 답이 없다고. 그러나 암호화폐에 투자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 스타트업에 뛰어들어 이미 안정적인 노후 일자리를 마련한 사람 등 정보가 차고 넘쳐 결정장애와는 아랑곳없이 정확하고 빠른 판단으로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나 기업의 지도자가 “할까, 말까”라는 결정장애에 빠지면 나라와 기업은 불행해진다. 내가 결정을 못하면 적절하게 남의 도움을 받거나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 ‘버스 지나간 후 손 흔들기’처럼 결정의 시기를 놓친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1497호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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