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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9) 송 태조 조광윤과 개국 공신] 피의 숙청 대신 술자리에서 병권 거둬들여 

 

낙향 조건으로 대저택·재물 등 하사… 사돈 맺고 공신 자녀 외척으로 받아들여

▎사진:김회룡
거대 제국이었던 당(唐)나라가 몰락하고 그 자리에는 극심한 혼란이 찾아왔다. 54년 동안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의 다섯 왕조가 명멸하였으며 그 주위로는 오·남당·오월·민·형남·초·남한·전촉·후촉·북한의 10국이 할거했다. 이른바 ‘5대10국’의 시대로, 이들이 벌이는 권력투쟁과 전쟁 때문에 백성들은 편할 날이 없었다. 이 혼돈은 960년 후주의 장군 조광윤이 선양을 받아 송(宋)나라를 건국함으로써 종식된다.

조광윤은 원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군인이다. 5대10국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으며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만약 세종이 오래 살았더라면 조광윤은 송나라 태조가 아니라 후주의 명장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959년 세종이 급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후계자는 불과 일곱 살이었고 조광윤을 비롯한 장군들이 강력한 군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5대10국에서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쿠데타가 일어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결국 이듬해 960년 사건이 터졌다. 조광윤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 부하 장수들이 그에게 황제의 옷을 입힌 것이다. 어린 황제로는 이 어지러운 정국을 감당할 수 없으니 조 장군이 대권을 맡아 황위에 올라달라는 것이었다. 평소 조광윤은 이러한 주위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해왔으므로 술 취한 틈을 타서 ‘억지로’ 옹립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일화는 꾸며낸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나는 권력욕이 없고 황위를 찬탈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여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라는 것이다.

권력투쟁과 전쟁으로 점철된 5대10국 시대

어쨌든 조광윤은 이렇게 황제로 추대되었고 후주 공제의 양위를 받아 정식으로 황위에 올랐다. 그런데 즉위하자마자 시련을 만난다. 후주의 절도사였던 이균과 이중진이 조광윤에게 반발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당나라 때 국경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직제인 절도사(節度使)는 군사·민정·재정권을 모두 장악하여 막대한 권한을 휘둘렀다. 이 절도사들이 군벌화하여 패권 다툼을 벌인 것이 당나라의 멸망과 5대10국의 혼란상을 가져온 주요 원인으로 평가된다. 조광윤이 휘하 무장들을 거느리고 친정에 나서 이내 반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두려웠을 것이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절도사를 그대로 둔다면 이런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더욱이 자기 자신도 절도사 출신이 아닌가? 고심하던 조광윤은 개국공신이자 문관의 우두머리 조보(趙普)와 상의했다. “지금껏 전쟁이 계속 일어나 왕조가 수없이 바뀌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던 것은 군벌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오. 어떻게 해야 저들이 가진 힘을 줄여 황권을 안정시킬 수 있겠소?” 조보가 말했다. “답은 간단합니다. 병권을 중앙에 집중시키면 됩니다. 이를 위해 저들의 특권을 없애고 재산을 빼앗고 병권을 거두소서.”

‘힘을 빼앗아라? 말은 쉽다. 군벌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겠는가? 자신들이 가진 힘을 강제로 빼앗으려 들면 거세게 반발할 것이다. 저들이 연대한다면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한곳에 모아놓고 제거해버릴 수도 없다. 저들의 부하들이 더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신하의 힘이 크면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그냥 놔둘 수도 없고. 당대야 내가 어떻게든 통제한다지만 내 다음 대에는 과연 저들을 제어할 수 있을까?’ 조광윤의 고민은 깊어갔다.

전통사회에서는 새 왕조가 탄생하면 흔히 공신들에 대한 숙청이 벌어지곤 했다. 창업 과정에서야 공신이 가진 지혜와 힘이 도움이 된다지만 창업 후에는 왕권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강력한 무력을 소유한 공신의 경우 ‘저 자가 혹시라도 나에게 등을 돌리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군주들의 집중적인 의심과 견제를 받게 된다. 그래서 차제에 후환의 싹을 제거해버리는 것인데 명 태조 주원장의 경우에는 공신들을 ‘무차별 학살’ 하다시피 했다. 조광윤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윤이 선택한 방식은 달랐다. 그는 공신들과 담판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설득도 하지 않고 제거하기는 싫다. 내 뜻을 따라주기만 한다면 굳이 피를 묻힐 이유가 없다.’ 조광윤은 주연(酒宴)을 열고 석수신·왕심기·고희덕 등 자신과 고난을 함께 해온 역전의 동지들을 불렀다. 송나라 건국에 없어서는 안 될 주역들이었다. 참석자들 모두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쯤 조광윤이 말했다. “경들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이 자리가 있을 수 있겠소? 고맙소. 그런데 오히려 예전이 좋았다는 생각이 드오. 황제가 된 후로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자 본 적이 없소.” 장군들이 그 이유를 묻자 조광윤이 쓸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들도 알다시피 황제란 불안한 자리가 아니오? 누가 또 이 자리를 노리고 있을지 어찌 알겠소?” 이 말에 놀란 석수신 등은 그 자리에 즉각 엎드렸다.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신들을 의심하시나이까? 누가 감히 그런 역심을 품는단 말입니까? 그런 자가 있다면 신들이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옵니다.” 조광윤은 고개를 저었다. “짐은 그대들을 믿소. 그대들은 사직의 공신이며 짐의 형제 같은 이들이 아니오. 하지만 생각해보시오. 만약 그대들의 부하들이 그대들에게 용포를 입힌다면 어찌하겠소? 짐이 그랬듯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 아니오?”

천명을 받들라고 등 떠밀면…

‘나도 후주 세종의 고굉지신이었다. 그런 내가 후주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지 않았는가? 큰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의사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돌이켜보라. 바로 그대들이 천명을 받아 책임을 다하라며 나를 떠밀지 않았는가? 그대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면 단호히 거절할 자신이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조광윤의 말에 장군들은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목숨이 지금 이 순간의 말 한마디에 달려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광윤이 다독이듯 말했다. “이러면 어떻소? 가지고 있는 병권을 모두 내려놓고 낙향하는 것이? 그래준다면 자손만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소. 나와 사돈도 맺읍시다.” 결국 장군들은 병권을 포기하고 낙향을 약속한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술에 거나하게 취한 한 장군이 “까짓것 폐하에 명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나서는 바람에 분위기에 휩쓸린 다른 장군들도 너도 나도 병권을 내놓기로 약속했다고 하지만 국가의 큰 일이 이렇게 우연으로 진행되진 않았을 것이다. 조광윤이 논리(당신들이 나를 그런 방식으로 추대했듯이 당신들도 병권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와 실리(병권만 내어놓는다면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를 가지고 담판을 벌였고 여기에 공신 장군들이 설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조광윤은 여동생을 고희덕에게 시집보냈고 석수신의 아들, 왕심기의 아들에게 각각 딸을 하가(下嫁)시킴으로써 이들을 외척으로 받아들였다. 장군들에게 대저택과 막대한 토지, 재물도 하사한다. 자칫 유혈사태로 이어질 수 있었던 권력 안정화 작업을 평화적으로 완수한 사례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05호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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