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수준은? 

 

우리나라 기업의 지배구조는 미국·일본 등의 경쟁국과 비교할 때 어느 수준일까? 11월 13일 금융투자협회에서 ‘국민연금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안) 및 경영참여 목적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안) 공청회’가 열렸다. 주최자가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이니 정부 주관의 공청회이다. 기준안의 골자는 경영진이 배임·횡령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거나 환경책임(E)·사회기여(S)·지배구조(G)에 문제가 있는 이른바 ‘나쁜 기업’에 대해 국민연금이 정관 변경, 사외이사 선임, 이사 해임 등을 비롯한 경영참여 목적의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다.

상장사 경영진을 비롯한 재계는 비상이 걸렸다. 우려만큼 불만도 많다.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떨어지고 정부가 통제·운영하는 국민연금이 이사의 해임·선임에 관여하는 경영참여 활동은 과도한 관여이며, 기업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해치고 연금사회주의화하는 거라며 재계는 불만을 토로한다. 이미 정부는 5억원 이상의 횡령 또는 배임죄를 받은 경영진은 본인이 경영하던 회사에 복귀할 수 없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 시행령을 개정해서 11월 초부터 시행 중이다. 그리고 이사의 직무정지와 해임 요구, 배당 요구 등 경영참여 목적의 주주 활동을 단순 투자자의 자격으로 특별히 국민연금에 허용하겠다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도 9월부터 입법 예고 중이다.

특가법, 자본시장법,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의 3면에서 경영권 위협의 삼각파도가 몰아닥치니 재계로서는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라며 비명을 지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정부는 입장이 다르다. 국민연금이 경영참여 활동에 나서면 기업지배구조도 개선하고 국민연금 수익률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따질 것은 아니다. 다만 한가지 드는 의문은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가 도대체 어떤 수준이기에 이렇듯 정부가 연금사회주의 우려에도 국민의 강제 저축(국민연금)까지 동원하면서 사기업의 경영에 관여하고 간섭하려 하는가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제도와 시장 여건은 20년 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질적·양적으로 대폭 변했다. 외환위기가 하나의 획기적 사건이듯이 기업지배구조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90년대 중반만 해도 지배구조 개념을 아는 이는 학계에서도 드물었다. 오죽하면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처음으로 정책 이슈화했을 때 기업지배구조라는 용어 대신에 ‘경영감시체제 세계화 방안(1995.5)’이라고 했겠는가.

필자의 경험도 비슷했다. 그 무렵에 ‘○○그룹의 2005년 지배구조’ 보고서를 썼는데 회사 내부에서 용어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사기업 경영에 ‘지배’라는 정치 용어를 쓰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그랬던 상황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확 변했다. 기업의 문제는 모두 ‘좋지 않은’ 지배구조 탓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압도하고 소유지배구조 개선 목적의 규제와 입법 보강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지배구조 공백 또는 실패(governance failure)가 문제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사적 자치 영역에 과도한 공적 개입이 비판의 대상이 될 만큼 상황이 변했다.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 수준이 궁금한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인식과 판단은 초기에 설정하거나 제시한 기준점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식은 행동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정박 효과, 닻 내림 효과(anchoring effect)에 의해 왜곡되고 오류가 생길 수 있다. 경영권 견제 또는 위협 일변의 최근의 정책방향은 혹시라도 이런 효과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 때문에도 정책 대안을 논의하기에 앞서 기업지배구조 현 위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볼 필요가 있겠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먼저 ‘좋은 지배구조(good governance)’에 대해 합리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이해관계자가 동의하는 합리적 기준은 불행히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기관투자자 관점에서 좋은 지배구조는 주주권은 강하고 경영권 방어제도는 없어야 한다. 투자의 귀재라 하는 워런 버핏이 ‘상식적 기업지배원칙 2.0(2018.10)’에서 적대적 경영권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회사들이 흔히 채택하는 독약처방(poison pills), 복수의결권 주식에 반대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이와 달리 중장기 전략을 추구하는 기업가 입장에서는 투자자의 과도한 경영권 위협 및 단기 이익 추구를 허용하는 제도가 못마땅할 수 있다. 한편, 갈브레이드(John Galbraith, 1908~2006) 같은 좌파주의 관점에서는 주주가 선임한 이사로만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입장이 또 다를 수 있다. 정부는 회사의 여러 이해관계자 중 어느 한쪽의 이해를 대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정부는 국민경제의 지속 발전과 일자리 창출 효과가 높은 지배구조를 지지해야 하고 그러자면 경영 책임성 못지 않게 경영 효율성을 조화롭게 감안해야 한다.

저마다 관점이 다르니 기업지배구조를 평가·비교하는 일은 이러나 저러나 객관성에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 세계은행 ‘기업활동 원활지수(Doing Business 2019)’와 세계경제포럼 ‘국가경쟁력지수 4.0(2019 GCI 4.0)’에서 기업지배구조를 평가한 결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세계은행은 소수 투자자 보호(Protecting Minor Investors) 수준을 공시제도, 이사 책임, 주주 소송, 주주 권리, 소유·통제, 투명성의 6개 지표로 나누어 전문가 대상으로 조사해서 종합평가한다. 그 결과 한국의 소수 투자자 보호는 190개국 중 23위로 나쁘지 않다. 놀라운 것은, 믿기 어렵겠지만 한국이 미국(50위)·일본(64위)·독일(72위)보다 더 낫다는 사실이다.

2019 GCI 4.0의 평가도 이와 비슷하다. GCI 4.0은 감사·회계 기준, 이해상충 규제, 주주 지배로 나누어 각국의 기업지배(Corporate Governance)를 평가한다. 여기서 한국은 141개국 중 21위이며 미국(31위)·일본(41위)보다 순위가 높다. 요소별로는 유일하게 설문조사로 평가한 감사·회계 기준이 한국 37위로, 미국(17위)과 일본(16위)에 뒤지는 반면, 주주 지배는 한국이 17위로 미국(99위)·일본(89위)을 크게 앞선다. 그리고 이해상충 규제는 미국(8위)이 한국(21위)·일본(27위)을 앞선다. 한국이 미국보다 주주 지배에 앞서고 이해상충 규제에서 뒤지는 이유는 주주와 경영진의 대리인 문제를 규제 입법으로 접근하는 것과 사적 자치의 영역으로 두고 당사자 간 소송으로 접근하는 것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정리하면, 어떤 지배구조가 좋은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세계은행, GCI 4.0 평가는 우리나라가 경쟁국보다 못하다는 예단의 반례(counterexample)라는 점에서 눈을 씻고 다시 볼 필요가 있겠다.

- 황인학 한양대 특임교수(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1510호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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